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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한부 인생 (히 9: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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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홍문수 목사

시한부 인생! 여러분 이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중병을 앓고 있거나 큰 사고로 중태에 빠져 죽음을 앞둔 사람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있는 저와 여러분은 ‘시한부 인생’이 아닐 겁니다. 그렇죠?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언젠가 반드시 죽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죄송하지만, 우리 모두 ‘시한부 인생’이라는 사실입니다. 꼭 의사로부터 몇 달밖에 살지 못한다고 진단을 받은 사람만 시한부 인생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언제인지 모르지만 분명히 죽음을 향해 점점 가까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모래시계를 아시죠? 그걸 들여다보고 있으면, 우리 인생과 똑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윗부분에 담긴 모래가 아래로 쏴~ 하고 쏟아져 내리는 모습을 보면 정말 그렇습니다. 매일 사용하는 휴대폰의 화면을 보면서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해봅니다. 배터리 충전 상태를 표시하는 그림을 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한 칸씩 줄어듭니다. 칸이 없어지고 공란이 되면
갑자기 꺼져버립니다. 마치 사람이 숨이 끊어져 죽는 모습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은 누구나 시한부 인생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의식하지 못 하거나 애써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우리 한국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거나 이야기하는 것을 터부시합니다. 이것은 정말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죽음을 의식할 때 비로소 인생의 진면목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이 있었습니다. 평소에 늘 건강했는데 건강 검진을 받다가 종양이 발견되어서 정밀 진단을 받다가 암으로 판정이 됐습니다. 길어봤자 1년밖에 살 수 없다는 겁니다.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죠. 초조한 마음으로 석 달 후 재검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암세포가 사라진 것입니다. 오진이었는지 하나님이 치유해 주셨는지 모르지만 너무너무 감격스러웠습니다. 비록 석 달 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그분은 마치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습니다. 모든 게 새롭게 보였습니다. 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이제야 인생이 무엇인지 알 것 같습니다. 내가 죽음 앞에 시한부 인생이라고 생각하니까 인생이 제대로 보였습니다.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확실히 배웠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 분과 똑같은 일을 당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깨달은 바는 우리가 함께 공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이 시한부 인생임을 깨닫고, 그러기에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할지 정리해보는 기회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부디 단 한번뿐인 인생을 가장 값지게 행복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인간의 비극적인 운명 : 죽음, 그리고 심판

본문 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 ”
짧은 한 구절이지만 이 말씀 안에 인생의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비극적인 운명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곧 죽음과 심판입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죽음의 문제에 관한 한 정말 모든 인간이 평등합니다. 남녀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한번은 죽게 되는 겁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이야기입니다. 괴팍하기로 그가 한번은 뼈가 잔뜩 쌓인 공동묘지에 앉아서 뼈를 하나씩 찾고 있었습니다. 마침 알렉산더 왕이 지나가다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디오게네스가 퉁명스럽게 대답했습니다. “당신 아버지의 뼈를 찾고 있소이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도무지 어느 게 당신 아버지 뼈인지 알 수가 없단 말이요.” 알렉산더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아무 말도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무슨 뜻이겠습니까? 죽으면 다 똑같다는 겁니다. 왕도 평민도 ... 그러니까 인생 잘 살라는 겁니다.

그런데 죽음보다 더 비극적인 것은 죽음 후에 심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심판은 무슨 심판? 내가 내 인생 살았는데 내가 누구한테 심판을 받나?” 내 인생이라도 내가 스스로 작정하고 세상에 태어났나요? 아니죠. 보내서 온 겁니다. 그리고 내가 작정한다고 안 죽나요? 아니죠. 내 인생이라도 내 맘대로 안 되는 겁니다. 그 이유는 창조주 하나님이 우주만물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인생을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인간에게 이성과 양심을 주셔서 바르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셨지만 죄를 지었으므로 당연히 심판하신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이성이나 양심이 없는 동물은 심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 누구도 저항하거나 거부할 수 없습니다. 마치 죽음을 거부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그렇잖아요. 예를 들어 경찰이나 검찰에서 공권력을 가지고 나에게 재판을 받으라고 요구하면 꼼짝 못하는 겁니다. 물론 세상에서는 혹 공권력을 피해 도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죽음 이후 심판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육체의 죽음이 유가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데 그래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요, 모든 인간이 당면한 미래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쓴 약이 좋은 약이듯이 이런 말씀이 정말 인생에 유익한 말입니다. 계20:11~14 보면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그곳(지옥)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데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차라리 무엇이 더 낫다고 했습니까? 막9:47~49에서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 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그런데 최후 심판도 무섭지만, 사실은 이 세상 사는 동안 이미 심판 아래 있는 겁니다.
요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롬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 ” 마치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 아래 있는 것처럼 진노 아래 짓눌려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영적 사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돈을 벌어도, 세상 권세를 잡아도, 세상 재미 봐도 그때뿐이지 돌아서면 왠지 허전하고 불만스러운 겁니다.

