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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 (빌 1: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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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유관지 목사

일 년은 쉰 두 주일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2004년의 쉰두 주일 가운데 마흔여섯 번째 주일입니다.
앞으로 여섯 번 더 주일 예배를 드리면 2004년이 끝납니다.
일 년은 365일입니다. 올해는 윤년이어서 366일인데, 오늘이 319일 째 되는 날입니다.
앞으로 47일이 더 지나면 2004년이 끝납니다.
우리의 삶이나, 하는 일이 올해로 끝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 해는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매듭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여러분, 올해의 남은 한 달 반, 여섯 주일, 47일, 어떻게 보내시겠습니까?

할 일은 많고 시간은 많지 않을 때 지혜로운 방법 가운데 하나는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입니다.  ‘1, 무슨 일,’ ‘2, 무슨 일,’ 이렇게 하고서 ‘이 남은 시간에 나는 이것부터 하겠다.’ ‘이것만은 꼭 하겠다.’ 하는 것입니다.

수험생들, 이제 수능고사까지 사흘이 남았는데 그 사흘, 우선순위를 정해놓고 잘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올해의 남은 시간을 선용하기 위한 우선순위를 정하는데 전도를 1번에 놓으셔야 합니다.
다음 주일은 교회에서 이웃초청 큰 잔치를 합니다.
적어도 이번 주일만은 전도를 꼭 1번에 놓으셔야합니다.
각 속회, 선교회, 기관들이 모두 그렇게 하셔야합니다.
주보 2면 제일 윗부분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일낮예배’ 라고 하고 그 다음에 교회력이나 교회의 기념일, 또는 행사를 적고 있습니다.
오늘은 무엇이라고 되어 있습니까?
먼저 성령강림절 후 ‘스물네 번째 주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평소 같으면 여기에서 끝나는데 오늘은 하나가 더 붙어 있습니다.
‘교회력 마지막 둘째 두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달력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양력을 씁니다.
농사짓는 분들은 음력을 많이 참고합니다.
중국에서는 음력을 아예 농력(農曆)이라고 부릅니다.
교회에는 교회력이 있습니다.
양력은 해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만들어졌고, 음력은 달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교회력은 예수님의 생애를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음력에서는 설, 예전에 구정이라고 부르던 날이 새해 첫 날이 됩니다.
교회력에서는 성탄절 앞의 넉 주일을 대림절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절기라는 뜻입니다.
교회력에서는 대림절 첫째 주일에 새해가 시작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올해 대림절은 두 주일 뒤인 11월 28일에 시작됩니다.
그래서 이번 주일을 ‘교회력의 마지막 둘째 주일’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루터교회에서는 이 교회력을 정확하게 지키기 때문에 주보를 작성할 때 루터교회의 캘린더를 참고하는데 ‘교회력의 마지막 둘째 주일’ 이것은  루터교회의 캘린더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이웃 초청 큰 잔치를 하는 다음 주일은 교회력 상으로는 올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교회력으로는 올해가 이렇게 끝나 가는데, 여러분, 한 사람도 전도하지 못하고 이 해를 보내서야 되겠습니까?
아니 결과는 어떻든지 간에 전도 한 번 확실하게 하지 못하고 이 해를 보내서야 어떻게 성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전도에 대한 관심 없이 보냈다면 송구영신 예배 때 어떻게 주님께  ‘주여, 나는 올해 이렇게 살았나이다.’ 할 수 있겠습니까?

