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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적과 변화를 이루는 믿음과 은혜 (요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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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최종천 목사
 
우리는 지난 한 달간, 그리고 특별새벽기도회를 통하여 생활 속의 믿음에 대하여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에 이르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우리는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생활 속에 어떠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가를 생각해 본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최초의 기적인 가나의 혼인 잔치 집에서 이루어진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요즘 같이 쉽지 않은 세상 속에서 성도의 삶에 이루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은총을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물론 우리들에게 생활의 만족을 위해서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선 우리의 영적인 문제가 해결됨으로 인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구원의 백성이 되어 우리의 삶의 상황은 어떠하더라도 상관없이 기쁠 수 있는 영적 상태가 육신의 상태를 이끌어가는 것을 우선합니다. 하지만 그 다음은 결국 우리 생활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믿음이 우리 삶에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 삶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실현해 가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활동 무대인 역사 세계 속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생활 속의 믿음은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특별히 우리의 생활 속의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속에서 기대를 가지고 과정을 극복하여 예수님의 은총으로 문제를 해결하며 가는 것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과로는 주님께 대한 확신을 이루게 되고 주변 사람들에 주님께 대한 새 믿음의 역사를 이루는 것을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은 잘 아는 것이지만 잠시 요약합니다. 가나 결혼 잔치 집에 예수님과 그의 어머니, 제자들이 초청을 받습니다. 연회가 진행되는 중에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포도주가 떨어집니다. 초청한 연회장 주인은 난감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그 안타까운 사정을 보고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어떻게 좀 해 주십시오.’ 예수님은 난감해 합니다. ‘이것은 내 일도 아닐뿐더러 내 때도 이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이와 같은 예수님의 대답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것을 마음에 파악하고 그 하인들에게 이야기 합니다. ‘어서 속히 예수님이 하라고 하시는 대로 하라.’ 예수님은 그 이후에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그 하인들에게 말하기를 ‘물을 퍼다 큰 돌 항아리에다가 가득 채워라.’ 그 큰 돌 항아리 여섯 있는데 물을 가득 채웁니다. 그러더니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퍼다 주어라.’ 말씀합니다. 참 황당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하인들은 그것을 퍼다 줍니다. 그 물이 포도주로 바뀌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잔치 집에서는 처음에는 질 좋은 포도주를 내고 나중에는 질 낮은 포도주를 내는데 이 집은 반대다.’ 라고 사람들이 흥겨워합니다. 연회장 주인은 그것이 어디서 난 포도주인지 알지 못합니다. 이 큰 기적으로 인해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확실하게 믿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이와 같은 본문에서 오늘 하나님의 은혜를 잠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 속에서 첫 번째 생각하려는 것은 마리아의 기대와 남의 어려움을 지나치지 않는 자비의 심정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에 그 혼인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과 예수님과 관계가 별로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남의 잔치 집에 포도주 떨어진 것, 예수님이 그것을 해결해 주어야 할 관련도 안 되어 있고, 상황이나 또 여러 가지 여건도 아닙니다. 아직 내 때가 이르지 못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이 그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다고 보고, 해결하실 것이라고 믿고 예수님께 어려운 사정을 아뢰어 드린 것입니다. 즉,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어떤 아무런 기대도 할 수 없을 때 그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께 요청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은 예수님의 능력과 예수님의 모든 역사하심에 대해서 알지 못했어도 그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과 그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객관적인 정황 상으로는 아무런 관계가 예수님과 없습니다. 예수님은 초청받은 손님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관계없어 보이는 상황일지라도, 그것을 관계있게 만드는 것이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의 심정입니다. 마리아는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해관계로 움직이는 분이 아니라, 어려운 상황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개입하여 해결해 주시는 자비와 사랑에 의하여 움직여 가시는 분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아직 공적인 능력을 행하지 않았던 상태이고, 일반인들에게 어떤 기적도 행치 않았던 이와 같던 때의 분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의 능력과 신성을 알고 인정하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영적인 깨달음과 민감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 요청함이란 예수님을 기대한다는 뜻입니다.

나와 상관없다.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어머니 마리아는 이와 같은 거절의 말씀에 대하여 포기하지 않고 하인들에게 무슨 말씀이든지 그대로 순종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잠시 잠깐의 기대를 깨뜨리는 응답에도 어머니 마리아는 분명히 예수님을 신뢰하고 기대했기에 전혀 섭섭하거나 그 요청이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은혜의 체험, 능력을 체험하는 것, 이것은 단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넘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마치 오늘 본문은 가나안 여인, 스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거절당한 것과 유사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그들은 예수님께 대하여 실망하지 않고 그들의 마음의 기대를 가지고 그 다음의 행보를 이루고 있는 것을 봅니다.