[2]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 : 십자가 복음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비극적인 운명, 죽음과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즉 구원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외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몸을 입혀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과 심판의 원인인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을 삼아주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자는 누구든지 죄 사함을 받았고, 죽음과 심판에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본문 28절(상)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주로 재림하셔도 괜찮습니다. 걱정할 게 없습니다. 오히려 심판 받지 않고 천국에 들어가 영생을 얻는다는 사실입니다. 요3:16~18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지만 믿음의 기회가 아무 때나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육체의 죽음이 닥치기 전에 믿어야 합니다. 죽은 이후에는 더 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육체의 죽음은 구원을 위한 데드라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구원받은 사람의 이이야가 나옵니다. 예수님 옆에서 십자가에 달린 강도입니다. 그는 처음에 예수님을 욕하다가 가만히 보니까 아니거든요. 오히려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회개하는 마음으로 크게 외칩니다. 눅23:42 “ ...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 ” 그러나 예수님께서 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의 구원받은 사실을 선언하셨습니다. 눅23:43 “ ...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

마태복음 20장을 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포도원 주인이 품꾼을 모집합니다. 오전 9시(제3시)에 나가서 모집해 와서 1 데나리온을 주기로 약속합니다. 그후 정오(제6시), 오후3시(제9시), 심지어 오후5시(제11시)에도 품꾼을 모집합니다. 오후6시(제12시)가 되어 품삯을 나눠줍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생깁니다. 오후5시에 온 사람에게 1데나리온ㅇㄹ 주는 겁니다. 먼저 온 사람들은 속으로 자기들은 더 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모든 이들에게 똑같이 1 데나리온씩 주는 겁니다. 먼저 온 자들이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자기 뜻대로 정당하게 준 것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를 담고 있습니까?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는 것이고, 따라서 먼저 믿고 나중 믿고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떤 사람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차라리 막판에 믿는 게 낫겠네 ... 여러분, 정말 그런가요? 그렇지 않죠. 예수 믿고 이 세상 사는 동안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영적 은혜를 누립니까? 평강과 기쁨, 위로와 소망 등 ... 그게 어딥니까? 그리고 험한 세상이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보호하심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뿐인가요? 장차 천국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하늘의 상을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형벌을 위한 정죄 심판은 면제되지만, 상급의 심판은 받게 됩니다. 신앙 인생에 대한 평가입니다. 물론 이것은 좋은 겁니다.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계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3] 죽음을 대비하는 삶 : 신앙, 그리고 사명

우리가 죽음에 관해 전혀 모르는 사실 세 가지가 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어디서 죽을지 모릅니다. 어떻게 죽을지 모릅니다. 반면에 분명히 아는 사실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한번은 꼭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혼자서 죽습니다. 아무 것도 갖고 갈 수 없습니다. 이런 사실들을 명심하면서 우리는 죽음을 대비해야 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한부 인생인 우리가 죽음을 대비해야 할까요? 언제 이 세상을 떠날지 알 수 없기에 평소에 다음 세 가지를 준비해 두어야 합니다.

 ① 신앙 :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요?

첫째로, 죽음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마치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입국하는 것과 흡사합니다. 입국 심사(immigration)를 통과해야 됩니다. 그때 무엇이 필요한가요? 비자입니다. 비자만 있으면 문제없이 당당하게 들어갑니다. 천국에 들어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 입국 비자만 있으면 됩니다. 그게 뭔가요?
예수 십자가를 믿는 신앙입니다. 우리가 믿으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스탬프를 찍어 주십니다. 그것을 가리켜 성령의 인(印)치심이라 부릅니다.(엡1:13)

둘째로, 죽음은 육체에서 영혼이 분리되어 천국으로 올라가는 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었다가, 그것을 벗어두고 나방이 하늘로 날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도 죽음의 순간 육신을 벗어두고 영혼이 하늘나라로 훨훨 날아가는 겁니다.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 썩을지라도 영혼은 불멸입니다. 지옥으로 가거나 아니면 천국으로 가서 영원히 삽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의 신앙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언제 하나님이 부르셔도 아멘 하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신앙 준비를 한 사람과 하지 못한 사람은 마지막 임종 때의 모습이 전혀 다릅니다.

