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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 (눅 9:5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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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이용호 목사

  우리가 음식점을 찾을 때 그 많고 많은 음식점 중에 단골로 가는 음식점이 있습니다. 수십 개 음식점을 지나서 꼭 그 집에 찾아가는 음식점이 있습니다. 여성들이 미장원에 가는 것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 많고 많은 미장원 중에 꼭 가는 미장원이 있습니다. 교회도 그 많은 교회 중에 내가 섬기는 교회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그 교회를 섬긴다’는 교회관이 분명하고 교회소속감이 분명한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22절에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이루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하나님도 그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사람을 찾습니다.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을 찾습니다. 62절에 보면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 이런 말씀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따르는 자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는 첫째, 주님을 따라가는 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와서 “주여, 나는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조건을 붙입니다. “내 부친을 장사하고 따르겠습니다.” “내가 집에 가서 작별인사를 하고 따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결론적으로 말씀하시기를,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라고 하셨습니다. 주를 따른다는 것은 경건이라는 것과 깊은 연관을 가집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표현상으로는 앞에 있는 사람을 뒤 따라가는 그런 측면의 모습이지만 이것은 예수님을 배운다는 것과 그 분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가는 측면을 말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경건이 무엇인가? 이것을 우리의 신앙생활과 연관하여 이렇게 표현합니다. “경건은 아무도 보지 않는데서 하나님 앞에 진실한 내 모습이다.” 남이 보는데서 진실한 것이 경건의 전부가 아니고 아무도 안 보는 나 혼자만의 그 자리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행하는 것이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구절이 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잎새에 이는 바람’이 어떤 바람이냐 하면 소리 안 나는 바람입니다. 못 느끼는 바람입니다. 조용한 바람입니다. 부는 듯 안  부는 듯 하는 바람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바람이 사람을 감동시키고 그 잎새에 이는 바람에 나뭇잎이 반응을 합니다. 부는 듯 안 부는 듯한 바람인데도 그 바람이 그렇게 의미있는 바람이고 그 바람을 느끼는 사람은 굉장히 정서가 순수한 사람이고 인간의 감정이 정화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구호를 외치고 날 좀 보라 하는 식이 아닙니다. 보든지 안 보든지, 칭찬을 해주든지 안 해주든지, 남들이 나를 향하여 도와주든지 안 도와주든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길을 갈 줄 아는 이 경건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사람이 주님 나라에 합당한 자입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이지만, 별로 드러나지 않는 모습이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주님의 뜻을 이루는 성도로 살아갈 줄 아는 그 숨겨진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다 드러날 수는 없습니다. 목사 눈에 교인들의 삶은 다 드러나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한 주간에 어떻게 사시다가 왔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모르는 것, 우리가 서로 모르는 그 부분에서 진실했다면 그게 주님의 제자입니다. 그것을 주님께서 요구합니다.

  가서 전파하라

  그리고 60절에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자를 향한 주님의 부탁입니다. 주님을 따르겠다고 찾아온 사람, 아버지를 장사지내고 좇겠다는 사람을 향해서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주님이  쉽게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전파한다’는 말은 전도한다는 그런 의미가 전부는 아닙니다. 네가 가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교단에서 교육부와 상대해서 일을 하고 또 다른 측면에 임시이사회를 향해서 일을 하는 가운데 제가 절실히 느낀 게 두 가지였습니다. 일을 잘 할 수 있는 것은 이 두 가지를 안 갖추면 안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첫째는 긴급성을 인식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타이밍을 인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을 만나도 언제 만나느냐는 그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때를 놓쳐 버리면 열 배의 수고를 해도 효과는 십분의 일도 안 나타납니다. 그러나 때를 잘 맞추면 하나를 투자해도 열 배의 효력을 얻습니다. 긴급성을 인식할 줄 아는 것, 다시 말하면 기회를 잃어버리고 때가 넘어가버리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면 때를 다 놓칩니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붙잡을 줄 아는 순발력이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실력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기회를 잡아도 실력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됩니다. 자기 실력을 객관화될 때 압니다. 내가 이래도 제법 아는 것도 있고, 내가 토론을 해도 나도 둘러칠 실력이 있다 이렇게만 생각하는 것은 실력이 아닙니다. 막상 상대방을 만나서 겨룰 때 그게 돌파되는 것이라야 실력입니다. 여러분, 일은 아무나 하라고 보내면 안됩니다. 실력을 갖춘 사람이 나서야 합니다. 그 사람이라야 일을 해결합니다. 이 타이밍을 잡을 줄 알고 실력을 갖춘 사람이라야 됩니다. 불이 났는데 소방서에서 연락을 받고는 소방차를 동원시켰습니다. 연락받고 간 것은 잘 했습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까 소방수를 싣고 온 게 아니라 청소부를 싣고 왔습니다. 불났는데 청소부는 안됩니다. 청소부는 일을 해내지 못합니다. 불이 났으면 소방수가 가야 됩니다. 왜 그런가? 그분들은 불 끄는 실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에녹만큼 경건한 사람이 없습니다. 성경에 에녹의 경건을 높이 평가했는데 창세기 5장에 두 구절이 나옵니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라고 했습니다. 가정을 거느리고 가족들 먹여 살리면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3백년간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것이 에녹의 경건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는 주님의 말씀과 부합되는 일입니다.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다 신학교로 가서 선교사로 가고 목사가 되는게 아닙니다. 여러분의 일터에서, 여러분의 가정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뒤를 돌아보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뒤돌아본다’는 말은 과거에 집착하고 얽매이는 것을 말합니다. 과거지향, 생각이나 정서나 사고가 항상 과거로 얽매어 있는 이것이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돌아보는 것은 뒤를 돌아보는데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면 똑바로 가지를 못합니다. 저는 쟁기질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 집에 열 마지기 이상 되는 논도 직접 갈아서 모내기도 해보았습니다. 물에서 논갈이하는 것은 아주 힘도 들고 조심하지 않으면 고루 갈리지 않고 모가 안 심어지는 그런 맨땅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손에 쟁기를 잡았으면 앞을 보아야 됩니다. 자칫 뒤를 보든지 옆을 보면 쟁기가 바로 안 갑니다. 그러니까 내가 과거지향적이냐 라는 것보다 내가 지금 바로 가고 있느냐 라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내가 비뚤게 가고 있다면 나도 손에 쟁기잡고 뒤돌아보는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뒤돌아본다는 말은 과거에만 집착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 안주하는 것도 포함되고 있는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현실에 안주하는 사람은 반드시 과거에 얽매이기 때문입니다. 이 현실에만 매이지 않습니다.