오히려 하인들에게 그 다음을 생각해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기대와 확신, 그것은 예수님께 대한 파악과 확신 속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모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압니다. 예수님이 잉태되었을 때 동정녀 상태에서 잉태되었고 동정녀 탄생, 그리고 탄생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남, 동방박사들과 목자들의 경배, 그리고 천사의 인도 속에 헤롯의 죽음의 칼날을 피함, 예수님의 성장과정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의 목격 등등, 바로 이 마리아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아무도 몰라도 어머니 마리아는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어려운 상황 속에서 예수님께 요청하면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겉으로는 거절한 것 같지만 결코 안타까운 사정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본심이 계신 것을 알기에 마리아는 답을 미리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답을 미리 알고 있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은 매우 큰 차이입니다. 어떤 상황, 이것은 결코 인간이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절대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상황을 반드시 해결해 주실 수 있다는 능력이 없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그 삶의 분명한 역사와 지식으로 분명히 알고 있다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께 우리의 문제를 가지고 나와 구하고 해결하려 할 것입니다.

무슨 말씀하든지 그대로 하라는 것은, 항상 예수님의 수준과 인간의 수준은 달라서 처음에는 믿음 없는 눈으로 볼 때, 예수님의 말씀이 전혀 납득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선 내 마음에 안 들어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대로 행해 보라는 겁니다. 이것을 보면 주님의 은혜 주심은 때로는 내 계산이나 예상과는 전혀 달라서 자칫 잘못하면 그냥 지나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한 눈 팔면 중요한 표지판 놓치고 그냥 갑니다.

우리가 어떤 목적지를 향해서 갔습니다. 우리가 어떤 목적지를 향해서 갔는데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면 잠깐 한 눈 팔다가 목적지 표지를 놓쳤습니다. 그러므로 정처 없이 흘러가다 보니까 ‘이상하다, 왜 목적지가 안 나올까?’ 라고 생각했는데 한참 지나서 생각하기를 그 목적지의 표지판을 놓쳤던 것입니다. 우리 삶에는 이런 경우가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저 삶에 있어서 그저 한 곳을 향하여 가지만 그 표적을 놓치고 정처 없이 흘러가다가 너무 흘러가 버린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 하인들이 예수님의 요구하심을 마음속에 새겨 듣지 않고 그냥 지나칠 수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간파하시고 ‘그저 시키는 대로 해라, 순종해라.’ 라고 강조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마리아는 자신이 놓여진 상황 속에서 지나쳐도 될 어려움을 그냥 버리지 않았고, 안타까이 여겨 도와줄 마음에서 출발하여 예수님의 첫 번째 이적을 목격하고 체험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어머니도 그 집의 포도주 문제 해결해 주지 않아도 됐어요. 어떤 사명과 의무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것 볼 때 그냥 지내고 있기가 어렵더라 이 말이에요.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압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각각의 위치와 명망 받는 이와 같은 위치에서도 그들은 사람들이 보지 않는 상태에서 그저 지나갑니다. 강도 맞아서 몸도 다치고 모든 것 빼앗긴 이와 같은 상처받은 사람, 그냥 지나칩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질시 받고 있는 사마리아 사람, 그는 오히려 그를 데려다가 치료해 주고, 여관에 맡기고, 오히려 부비가 더 들면 돌아와서 돈을 더 주겠다고 그 사람을 돌보아 줄 것을 요청합니다.
우리 삶이 순간에 한 수준 높아지는 경우가 있어요. 내 삶을 벗어나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는 일입니다. 이제까지는 나 하나 살기 위해서 살았는데, 이제까지는 나에 대해서 관심가지고 살았는데, 이제는 나 하나에 대해서 관심 가지고 사는 삶이 너무 초라해 보이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살면 되나?’ 라는 마음이 들고 이제는 나 하나의 수준을 벗어나서 정말 다른 이들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보다 넓은 세상과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어려운 이들을 위하여 살아야 되겠다는 순간, 우리 자신은 한 순간에 문득 커지게 된다 이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우리 자신 하나에 집착하고 사는 모습이 얼마나 초라합니까? 우리는 사실 가지고 있는 것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늘 그런 생각이 많이 들어요.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구나.’ 많이 가지고 있는 것 때문에 우리는 보관하려는 이와 같은 어려움도 있고 그것에 집착하다 보니까 소유욕에 사로 잡혀서 우리는 마음이 불편할 때도 있어요. 잃을 것 없는 사람은 집착할 것도 없고 집착할 것 없으니 마음의 자유를 얻을 수가 있는 것이죠. 우리 마음의 불편이 어디서부터 생깁니까? 소유에 대한 집착에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닙니까?