부끄러운 말씀이지만 저도 그 날, 그 날 해야 할 일들에 밀려서 이웃초청큰잔치에 많은 관심을 쓰지 못했습니다.
이번 주일은 그것을 막기 위해, 전도를 1번으로 하기 위해, 탁상 캘린더 위에 붉은 매직펜으로 ‘이웃초청큰잔치’라고 써 붙여 놓았습니다.
성도들이 지난 번 이웃초청큰잔치까지는 전도대상자 명단을 제출했는데 그것을  지금도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 새벽기도회와 금요심야합심기도회에서는 그 명단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행사준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점검도 부지런히 하겠지만 개인적으로 전도하는 일에도 힘쓰려고 합니다.
교회 위에 제가 늘 ‘나의 전도대상지역이다.’ 정하고 주일예배 후에 나가서 백여 가구를 대상으로 전도지 나눠주고 들어오는 지역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그것을 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도 예배 후에도 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수험생 안수기도회, 점심 약속, 오늘 전 교인 환경선교 나가는데 그것 돌아보기, 홈페이지 선교 원고 점검, 직원회의 준비와 주재, 교역자들이 해야 하는 일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많습니다.
그러니까 감기가 한 달 넘게 안 나가고 이 모양으로 버티고 있지요.
그래도 오늘은 그곳에 나가려고 합니다.
마침 때맞춰 교회신문이 발간되었는데 그것과 주보를 나눠주고 오려고 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올해의 남은 기간 전도를 우선순위 1번으로 하고 지내셔야합니다.
적어도 이 한 주간은 꼭 그렇게 하셔야합니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부탁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목사의 명령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입니다.

오늘은 본문을 중심으로 전도에 관한 교훈 세 가지를 성도 여러분과 같이 얻으려고 합니다.

첫째, 우리는 우리의 형편과 환경을 전도에 잘 활용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빌립보서는 옥중서신 가운데 하나입니다.
바울 사도가 감옥에서 쓴 편지입니다.
오늘 본문은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라는 말로 시작되는데 “내가 당한 일”은 감옥에 갇힌 것을 말합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히자 ‘바울은 이제 전도를 더 하지 못하게 되었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은 끝났어!’ 했습니다.
바울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도리어”라고 합니다.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라고 합니다.
‘내가 갇혔기 때문에 전도를 못하게 될 줄로 알았더니 도리어 전도를 더 많이 하게 된 것을 알기 바랍니다.’ 이런 뜻입니다.

13절을 보세요.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모든 시위대 안과”  바울은 먼저 시위대에게 전도하게 되었습니다.
여기 “시위대”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됩니다만 일반적으로는 로마를 수비하는 부대를 말합니다. 
이들은 황제를 호위하고, 로마감옥에 갇힌 죄수들을 감시하고, 로마 도성을 경비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 옮긴다면 수도경비사령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좀 특별한 부대였습니다. 이들은 봉급도 다른 군인들의 두 배를 받았고 권력이 많았다고 합니다. 황제들도 수비대의 눈치를 볼 정도였다고 합니다. 훈련도 많이 받고 군기도 엄했겠지요.
우리나라에서도 남자들은 만나면 군대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군대 이야기를 할 때 ‘나 수경사 출신이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할 때 보면 그 분 어깨에 힘이 좀 들어가 있습니다.
바울이 전도에 아무리 열심이었다고 하더라도 다른 경우라면 수비대에 접근해서 전도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수비대는 그 숫자가 약 9,000명이었는데 돌아가면서 근무했다고 합니다.
윤번제였기 때문에 바울은 더 많은 군인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제도는 감시하는 군인과 감시받는 죄수를 한 쇠사슬에 묶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자기와 한 쇠사슬에 연결된 군인에게 ‘나 때문에 수고를 많이 하십니다.’ 인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군인은 ‘어, 이 사람은 다른 죄수와 다르네!’ 느꼈을 것입니다.
바울과 그 군인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고갔을 것을 짐작해 봅니다.
‘당신 어디 사람이오?
‘예, 저는 길리기아 다소 사람입니다.’
‘길리기아 다소? 좋은 곳이지! 그런데 당신은 무슨 죄를 지어서 여기 오게 되었소? 사람을 죽였소? 아니면 강도짓을 했소? 그것도 아니면 로마에 대항해서 독립운동을 했소?’
‘아닙니다. 나는 복음을 전하다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그 복음이 무엇이오?’
이렇게 되면 이야기는 자연히 전도의 내용으로 흐르게 됩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혔으면서도 ‘나는 수비대의 군목으로 임명 받았다!’ 하는 심정으로 일했을 것입니다.

