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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율법과 양심의 요구(2) (롬 2: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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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유재명 목사 (안산빛나교회)

오늘 교회에 오시면서 산과 들에 아름다운 색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단풍을 보셨는지요?
안산에 살면서 누리는 축복이 있다면 이 아름다운 가을에 많은 단풍을 있다는 것입니다. 단풍을 보기위해 멀리 갈 것도 없이 말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길가에 떨어진 낙엽마져도 아름답게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길가에 떨어져 있는 이런 단풍을 보시면서 얼른 쓸었으면 좋겠습니까? 아니면 그냥 좀 두었으면 좋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단풍이나 낙엽은 그 생을 그 역할을 다하고 삶의 뒤안길로 사라질 준비를 하고 있는 과정이기에 어찌 보면 쓸쓸하고 비참해 보일 수 있는데 왜 사람들은 단풍을 낙엽을 아름답게 보는 것일까요?

가을 단풍이 가늘 낙엽이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많은 열매들을 함께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을 단풍이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또한 하나님의 솜씨이자 작품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을 단풍이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그 모습 속에서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을 계시 하시기를 즐거워하십니다.

계시라는 말은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통해서도 하나님 자신을 보이고 싶고 나타내고 싶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사람을 창조하실 때 오직 본능에 의해 살아가는 동물처럼 만들지는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피노키오처럼 태엽만 감아주면 “주인님 사랑합니다 주인님 감사합니다 ”하도록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후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생명이 되게 하셨습니다.
“너와 내가 함께 하자는 것입니다. 너와 내가 교제하자는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양심을 주셨습니다.

원래 양심은 하나님을 보는 거울이요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수단이요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원리였습니다. 사람들은 양심을 통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심과 하나님의 속성을 알고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나에 반응을 보이며 살았으되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여 드리며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이웃을 사랑하며 살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이는 안 되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 안에서 살아야 행복했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율법이 없어도 사람들은 양심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 가를 알고 안식일을 지켰고 제사를 드렸으며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여 드린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기록된 율법이 없어도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바임을 알았습니다. 거짓증거하지 말라는 율법이 없어도 야곱의 거짓은 하나님의 싫어하시는 바임을 알았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이 없어도 아브라함이 아내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것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바임을 알았습니다.

사람은 양심을 통해 하나님의 속성을 알고 하나님의 원하심은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특별히 배워서가가 아니고 너무도 당연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안에서 이 양심이 파선되기 시작했습니다. 맑고 투명해야 할 양심이 더러운 양심이 되어갔고 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깨어진 마음들은 이제 하나님이 없어도 된다 했습니다. 오물이 묻은 거울처럼 정욕으로 욕심으로 더러워진 양심들에 하나님이 희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깨어진 양심들은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데 어두워져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 가보다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 가가 더 중요한 사람들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그 양심이 화인을 맞아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여 드리지 않아도 양심에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어갑니다.

세상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저들은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아도 그 양심은 문제가 있다 소리 내지 않습니다. 저들은 주일에 하나님을 찾고 예배하지 않아도 결국 우상을 섬기면서도 그들 양심은 자신들이 원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되는 줄 압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현명하게 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믿는다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굳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부터인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나 보다는 내가 무엇을 원하느냐에 마음을 쏟게 되어가는 것입니다. 언제인가도 주일을 어기면 큰일 나는 줄 알았습니다.

언제인가는 주일을 어기면 큰 일 나는 줄 알았습니다. 언제인가는 봉사를 하지 않아도 큰일 나는 줄 알았습니다. 언제인가는 주일 밤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기도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던 사람들이 자기형편 자기 욕심에 매여 양심의 소리를 한 번씩 외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점점마음이 굳어져 가기 시작했습니다. 영적으로 점점 굳어가며 세상에 젖어들기 시작했습니다. 피리를 불어도 영적 감각이 없어 춤을 추지 않습니다. 깨어진 마음들은 죄와 사망에 매여 노아시대와 같이 되어갑니다. 하나님을 말하지만 제사를 드리지만 하나님이 원하는 소리들은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겠다고 노아에게 알려주셨습니다.
물론 우리가 아는 것처럼 노아 외에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음성에 민감하지 못한 영적으로 어두어진 사람들이기에 심판에 대한 것조차도 그들은 농담으로 알았습니다. 그 정도로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둔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만큼은 늘 하나님의 소리와 음성에 민감했기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삼상3장1절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했습니다. 엘리에게는 희귀한 하나님의 말씀이 어린 사무엘에게는 하나님의 음성 들려졌습니다. 영적으로 어느 정도 민감해져 있는가는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영적으로 민감하지 못한 엘리의 자녀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는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함으로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소화해 낼 만 큼 영적으로 민감한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하십니까?
어느 날 부터인가 내가 무엇을 원하느냐보다는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느냐가 중요하기 시작했습니까? 언제부터 나는 반드시 예배의 자리에 있어야 하는 사람으로 기도의 사람으로 섬김의 사람으로 정리되어진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본래적인 마음들이 양심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들려지는 말씀 앞에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들려지는 말씀 앞에 눈물로 회개하며 감격하는 것은 하나님이 처음 주셨던 마음들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점점 굳어져 가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이리되면 하나님의 소리나 하나님의 원하심은 점점 멀어져 가고 하나님의 마음을 상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누가 은혜 받고 감격해하면 우리도 처음에는 그랬다고 평가 절하 할 정도로 깨어진 양심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만 마음이 굳어져 갑니까? 처음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그 마음이 깨어질 때로 깨어지고 굳어질 때로 굳어진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의 양심은 하나님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파선된 양심들이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보이고 알려주시길 원하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기록된 율법을 주셨습니다.