제가 안식년 가 있을 때 보스턴에서 조금 가면 월든이라고 하는 연못이 있어요. 호수가 있는데 굉장히 큰 호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제가 이제 자주 가곤 했는데 차타고 잠시 가면 되니까. 그런데 월든이라고 하는 호숫가에 보면 ‘헨리 데이빗 소로우’ 라고 하는 사람이 집을 지어 놓은 것이 있어요. 이 사람이 글을 쓰는 사람인데 처음에 있었던 자리는 터만 남아 있고 그 호숫가에 복원을 해 놓은 것이 있는데 정말 조그만 집이에요. 아주 조그만 집이에요. 딱 침대 하나 들어가고 책상하나, 의자하나, 그 다음엔 난로하나 놓으면 딱 맞을 그런 아주 조그마한 방입니다. 그런데 그런 집을 짓고 거기서 살면서 사색의 향연을 누렸고 또 글을 쓰고 또 자기의 모든 사상을 펼쳐 나갔던 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정말 사람이 사는 데 많은 것이 필요한 것 같지 않아요. 집이 조그마하니까 거기 둬야 할 짐도 별로 간편한 것 같고 또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 가지고 있어서 관리하기 불편한 적 많이 있지 않습니까? 사실 우리가 그것을 관리한다고 생각하면 그나마 나은데 소유한다고 생각하면 그 순간부터 점점 어려워지는 거죠.
우리 가정이 있는데요. 여러분, 집에서 있는 것 중에서 그냥 쑥 빼다가 어디 다른 사람에게 줘도 그것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것 상당히 많죠? 우리 집에 뭐 있는지 잘 모르죠? 집에 뭐 있는지 다 알고 계세요? 벽장에 있는 것 꺼내다가 다른 사람 줘 버려도 5년 지나도 줬는지 안 줬는지 모를 것 많죠? 우린 사실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어서 보관조차 불편한 것 같아요. ‘이사할 때마다 짐이 는다.’ 그런 이야기 하죠? 이사할 때마다 버리면 되는데 안 버리니까 짐이 늘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삶의 모습이 아닙니까?

저는 요즘 이런 생각이 참 많이 들어요. 여러분이 저의 나이를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그저 가장 활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나이, 그저 제가 보니까 목사로서 가장 좋은 때가 한 45세부터 55세 정도까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한 10년 정도 제가 무슨 일을 활발히 할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제 자신 혼자의 생각입니다. ‘10년 이래봤자 3600일 정도밖에 되지 않겠다. 그럼 어떻게 그 시간을 가장 효과 있게 사용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사명이다.’ 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사실 우리에게 주어진 길지 않은 시간을 그저 쓸데없이 소유에 집착하고 정말 소유하기 위하여 관리하는 시간에 집착하다 보면 우리는 정작 중요한 삶의 일들을 이루지 못하고 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우리는 내가 꼭 해야 될 일을 찾고 그것에 집중하고 필요 없는 것들, 자꾸 우리 주변에서 정돈해 내는 일들이 필요한 것 같아요.
남을 돕는 것은 내 힘만으로 안 될 때, 예수님의 힘까지 생각하고 자비를 구함으로 결국 도울 수도 있고, 은혜도 목격하고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소유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 순간부터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이고 공익이고 다른 사람들이고 우리의 삶의 무대가 커지는 거죠.
여러분, 사람의 마음의 그릇이 커진다는 것이 뭐죠? 소유에서부터 해방될 때 그 때부터 우리의 마음이 넓어지는 겁니다. 내가 그릇이 커진다는 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소유의 해방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우리는 분명히 내 자신의 그릇이 넓어질 수 없는 거죠.

오늘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역사를 봅니다. 은과 금 없어도 할 수 있었어요. 은과 금 내게 없지만 그럼에도 뭔가 주고 싶은 것이 있어서 보니까 나사렛 예수 이름이더라 이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 마리아는 뭔가 그 사람들에게 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본인은 능력이 없더라 이 말이에요. 그럼 ‘내가 당신들에게 해결해 주고 싶은데 나는 능력이 없어.’ 그러면 어떻게 하죠?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 어떻게 해결해 주십시오.’ 결과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은 안 나도 예수님의 능력으로 해 주었다 이 말입니다. 내 이름 나고 안 나고 중요하지 않고 어려운 사람이 문제를 해결 받으면 그것으로 기쁘다 이 말입니다.

