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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율법과 양심의 요구 (롬 2: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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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유재명 목사 (안산빛나교회)

우리는 택한 백성이 아닌가!
우리에게는 절대로 지옥이나 절망이 있을 수 없어!
이런 그릇된 선민의식에 대해 사도바울은 분명히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관용과 사랑과 인내하심은 너희가 죄를 지어도 좋다는 허락이 아니라 회개케 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기회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율법이 있다는 것도 유대인들에게는 자만심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그 거룩한 율법을 알고 그것을 믿는 것이 저들 유대인들만의 특권이며 하나님의 축복을 가진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지없어 바울은 정면으로 공격하니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신분과 학식의 차이나 그리고 인종의 차이, 지역 간의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들은 아무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특권을 가지라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원하심대로 살라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과 그리고 분명한 요구가 있습니다.

첫째: 율법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요구가 있습니다.

2:13절에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에 대한 절대 의식이 있습니다.

신6:6,7절에 오늘 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이든지 길에 행할 때이든지 누웠을 때이든지 일어날 때이든지 이 말씀을 강론 할 것이며 8,9절에 너는 도 그것을 네 손목에 매여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했습니다. 과연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 곧 생활이었습니다. 저들에게는 율법에 대해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 큰 특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랍비 교훈에서도 율법을 많이 배우고 아는 것이 의라 했습니다. 저들의 실수는 율법을 소유하고 있고 율법을 듣고 배워 하는 지식 자체를 의로 인정하는 것을 당연시 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당시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착각을 알고 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자랑인 율법의 이름으로 정죄하고 율법의 이름으로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사도바울은 공격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는 행함이라는 것입니다. 2:13절에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위대한 원리하나를 발견합니다. 율법이든 말씀이든 듣는데 신앙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말씀을 아멘하고 순종할 때 매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듣는 것이 목적이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도님들은 당시 유대인들이 율법의 홍수 속에 살듯 말씀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안타까운 것은 성도들 가슴속에 하나님의 말씀은 메말라 간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데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매력은 끊임없이 반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려주는 데 매력이 있다면 세상 강의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앉아서 믿는 믿음이 아니라 경험된 믿음이어야 합니다.

둘째: 율법 이전의 사람이나 주어지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양심의 요구가 있습니다.

14,15절을 보면 율법이 없는 이방인에게는 양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심판을 받게 되지만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양심이 율법의 행위를 대신한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에게는 율법이 없다 했습니다. 율법의 정의는 십계명입니다. 좀 더 범위를 넓히면 모세오경이며 가장 넓은 의미에서는 성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먼저 양심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될 때 주어진 것입니다. 롬1:1-19절에 이는 하나님을 알만 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이를 보이셨느니라 했습니다.

동물하고 다르게 사람에게는 양심의 소리가 있습니다. 동물에게는 양심에 거리끼는 것을 죄라 여기지 않습니다. 본능으로 행할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양심의 소리에 자신을 속이지 못합니다. 율법을 몰랐을 때도 내안에 있는 양심이 스스로를 정죄하고 송사한다는 것입니다. 양심의 법을 기록되지 않은 율법이라 했습니다. 양심을 마음에 새긴 율법이라 합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율법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양심의 소리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기준에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양심이 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더러워진 양심, 화인 맞은 양심들이 되었습니다. 원래 양심은 하나님을 보는 거울이요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수단이요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원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양심이 변질 된 것입니다. 정욕으로 더러운 욕심으로 말입니다. 이는 마치 깨진 거울과 같습니다. 동물들이 행하듯 아무 생각 없이 정욕에 던져진 인생들의 모습을 보면 깨진 양심이 어느 정도인지 갸름할 수 있습니다.

본래 율법이란 기록된 율법이 아니고 마음에 새겨 주신 것이 진짜 율법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도 깨끗한 양심 이것이 본래의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했습니다. 원래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들이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이 자연스러워야 하는데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못하니 기록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를 듣지 못하니 보이는 기준을 주신 것입니다.

원래 사람은 자연스럽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환경이 법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 법을 만들고 지켜 가는 것입니다. 창세기시대에는 십계명이 없었습니다. 기록된 율법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제사하였고 하나님을 구하는 자였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법이 없었어도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이 문제가 되었고 거짓말하지 말라는 법이 생기지 않았어도 야곱이 아버지를 속인 것과 라반이 야곱을 속인 것은 문제가 되었습니다. 기록된 율법이 없어도 원래는 아무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냥 하나님께 익숙한 자들이었고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주신 원리에 따라 하나님을 구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깨어진 것입니다.

율법은 원래가 축복입니다.
주님은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 하셨습니다. 단순히 기록된 율법이 아닙니다. 원래의 마음 하나님이 주신 양심을 회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셋째: 율법과 양심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결국이 있습니다.

12절에 무릇 율법 없이 범죄 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율법이 있고 범죄 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했습니다.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 있을까요? 지킬 수 없습니다. 양심의 요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은 있을 까요? 이미 깨어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결국 인간은 죄 아래 있습니다.

히9: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다 하는 선포 앞에 자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심판에는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라는 차별이 없습니다. 율법을 가진 유대인에게는 율법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율법을 가지지 못했던 사람들은 더러워진 양심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한가지의 심판의 기준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내 복음에 대한 심판입니다. 복음을 영접한 사람에게는 이 심판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16절에 보니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했습니다.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날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복음에 의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 무서운 율법과 양심의 심판에서 자유하게 될 줄 믿습니다.

이제는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깨끗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양심이 깨어져 버렸을 때 하나님은 기록된 율법을 주셨습니다. 기록된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마음을 담으라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율법이 깨어진 마음들을 회복하지 못했고 하나님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친히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 안에 담아봅니다. 내주하신 성령하나님을 우리 안에서 우리의 양심과 생각 그리고 모든 것이 지켜가고 계십니다.

이젠 양심과 율법이 아닌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나를 향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원리가 됩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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