18세기 프랑스의 지성으로 일컬어지는 볼테르, 그는 평소 기독교를 엄청 비판했습니다. 심지어는 성경 1백년 안에 사라질 거라고 장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죽음이 닥쳐왔을 때 그는 이렇게 절규했답니다. “나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노라. 오, 그리스도시여 ... 아, 나는 지옥으로 가는구나 ... ” 무서워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입니다. 반면에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는데. 임종ㅎ면서 이렇게 외쳤답니다. “원더풀! 아, 저곳은 너무 아름답구나!”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은 평소에 신앙 준비 할 해서 언제 하나님이 부르신다 해도 당당하게,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② 사랑 :

죽음은 이별입니다. 성도들은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겁니다. 그러므로 짧은 이별입니다. 하지만 짧은 이별도 역시 이별이기에 섭섭하고 슬픈 겁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지금 나와 함께 하는 가족도, 친구도, 교우도 조금 후에는 헤어질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옆에 있거니 하고 무덤덤하게 지나가지만 나중에는 많이 보고 싶을 겁니다. 그리고 잘 해 주지 못한 게 생각나서 무척 미안할 겁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미리 미리 사랑을 고백합시다. 그리고 사랑을 표현합시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곧 죽게 되는데 전화 한 통화만 허용된다고 가정해 보라. 당신은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 뭐라고 말할 것인가? 그런데 당신은 왜 지금 그것을 미루고 있는가?” 부디 이 말을 음미해 보면서 평소에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시므로 언제 이별의 순간이 와도 아쉽지만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③ 사명 :

사람은 누구에게나 하나님이 맡겨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동물은 그저 먹고 마시다 죽으면 끝이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만일 먹고 마시고 즐기기만 하다가 죽는다면 얼마나 허망하고 무가치할까요? 심한 말 같지만 마소보다 나을 게 뭔가요?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남겨 두시는 이유는 사명 때문입니다.

첫째 사명은 우리의 재능과 축복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빛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무엇을 하든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렸는가? 이게 중요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요, 하나님이 장차 우리를 심판하실 때 합당한 상을 주실 겁니다.

둘째 사명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동안 십자가 복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명을 어떻게 감당하라고 했습니까? 딤후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그것은 나도 언제 인생이 끝날지 모르고 상대방도 마찬가지 언제 인생이 끝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기회가 항상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결국 기회는 ‘지금’입니다. 그러므로 형편을 따지지 말고 지금 당장 복음을 전하라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회를 영영 놓칠 수 있다는 겁니다.

정근모 장로님(前 과기처 장관, 호서대 총장, 한국 해비타트 이사장)의 간증집 「나는 위대한 과학자보다 신실한 크리스천이고 싶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분에게 절친한 고교 동창 친구가 있었답니다. 여러 번 전도하려고 했는데 워낙 엘리트에다 자존심이 강해서 선뜻 복음을 제시하기기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음번에 하지 하면서 몇 번 미루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1983년 그 친구의 비보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 분은 당시 대통령 경제수속보좌관이었는데, 버마 아웅산 사건 때 대통령을 수행했다가 그만 폭발 사고로 순직하고 만 것입니다. 그 비보를 접하고 땅을 치고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아, 진작 전할 걸 ... 내가 왜 미뤘던가?” 절친한 친구에게 가장 좋은 선물을 주지 못하고 보냈으니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자책이 됐겠습니까?

이따금 신문에 보면 장기 기증 미담이 실린 것을 봅니다. 신장을 하나 떼 주었다는 등의 이야기 ...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그렇게 희생해도 겨우 육체의 생명만 연장시켜 주는 겁니다. 반면 복음 전도는 우리 자신이 그렇게 많이 희생하지 않아도 작은 헌신으로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변화시킵니다. 영생하도록 도와주는 겁니다. 더 나아가 한 인생을 변화시킴으로 잘 하면 그 가정을 변화시키고, 사회와 국가, 넓게는 세계 인류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전도의 행위 자체는 작을지 모르지만 그 결과는 엄청난 것입니다. 이렇게 쉽고도 영원한 가치가 있는 일에 우리가 동참해야 될 것입니다. 12월에 있을 새생명 축제는 많은 불신 영혼을 구원하려는 잔치이기도 하지만, 여러분의 사명을 도와드리기 위해 마련한 행사이기도 합니다. 자원해서 열심히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우리는 꼭 중환자가 아니라도 모두 시한부 인생입니다. 언제 어디서 하나님 앞으로 불려갈지 모릅니다. 그 날이 언제인지 모르기에 오늘 하루 하루 순간마다 신앙 준비, 사랑 준비, 사명 준비 잘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함으로 부디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고, 언젠가 부르심을 받을 때 당당하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영생 복락과 하늘의 상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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