우리 성도 개인과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자신 하나 위해 산다면 우리 삶은 얼마나 참 초라하겠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교회 하나 존속하기 위해 있다면 얼마나 초라하겠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내 개인 하나를 넘어서고, 이 교회 하나를 넘어서서 더 좋은, 소중하고 중요한 것에 기여할 길을 찾아보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진행된다면 우리는 더욱 평안하고 기쁠 수밖에 없다 이 말입니다.

우리의 삶에 가장 기쁨이 있을 때가 언제인지 아세요? 분명한 비전이 있고 설득할 수 있는 가치가 있고 명확한 우리의 삶의 길이 보여질 때 우리는 기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의 삶은 정말 길지 않잖아요?
저는 오병이어를 생각할 때마다 참 재미있는 일을 생각하는데요. 오병이어에 함께 등장한 사람이 뭐죠? 물고기 두 마리, 그 다음에 물고기를 가지고 온 소년, 그 다음에 예수님, 그 중에서 가장 큰 사건의 주인공은 누구예요? 오병이어에서 예수님, 소년, 물고기 두 마리, 떡 다섯 개 그 중에서 뭐가 제일 중요하죠?

그런데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오병이어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에요. 오병이어, 물고기 두 마리, 떡 다섯 개도 아니고 열 두 광주리도 아니고 소년도 아니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중요한데 우리들에게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물고기 두 마리, 떡 다섯 개 들고 온 조그마한 어린 소년은 지금도 우리 마음속에 전해져 우리들의 입술에 회자되고 있다 이 말입니다.

더욱이 또 하나 참 희한한 일이 또 있는데 그 오병이어를 가지고 있는 소년도 아니고 그를 데리고 온 안드레라고 하는 예수님의 제자의 이름까지 우리들에게 알려져 있단 말이에요. 안드레는 자기 것도 아닌 소년의 것 물고기 두 마리, 떡 다섯 개 가지고 있는 소년을 데리고 나온 그 공로 때문에 우리들에게 이름이 알려져 있어요.
오늘도 마리아는 자기가 한 일도 없어요. 그러나 예수님께 부탁했던 일 가지고 예수님이 능력을 행하심에 오늘 마리아가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기억이 되고 있다고요.

여러분, 우리의 삶 속에서 정말 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넘어선다면 예수님께라도 부탁해서 다른 사람을 돕고 싶은 심정이 생길 때 우리는 큰 믿음의 그릇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도 보세요. 예수님, 마리아, 그 다음에 물이 포도주가 되는 이와 같은 역사, 그 다음에 연회장, 종, 그 가운데 오늘 주인공은 누구죠? 답을 가르쳐 주었잖아요? 뭐죠?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이에요. 오늘 마리아가 한 것은 결국 아무 것도 없어요. ‘예수님, 어떻게 좀 해결해 주십시오.’ 이런 이야기 정도 하고 ‘너희들 예수님 말씀 들어라.’ 이렇게 이야기 한 것인데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마리아는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고요.

우리는 주님 앞에 어려운 일을 아뢰고 또 다른 사람을 위해 어려운 일을 아뢰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이름은 내가 무엇을 쌓은 것보다 훨씬 더 큰 역사를 이룬다고요. 여러분, ‘내가 얼마나 큰 믿음의 소유자인가?, 내가 다른 사람의 어려움 때문에 얼마나 가슴 아파 하는가?’ 그것을 느껴보면 돼요. ‘내가 얼마나 경건한 사람인가? 내가 얼마나 성경을 읽고 얼마나 기도하는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아픔 때문에 내 마음이 얼마나 아픈가?’ 하는 것을 보면 우리의 경건의 정도가 우리에게 가늠이 되어진다 이 말이에요.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믿음대로 살고 있는가는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의 어려움과 고통 속에 내가 얼마나 내 마음이 아파 그것을 지나치지 못하는가 하는 것을 재보면 알 수 있다 이 말이에요.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놓여진 상황을 지나쳐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 지나칠 수 없는 가슴 아픈 애잔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이와 같은 사람들이 될 때 결국 주님 앞에 그 문제를 아뢰고 주님의 힘으로 그 문제를 해결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져 행복을 줄 수 있는 이와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두 번째, 하인들의 순종의 모습이 결국 믿음의 큰 역사를 이룸을 봅니다.
참 이들은 의아해했습니다. 마리아의 말을 따라,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 따라 순종했습니다. 믿음에는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되지만 순종부터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을 갖다 채우라.’ ‘아니 왜요? 물 갖다 채워서 뭐해요?’ ‘그 가득 채운 물을 갖다 주어라.’ ‘아니, 포도주가 필요한데 물을 갖다 줍니까?’ 이렇게 이야기 하지 않았어요.
이해되어야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에 대한 기대가 있기에 믿을 수밖에 없는 분명한 근거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즉, 순종하면, 믿음에 대한 근거와 기대를 가지고 순종하면, 믿을 수밖에 없는 분명한 근거가 나타난다 이 말입니다. 안 믿어지는데 어떻게 제가 순종합니까? 성령의 은혜를 간구하셔야 합니다.