그 다음,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바울은 심문하는 사람들에게도 전도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가이사랴에 구금되어 있을 때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에게 열심히 전도한 일이 사도행전 2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때 로마의 영토는 넓었습니다.
로마  감옥에는 그 넓은 영토 여러 곳에서 잡혀 온 죄수들이 있었습니다.
매일 갇혀 있던 사람이 석방되어 나가기도 하고, 새로운 죄수가 오기도 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들에게도 전도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28장을 보면 그때 많은 사람이 로마 감옥에 갇힌 바울을 찾아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유명한 바울이 지금 로마 감옥에 와 있다니 우리 한 번 가서 그를 만나보세.’ 하면서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도 전도했을 것입니다.
또 여러 이유로 바울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골로새 교회 빌레몬 집 노예로서 주인에게 손해를 입히고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는 살길을 찾기 위해 바울을 찾아왔다가 바울을 통해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전 군사정권 시대에 대학교수로 일하던 장로님 한 분이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해직이 되고 감옥에 갇혀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얼마 뒤에 석방이 되었고 복직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낯이 익기는 하지만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 젊은이가 찾아와서 ‘제가 얼마 뒤에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선생님께 주례를 부탁드리기 위해서 왔습니다.’ 하더랍니다.
‘고맙습니다만 왜 나에게 주례를 부탁하는지요? 나에게 배운 분입니까?’
‘아닙니다. 나는 선생님이 감옥에 있을 때 교도관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 때 선생님의 태도를 유심히 지켜보는 가운데 많은 감동을 받았고 선생님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례를 부탁하게 된 것입니다.’
이 장로님은 ‘아, 그때 하나님이 나를 감옥에 보낸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이 사람에게 전도하라는 것이었구나!’ 깨달았다고 합니다.

저희 교회 원로목사님인 김찬국 목사님이 투옥되어 있다가 석방된 다음에 감방에 같이 있던
학생운동을 열심히 하던 분, 나중에는 국회의원도 지냈는데요, 이 분이 한동안 저희 교회에 나온 일도 있었습니다. 

해방 이전에 한국장로교회가 중국 산동성에 선교사들을 파송했는데  이들은 두 가지 전도방법을 썼습니다.
하나는 스피커, 악기, 환등기, 이런 것들을 가지고 다니면서 전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유행전도(遊行傳道)라고 했습니다. 여행을 중국말로는 유행이라고 하지요.
하나는 집을 마련해 놓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좌당전도(坐堂傳道)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동안 유행전도에 힘썼는데 이제는 좌당전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12절에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었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진보는 ‘에이스 프로코펜’(είξ
προκόπήν)인데 ‘앞으로 치고 나가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군대가 진격할 때 공병대가 먼저 길을 만들어 진군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내가 감옥에 갇힌 것은 로마 전도의 길을 여는 것이 되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지요.
여러분, 어떤 일을 만나든지 그것을 전도에 잘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전도하라고 하나님이 이 사람을 만나게 하셨다’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전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보고 도전을 받고 나도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14절을 보세요.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바울이 감옥에 갇혀서도 열심히 전도하는 것을 보고 교인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은 이제 끝났어!’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 가운데는 ‘이제는 바울 대신에 내가 나서야지! 그래서 바울이 누리던 명성을 내가 누리고 바울이 받던 존경을 내가 받아야지. 나도 바울만큼 유명해져야지!’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 가운데는 바울을 찾아와서 ‘당신, 그동안 너무 날뛰다가 이렇게 되었는데 내가 있으니까 염려하지 말고 쉬어요. 사실 그 동안 당신이 전한 복음 가운데는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있었는데 이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마음껏 전하겠소!’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15절에 나오는 투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들, 16절에 나오는 바울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을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은 ‘바울 사도가 갇혔으니 우리가 그를 대신해서 열심히 전도해야지!’ 했습니다.
‘바울 사도께서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저렇게 태연하게 열심히 전도하고 있는 것을 보면 복음에는 확실히 위대한 힘이 있는 것 같아! 우리도 확신을 가지고 겁을 내지 말고 전도해야지!’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14절에 나오는, 바울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15절에 나오는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들입니다.
16절에 나오는 바울이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이렇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했습니다.
14절 앞부분을 보세요. “형제 중 다수가”라고 했습니다. ‘더 많은 편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편에 속하셔야 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교회에 전도를 열심히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전도폭발훈련을 받는 분들이 있고 70인 전도대가 있습니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으면서 주유소 직원에게 전도하는 성도도 있고, 카센터에서 자동차를 수리하면서 수리하는 기술자에게 전도해서 교회에 데려오는 성도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보고 ‘할 일 없어서 저 짓하는 것이지!’ ‘꼭 저렇게 극성을 떨어야 하나?’하지 마세요.
‘나도 저렇게 해야지!’ 하세요.
‘저 사람들이 저렇게 열심히 전도하는 것을 보니까 복음이란 것은 확실히 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보구나!’ 하세요.