  요즘 카드빚이 사회문제가 되는데 한 청소년의 사례를 보면 19살된 대학생이 빚이 2백만원 되었을 때 덜컥 겁이 나더랍니다. 그러나 이것쯤이야 하면서 이 정도 쓰고 말아야지, 그리고 이건 어떻게 아르바이트를 하든지 해결하겠다는데 이게 뜻대로 됩니까? 자꾸 버릇이 살아나고 돈 쓰는 재미가 붙고 이 카드가 사람의 눈을 멀게 합니다. 앞으로 결과가 어떻게 될지 거기에 대해서 눈을 멀게 합니다. 그 불행한 함정을 못 보게 만듭니다. 그래서 3,500만원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안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학생이 카드빚이 2백만원쯤 되었을 때 아버지 앞에서 ‘아버지, 제가 이렇게 버릇없이 돈을 썼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번만 아버지가 좀 해결해 주십시오.’ 이렇게 나오면 그것은 해결될 길이 있습니다. 물론 카드는 빼앗기고 가위에 잘릴 각오는 해야 됩니다. 우리가 바로 살려면 손해보기로 결심할 줄 아는 것부터 배워야 합니다. 손해보기로 결심만 하면 안 될 일이 됩니다. ‘나는 하나도 손해 안 보겠다’ 이렇게 버티니까 되는 일도 안 되는 것입니다. 남도 파산시키는 상황까지 가버리는 것입니다. 현실에 안주하면 과거로 가서 얽매어집니다. 현실문제에 대해서 안주의식은 매우 심각합니다. 현대인들이 내일의 위기를 인식 못하고 정신을 못 차리고 오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럴 수 있습니다. 신앙의 위기가 지금 내 눈앞에 왔는데도 그것을 인식 못하고, 깨지 못하고, 기도하지도 않는 이것이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매집이 좋은 사람들이 기도 안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희들이 매를 얼마나 더 맞으려고 완악하느냐” 아직도 우리가 매를 덜 맞아서 기도 안 합니다. 우리는 큰 매 맞기 전에 깨어 기도해야 됩니다. 얼마나 매를 더 맞으려고 네가 그렇게 완악하느냐? 뒤돌아본다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행동파와 실력파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 오늘 본문에서 세 가지로 말했는데 이것은 의미가 같습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자인데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격식을 가지고 따른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 주님의 제자가 되고 사도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것은 의미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슨 장사를 하시든, 그 업종이 주님을 따라가는데 유리한 게 아닙니다. 그 업종을 가지고 믿음으로 사는 우리의 자세문제이지 업종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게 되고 안 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자세문제입니다. 우리가 머무는 거기서 주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하나님의 백성됨을 드러내는 삶을 살고 뒤돌아보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이런 모습으로 주님께 응답을 해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인간론에 대해서 많은 말을 했습니다. 본문 누가복음 9장도 처음부터 보시면 그런 문제를 적나나하게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집합을 해보니까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제자들을 세우고 가르쳤는데 가르치시면서 제자들에게 요구하는게 두 가지로 표현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주님의 제자들에게만 요구되는게 아니라 성경전체에 이 사상이 많이 깔려 있습니다. 신앙인들 가운데는 행동파 신앙인이 있습니다. 엘리야, 엘리사, 베드로 이런 사람들은 행동파 신앙인들입니다. 과감하게 행동하는 선지자들로서 사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부류는 실력파 신앙인입니다. 요셉, 모세, 다니엘, 예레미야, 에스겔, 누가 이런 사람들은 실력이 있는 전문성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재미있는 게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행동만 하려는 이런 부류로 우리 모습이 내실이 없을 때가 있고 또 실력은 가지고 있는데 도무지 행동은 안 하고 사람으로 사는 이런 모습도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은 요구합니다. “믿었느냐, 순종하라.” 믿고 행함이 네 믿음을 온전케 한다는 것입니다.

  행동하는 신앙인, 능력있는 신앙인 이 두 가지를 하나님 나라가 요구합니다. 누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냐? 주님이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이 두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사도의 결정적인 능력과 실력은 ‘성령을 받고’ 라는 거기에서 갖추어집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심을 믿고 복음을 전하라”, 행동하는 제자가 되라는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요구했습니다. “가서 세례를 주고 제자를 삼아라”, 가서 가르치라, 증거하라는 여기에 주님은 행동파와 실력파의 이 겸비된 신앙인으로 일하라고 우리에게 말씀을 했습니다.

  맺는 말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멤버로 자부하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앞에 합당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행동하라 할 때 행동하고, 주님이 이것을 하라 할 때 감당하는 실력이 드러나는 신앙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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