불평하며 하는 순종이 아니라 무엇인가 기대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무엇인가 맡아 일하는 종의 모습을 봅니다. 그들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움직였습니다. 주인에게 무엇인가 유익할 것이 있을까? 해서 기대를 가지고 움직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역사에, 그리고 주님의 믿음의 사실에 대해 지금 당장 평가하려 하지 말고 비판하지 말고 한 호흡 늦춰서 그 결과를 조금 천천히 기다리고 살펴보며 체험하고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돼요. 여러분, 평가가 너무 빠르면 절대적으로 좋은 기쁨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아니, 물을 갖다가 부으라고 그래요? 아니, 왜 물 부은 것을 갖다 주라고 그래요?’ 라고 그 중간 중간 평가해 버리면 그 다음엔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평가하지 않고 순종했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루어진 역사 속에 기쁨과 감사를 느꼈던 겁니다.

자, 우리 한 번 따라서 합시다. ‘한 호흡 늦게 평가합시다.’ ‘한 호흡 천천히 평가합시다.’ 성적표를 받아왔어요, 아이가. ‘너 왜 이렇게 공부를 못했니?’ 라고 그 순간 평가하지 말고 ‘네가 조금 더 열심히 하면 잘 하겠다.’ 하고 그 뒤를 평가하면 조금 더 낫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왜 맨 날 이 모양이야?’ 라고 생각하지 말고 ‘당신 여기서 조금 더 노력하면 더 훌륭해지겠네.’ 라고 한 템포 뒤의 것을 평가하면 우리는 언제든지 조금 더 마음의 평안을 가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너무나 우리는 평가가 빨라요. 여러분, 이거예요. 전기밥솥에 쌀 넣고 물 넣고 그리고 스위치 꽂고 뚜껑 닫고 그리고 2분 만에 ‘주여 믿습니다.’ 하고 그냥 뚜껑을 열어 보는 겁니다. 아무리 믿어도 안돼요, 그건. 아무리 믿어도 안 돼요. 기다리는 것도 믿음입니다.
자, 우리 따라서 합시다. ‘기다리는 것도 믿음입니다.’ 기다리는 것도 믿음이에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나무 심어 두고 눈 여겨 보는 겁니다. ‘주여, 믿습니다. 빨리 자라게 해 주십시오.’ 물도 주고 별 짓을 다 해봐요. 그 나무가 빨리 자랍니까? 믿음으로 그 나무를 바라보려면 기도하고 물주고 잊어버리고 있어야 돼요.

여러분, 이런 적 없습니까? 기도의 응답은 대부분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나중에 체험함으로 깨닫는 적 없어요? 어떤 일을 열심히 기도했어요. 그런데 깜빡 기도했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려요. 그리고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내가 그 때 그런 기도 했구나.’ 그런데 지금 그 기도의 제목을 다 누리고 있다 이 말이에요.
여러분, 몸이 아파서 어떤 때 기도했어요. 그런데 한참 있다 보니까 내가 어디 아팠는데 기도했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렸어요. 그런데 깜짝 놀라 생각해 보니까 ‘내가 그 때 그런 기도를 했네.’ 그런데 나는 다 나아서 건강하게 살고 있어요.

우리 삶에는 이와 같은 유사한 일들이 참 많습니다. 때때로 기도의 응답은 우리의 기다림 속에서 우리들에게 오게 되는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평가를 빨리 해 버려요. 세 번 기도해 보고 ‘하나님, 삼 세 번 기도 했으니 결과로 알겠습니다.’ 여러분, 그럴 수 있겠습니까? 삼 세 번이 아니라 삼십 번, 삼백 번 기도해도 그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은혜를 주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너무 빨리 평가할 필요가 없어요. 그저 순종할 필요가 있다 이 말입니다.