더 이상 마음에 새긴 율법(양심)이 아니라 보이는 율법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 더 이상 양심이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있게 귀로 들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율법의 목적은 정죄가 아닙니다. 죄를 드러나게 해주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율법을 통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의 속성을 알게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율법을 통해 하나님이 인간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우리에게 거룩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선하기에 율법을 통해 우리에게 선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기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와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고 우리에게 완전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율법은 바로 하나님의 의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기뻐하시는가? 우리의 피조물인 인간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나님의 원하심인가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소리요 하나님 안에서 사는 원리였습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며 계명은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라고 롬7:12절에서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며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그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사람은 양심이 아니라 보이는 기록된 율법에 반응을 보이게 했습니다. 보이는 율법과 기록된 율법의 대표적인 것은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을 살피는 것도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떤 분은 십계명을 계명으로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본다 했습니다.
요즘 성도들이나 십계명을 포기한 사람들은 십계명을 지킬 수 없는 것이라 결정합니다. 사랑을 발견하지 못하였기에 단순히 십계명을 무거운 것으로 봅니다. 십계명이 귀찮아 지는 것입니다. 네거리의 신호등법이 귀찮아지면 안 됩니다. 한번 두번 어기면 자꾸 어기에 됩니다.
어떤 분이 파란불은 내 신호라 가고 빨간 불은 빨리 가라는 신호라 가고 노란불은 놀라지 말고 가라는 신호라서 간다고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십계명은 두 개의 돌판으로 되어있지요.
처음 돌판은 1에서 4계명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1계명은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했습니다. 이는 너에게는 내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계명은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에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했습니다. 사람은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계명은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에게 귀한 것만큼이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귀해지길 원하는 것입니다. 4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했습니다. 이 날은 구별된 날입니다. 따로 떼어서 구별한 날입니다. 이날은 영적인 사람이 영이신 하나님을 찾는 날입니다. 이 날은 영적인 사람이 영혼의 안식을 얻는 날입니다. 이날은 하나님이 나를 기다리시는 날입니다. 사람도 하나님 없이 안 되겠지만 하나님도 우리 없이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와 내가 만나자 구별 하신 것입니다. 이 날에 예배하며 봉사하며 하나님 안에 잠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시간을 내어 주셨는데 사람들은 바쁘데요 시간이 없답니다.

1-4계명은 이것은 원래 기록되지 않아도 양심을 가진 인간에게 자연스러웠던 것입니다. 이것이 깨어지니 기록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두 번 째 돌판은 5-10계명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는 잔소리로 들리시는지요? 아니면 사랑으로 들리시는지요? 하나님의 마음을 아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사랑하라’입니다. 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가정을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 가정이 화목해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6계명은 살인하지 말라 합니다. 이웃을 보호해야 할 의무입니다. 다른 이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취하는 것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무서운 죄악입니다. 자살도 결국 살인입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더불어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7계명은 간음하지 말라 합니다. 이웃의 결혼을 보호하는 일입니다. 이웃을 가정을 소중하게 여기는 일입니다. 간음의 결국은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8계명은 도적질하지 말라 입니다. 우리 이웃의 소유물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남의 것을 먹고 나중이 좋아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남의 돈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남의 소유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9계명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아라 합니다. 남의 인격이나 명예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대하여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은 하나님의 원하심이 아닙니다.
10계명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합니다. 자신을 섬기지 말며 욕심을 부리지 말며 저사람 보다 더 잘 살아야 높아야 하는 것으로부터 자유 해야 합니다. 자신을 섬기는 것을 금하는 것입니다.서로를 섬기라는 말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은 양심만 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록된 율법인 돌판마져 깨뜨려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보며 하나님의 속성을 알며 너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라는 기록된 율법을 보면 결국 하나님 안에서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하고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느냐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셋째: 율법과 양심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결국이 있습니다.

12절에 무릇 율법 없이 범죄 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율법이 있고 범죄 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했습니다.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 있을까요? 지킬 수 없습니다. 양심의 요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은 있을 까요? 이미 깨어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결국 인간은 죄 아래 있습니다. 히9: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다 하는 선포 앞에 자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심판에는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라는 차별이 없습니다. 율법을 가진 유대인에게는 율법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율법을 가지지 못했던 사람들은 더러워진 양심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한가지의 심판의 기준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내 복음에 대한 심판입니다. 복음을 영접한 사람에게는 이 심판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16절에 보니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했습니다.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날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복음에 의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 무서운 율법과 양심의 심판에서 자유하게 될 줄 믿습니다. 이제는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깨끗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양심이 깨어져 버렸을 때 하나님은 기록된 율법을 주셨습니다.
기록된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마음을 담으라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율법이 깨어진 마음들을 회복하지 못했고 하나님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친히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 안에 담아봅니다.
내주하신 성령하나님을 우리 안에서 우리의 양심과 생각 그리고 모든 것이 지켜가고 계십니다.
이젠 양심과 율법이 아닌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나를 향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원리가 됩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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