오늘 저희 교회에는 바람직한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동안 여선교회 회원들 중심으로 전도폭발훈련이 진행되어 왔는데 남선교회 회원들이 ‘우리도 전도폭발훈련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해서 오늘부터 남선교회 제1기 전도폭발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여선교회 회원들이 열심히 전도하는 것을 보고 ‘집안일은 하지 않고 무엇 하는 거야!’ 하지 않고 ‘우리도 저렇게 열심히 해야지!’ 해서 이 일이 시작된 것입니다.
좋은 일입니다.

아까 주유소 이야기를 했는데 교회 가까운 곳 주유소 직원 가운데 예수 잘 믿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제가 기름 넣으러 갈 때마다 ‘나는 다른 교회 나가지만 여기 오는 분들에게 목양교회 좋은 교회니까 목양교회 나가라고 열심히 전도합니다!’ 큰 소리로 말합니다.
저에게만 그러는 것이 아니고 다른 분들에게도 그렇게 말하더군요.
누구인지 아시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여러분, 다른 교회에 나가는 분도 우리 교회를 이렇게 열심히 소개하는데 우리들이 가만 히 있으면 되겠습니까?

전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보고 도전을 받고, 복음은 열심히 전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을 새롭게 하고 그들을 본받기 바랍니다.

셋째.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전도에 힘써야합니다.

1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무슨 방도로 하든지” 이 말의 헬라어 원어는 ‘플렌 호티’(πλήν ὃτι)인데 그 뜻이 아주 강합니다.
직역을 하면 ‘더욱 더 하고 그 외에’ 이런 뜻입니다.
바울 사도는 사도행전 20장 23절과 24절에서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신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 말을 하면서 ‘플렌 호티’ 이 말을 썼는데 ‘결박과 환난, 그 외에 다른 것들이 나를 기다린다고 하나 나는 전도의 길을 가겠다.’ 이런 뜻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어떤 희생을 당하든지’ 이런 뜻으로 이 말을 쓰고 있습니다.
‘나는 어떤 희생을 당하든지 그리스도가 전파된다면 기뻐하고 또 기뻐하겠다.’ 이와 같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성도 여러분도 그렇게 말하셔야 합니다.’ 하면 ‘아멘’ 소리가 얼마나 클지 모르겠습니다.
속으로 ‘노맨!’ ‘나는 그렇게 못해!’ 하시는 분들은 안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주님, 나도 그렇게 말할 수 있도록 나의 믿음이 자라게 하여 주옵소서!’ 해야 합니다.

바울은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겉치레로 하는 것은 체면을 차리기 위해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저렇게 전도하는데 나는 안 할 수 없지!’ 하는 것입니다.
‘다른 선교회에서 저렇게 하는데 우리 선교회는 가만있을 수 없지!’ 하는 것입니다.
‘내 직분이 장로인데, 권사인데, 집사인데 내가 가만있을 수 없지!’ 이렇게 해서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해서 전도를 해도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이니 나는 그것을 기뻐한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요, 겉치레로 전도하다보면 참으로 전도하게 됩니다.
끌려서 마지못해 전도하다보면 나중에는 앞장서서 전도하게 됩니다.