‘왜 순종했을까?’ 마리아와 예수님께 대한 기대가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보았는데요. 이들이 왜 마리아와 예수님에 대해서 기대를 했을까? 결국 마리아와 예수님이 이들에게 말씀하시면 이들은 사실 그 말씀을 들었다 이 말이에요. 왜 들었을까? 길거리 지나가는 사람이 말해도 들었을까?
마리아와 마르다에 대해서는 오늘 분문에는 자세한 설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와 마르다에게는 무엇인가 이야기했을 때 이들이 거역할 수 없는 어떤 권위와 권세가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유추함입니다. 여러분, ‘권위주의’가 나쁘지 ‘권위’가 나쁜 것이 아니에요. 권위도 없으면서 권위 있는 척 남에게 주장하고 요구하는 권위주의가 나쁜 것이죠, 권위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 권위가 있어야 돼요. 영적 권위와 권세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말하면 누가 무시할 수 없는, 여러분들이 말하면 그 사람들이 위압되어서 그 사람 가운데 여러분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영적인 권위와 권세는 분명히 있어야 됩니다.

말을 하는데 코웃음치고 지나가면 안 되죠. 한 마디 분명히 말해도 그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힘이 느껴져야 된다 이 말입니다. 이건 뭐 괜히 교만하게 거만하게 군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정말 그에게 진실이 쌓여져서 이루어지는 진실의 힘이 느껴져야 합니다. 영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쌓여져서 느껴지는 영적인 권세와 권위가 느껴져야 된다 이 말입니다.

정말 우리 가운데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왠지 그 사람이 말하면 큰 소리로 말하는 것도 아닌데 왠지 모르게 믿어지고 거역할 마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한 번 그래봐야 되겠다.’ 라고 마음이 드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 모든 삶에는 눈에 보이는 것만이 있는 것은 아니에요. 제가 언젠가 동해바다 숙소에서 내다보니까 아래에서 무슨 사람들이 뭔가 물속에 들어가서 줍고 있더라고요. 그 겨울 아침에. ‘추운데 왜 바다 속에 들어가서 뭔가 줍고 있을까?’ 제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거기에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사람이 보기에는 무엇인가 있으니까 주워서 이렇게 자꾸 넣겠죠.

제가 그 때 생각한 것이 뭐냐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있는 것은 있어요.’ 내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거기는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할 수 없죠. 내 눈에 안 보여도 거기 있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내 눈이 좋지 못해서, 내 눈의 가시 범위가 짧아서 보지 못할 뿐이지 거기 분명히 어떤 것이 있어요. 우리의 영적인 권위, 권세라는 것은 눈에 안 보여도 분명히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영적인 권위와 권세를 가진 분들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마리아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데 이들은 그 말을 따랐어요. 왜 따랐을까요? 거역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기 때문이에요. 또 하나님께서 마리아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밖에 없도록 그들의 마음을 성령으로 움직여 놓으셨을 수도 있다 이 말입니다. 종들 역시 안타까움 속에서 예수님과 모친 마리아의 대화의 모습을 보고, 무엇인가 기대해 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대하던 중에 그 말을 따랐을 수도 있다 이 말입니다.

순종에도 용기가 있어야 하고 믿음과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는 데까지는 할 수 있을지 몰라요. 그런데 그 물을 퍼다 갖다 주라는 데에는 정말 경악할 지경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그것을 했다 이 말입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해 있어요. 연회장에게 갖다 주니 그 연회장은 그 포도주가 어디서 났는지 몰라요.
믿음으로 이루는 순종의 결과는 마지막 순종을 믿음으로 이룰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순종하고 믿음대로 살다가 중도에 포기합니다. 안타깝게 그만 중도에서 포기하고 아무 것도 얻는 것 없이 믿음에 대해서 실망만 하고 해결할 길이 없어지는 것을 봅니다.

언제나 일을 하다보면 사람은 처음부터 그만두지 않아요. 막 하다가 70%, 80%, 90%까지 하다가 거기서 힘이 지쳐서 낙심해서 그냥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요. 70%. 80%, 90% 하다가 ‘아이, 안 돼, 여기까지 해도 안 돼.’ 라고 포기하고 마는 경우가 많다고요. 우리는 순종하려고 작정했으면 끝까지 하셔야 돼요. 믿어 줄려고 했으면 끝까지 믿어 보세요. 우리는 무엇인가 정말 신뢰하기로 생각했으면 끝까지 신뢰해 봐야 돼요.
제가 늘 말씀드리죠? 믿음의 사람은 끝까지 마침표 찍고 끝내야 된다고 했죠? 어떤 사람과 만나서 정말 좋은 일을 도모해야 되겠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좋은 일을 도모하시고, 아니다 생각하면 처음부터 시작하지 마시고, 또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임하기를 소원했으면 우리는 끝까지 그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도록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마리아의 기대와 믿음도, 하인들의 순종도, 결국 최종적으로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은혜는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도 결국 주님이 은혜를 주셔야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주님께 감사할 일이에요.

우리가 믿음의 역사, 믿음의 능력, 믿음의 권세, 이렇게 이야기 하다 보면 마치 내가 믿음을 가졌고 내가 그 믿음 가지고 어떤 일을 이룬 것 같죠? 이것은 아니에요. 우리가 믿음으로 어떤 일을 이루었다는 것은 내가 믿음으로 어떤 일을 이룬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 마음에 믿음 주셔서 그 믿음으로 어떤 일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자랑하여 교만에 빠지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결국 우리의 모든 것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의 역사입니다. 믿음의 힘이라는 것은 믿음의 공력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으로 인해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자비로 감싸 주셔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잘 되고 어떤 일이 성취되었을 때 우리는 ‘내가 이것을 잘 이루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통해서 이 일을 이루셨구나.’ 하고 감격해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여러분, 믿음, 믿음, 믿음, 믿음의 은혜, 믿음의 역사, 믿음의 권세, 믿음의 능력, 강조하다 보면 내가 믿음으로 그 일을 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때가 있어요. 그것은 아닙니다. 믿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은혜예요. 예수님의 은혜로 믿음 주셔서 그 일을 이루도록 우리를 인도해 주셨다 이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출애굽을 시켰고 가나안에 가기 위해서 광야를 건넜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인물들은 믿음으로 승리하였습니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고 보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권세와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임을 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 있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믿음 있게 만드셨어요. 하나님은 모세를 믿음의 인물로 양육하셨습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 이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나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주님의 은혜를 겸손히 간구하는 것이 가장 진정한 믿음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면서도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그 일을 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게 뭐죠? 하나님과의 관계예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그 일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믿음의 가장 기초입니다.

예수님은 간구하는 심정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십니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예수님의 자비와 은혜는 그 백성을 그냥 고통에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출애굽기2:23을 보면 애굽의 종으로 가게 된 고통 받는 백성의 고역소리가 하나님의 귓전에 울렸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굽어 살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자비를 구하며 찾고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우아함과 거룩함은 그럴 듯한 외향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간절한 애틋한 부르짖음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간절하고 애틋하지 못하면 우리는 어떻게 경건해 질 수 있겠습니까?

아주 좋은 음식이에요. 포장지로 잘 쌌어요. 상자에 넣습니다. 상자를 또 포장지로 쌌어요. 선물을 했어요. 선물을 받아서 포장지를 풀고 상자를 열고 그 다음에 포장지를 열고 그 음식을 봤어요. 안타깝게 상해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아름답게 포장한 모든 것이 아무 의미가 없죠.

우리는 오늘 예배당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머리도 감고, 그 다음에 세수도 하고 또 옷도 깨끗이 갈아입고 그리고 우리는 또 어려운 길, 이리저리 헤쳐가면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모든 것들이 포장되어 있어요. 그런데 정작 포장되어 있는 우리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옷을 깨끗이 빨아서 다려 입는 것처럼 우리 마음도 깨끗하고 경건하게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경건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내적인 간절한 소망이요, 하나님께 대한 간절한 간구요, 하나님께 대한 애틋한 정서라 이 말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간구하게 하셨다면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간절하고 애절한 심정이라 이 말입니다.
주님께 간청하는 것을 주님은 귀찮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이사야 41:9을 보면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였고 싫어 버리지 아니하였다.’ 41:10보면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주님은 우리를 귀찮아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주님은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와 상관없습니다. 내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 라고 거절하는 것 같았지만 귀찮아하지 않고 결국 그 일을 외면치 못하고 오셔서 해결해 주셨다 이 말입니다.

여러분, 내 어려운 사정은 주님을 만날 기회예요. 오늘 포도주가 없었기 때문에 오늘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이 일어났던 거예요. 은과 금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떡도 없고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던 거예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었기 때문에 그를 살려내는 이적이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 무엇을 의미하죠? 내게 있어서 어려움은 하나님의 은혜의 기회예요. 내게 고통과 내게 결핍과 내게 아픔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오늘 본문에 포도주가 없어서 난감한 지경이었지만 바로 이것을 통해서 이적이 나타나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확실하게 믿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어려운 고통의 때가 주님을 만날 만한 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우뚝하니 세워질 수 있는 기회의 때라 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사람들은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고통의 상황을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그 상황을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자비의 마음 때문입니다. 분명히 예수님과는 상관없고,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지만, 예수님은 그 자비를 베풀 기회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양을 구해주신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병자를 고치셨어요. 자비의 하나님을 기대합니다. 자비의 주님을 기대합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주님을 닮아가는 겁니다. 이것은 다른 이의 어려움을 내게 주신 은혜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로 봐야 돼요. 항상 그렇잖아요? 마리아는 다른 사람의 어려움 때문에 예수님께 왔고 예수님께 온 결과 때문에 결과적으로 어려움을 해결하여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그 어려움에 동참하게 되었더라 이 말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품는 순간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로 영화로워지는 것이라 이 말입니다.