신학생들, 소명감이 있어서 신학교에 들어오고 목사가 됩니다.
그런데 그 소명이란 것이 처음에는 풋 소명이기 쉽습니다.
들뜬 흥분에서 오는 소명인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그런 것을 겉멋 소명감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겉멋 소명이 여러 과정을 거쳐서 참된 소명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저도 아마 그런 경우에 해당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모든 방법이 전도에 유익한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전도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동원됩니다. 노방전도, 축호전도, 찬양전도, 직장전도, 학원전도, 군대전도, 교도소 전도, 문서전도, 서신전도, 방송전도, 요즘은 인터넷 전도, 이 모든 방법을 통해서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런 방법 가운데는 ‘저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방법이 아닌가?’ 비판을 받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을 통해서도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입니다.

이웃초청 큰 잔치와 같은 행사를 전에는 총동원전도주일이라고 했습니다.
총동원전도주일을 위해서는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쓸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
인기인들을 동원해서 특별순서를 가졌고, 좋은 선물을 나눠주었습니다.
많은 사람을 데리고 온 교인을 시상했습니다. 
애드벌룬을 띠우고 만국기를 걸기도 했습니다.

교인들도 사람을 데리고 오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사업을 하는 성도들은 직원들을 동원했습니다. 거래업체 사람들에게 ‘이번에 안 오면 당신하고 다시 거래하지 않겠습니다.’ 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내가 죽었을 때 문상을 미리 온다고 치고 와 달라.’ 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 때는 정말 무슨 방도로 하든지 사람을 데려 오려고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것이 좋은 일인가?’ 라고 의문을 제기하는 분들, 나가서는 비판하는 여론이 많아져서 지금은 많은 교회가 그런 방법을 쓰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때는 그런 방법이 필요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런 일들을 통해서 그래도 전 인구의 20% 넘게 교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기본정신은 마찬가지이어야 합니다.
때때로 그 때의 그런 열심과 열기가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빌립보서를 기쁨의 서한이라고 합니다.
‘나는 기쁘다’ ‘여러분도 기뻐해라’라는 말이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왜 이렇게 기뻐하고 있는 것일까요?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있을 때에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그 소식을 듣고 바울에게 필요한 것을 보내왔습니다.
그것도 바울을 기쁘게 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바울이 옥중에서도 기뻐하는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빌립보서에서 기쁨이라는 말이 제일 처음 나오는 곳은 1장 4절입니다.
1장 3절에서 5절 까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빌립보 교인들이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기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위한 일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전도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전도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어떤 방도로든지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을 보고서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내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전도가 되고, 감옥에 갇힌 것을 보고 성도들이 분발해서 전도하고, 또 좋지 못한 동기로 전도하는 사람도 생기고, 이런 것을 보고 어떻게 해서라도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단순하게 ‘나는 기뻐하리라’ 하지 않고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라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이면서 어두운 그림자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전도의 관점에서 자신의 상황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전파되기 때문에 나는 감옥에 갇혀 있고 미래도 불투명하지만 상관없다. 그저 기쁠 따름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기쁨, 전도와 관련된 기쁨, 이 기쁨이 참된 기쁨입니다.
큰 기쁨입니다.
내가 애써 전도한 사람이 교회에 나오는 것을 볼 때 얼마나 기쁩니까?
이니, 전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쁨입니다.
전도의 기쁨은 가장 큰 기쁨입니다.

전도를 부담으로 여기지 않고 기쁨으로 여길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전도에 도가 튼 사람입니다.
겉멋 전도를 하지 않고 참으로 전도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 정도에 이르시기 바랍니다.

또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우리도 기뻐하지만 주님도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웃초청 큰 잔치를 앞둔 주일입니다.
여러분의 형편, 처지, 환경, 이런 것을 전도에 잘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전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도전을 받고 그들을 본받아 열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전도를 위해서는 모든 방법이 유익하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전도에 힘쓰는 가운데 나도 기뻐하고, 교회도 기뻐하고,  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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