‘우리가 얼마만한 그릇이 되냐,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얼마나 내 고통으로 느끼느냐?’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기도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저 한 사람 먹고 사는데 한 가정 먹고 사는데 집착하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성도들은 열 배, 백 배, 천 배의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필요가 있어야 축복을 받지 않겠습니까? 필요가 있어야 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필요가 무엇입니까? 나 하나 채우기 위한 필요라면 너무 초라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주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이런 어려운 문제, 나의 고통에 주님께서 관심을 가지시고 내 고통과 내 주변의 고통과 어려움을 해결해 주실 것이다.’ 하는 관점에서 시작할 때 우리의 문제는 해결되고 주님을 믿는 믿음이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1을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요한복음20:30을 보면 무슨 이야기가 있냐 하면 이 외에도 요한이 기록한 복음서에 나오는 기적 외에도 여러 가지 표적과 기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쓴 이유는, 그렇게 기적과 표적의 이유는 바로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믿어 생명을 얻게 하심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된다는 겁니다.

오늘의 말씀을 정돈합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있고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개입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더욱이 그것이 내 자신의 문제가 아닌데도 내 마음이 아프고 안타깝다면 주님의 역사의 순간은 더욱더 가까워진 것입니다. 내 문제가 아닌데 내 마음이 아파요. 큰 은혜입니다. 내 문제가 아닌데도 내 가슴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큰 은혜예요.
지난번에도 이런 말씀하시더라고요. 어떤 분이 자기 문제 때문에는 기도해도 눈물이 안 나오는데 자기 구역식구 문제 때문에 기도하면 눈물이 펑펑 쏟아진다고 그래요.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문제 때문에 그 눈물 쏟는 성도까지 축복해 주실 거예요.
오늘 마리아는 이 사건으로 인해서 얼마나 큰 영광을 얻습니까? 그 이름까지도 귀한 은혜의 모범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했던 가와는 비교가 되지 않아요.
우리 생각해 보세요. 2000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 중에 누가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고, 누가 얼마나 큰 집에 살았으며, 누가 얼마나 좋은 것을 가졌다는 것은 우리들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누가 주님의 일을 했고 따라서 우리들에게 그 이름이 기억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축복을 받으셨습니까? 여러분, 지혜가 있으십니까? 여러분, 공부를 많이 하셨어요? 여러분, 능력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은 모든 좋은 여건을 가지고 계십니까? 주를 위해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 때 우리는 그것이 가장 큰 값어치를 발휘하게 되고 하나님의 빛과 영광에 사용되는 것입니다.
자, 한 번 따라서 합시다. ‘절대 복종, 자기부인, 자기연민에 빠지지 말자.’ ‘헌신하고는 잊어버리자.’ 나는 주님의 말씀에 절대 복종하겠다는 마음의 각오 가지지 않으면 부분적으로 복종하게 되고 결국은 다 부인하게 돼요. 나 자신을 부인하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의 일을 이룰 수 없어요. 자기 연민에 빠지면 우리는 항상 불쌍한 사람이에요. ‘나는 너무 불쌍해. 나는 몸도 약하고 나는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나는 어려운 일만 많이 당하고 좋은 가정과 여건을 만나지도 못했고.’ 그런 마음 가지고 세상에서 기쁘게 살 수 없습니다. 자기 연민에 빠지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어떤 여건 속에서도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주셨고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이룰 거야.’
오늘 결핍 때문에 능력이 나타났고 그것 때문에 주 예수를 믿었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헌신하고 잊어버려야 돼요. 사람이 헌신하고 안 잊어버리면 그 공로 때문에 언제든지 시험받아요. 자기 발에 자기가 넘어진단 말이에요. 헌신하면 깨끗하게 잊어버려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늘 섭섭해요. 다른 사람에 대해서 늘 야속한 마음이 들고 사람이 늘 하찮아 보인다 이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얼마나 큰 장애가 되는 것입니까? 헌신하면 잊어버리고 또 다른 헌신의 장면을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더 큰 헌신의 역사를 향해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 번 따라서 합시다. ‘준비는 철저히, 훈련은 가혹히, 전투는 치열히, 그리고 무대 뒤로 조용히 사라지는 것.’ 우리는 조용히 무대 뒤로 사라지는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우리는 영광 뒤에 숨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여 그 영광 뒤에 숨어지는 분들 되실 때 오히려 그 이름이 아름답게 역사 속에 빛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에게 주의 은혜와 영광이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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