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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경과 빛 (요 9: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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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흥규 목사

<예수님께서 침에 진흙을 개어 소경의 눈에 바르신 이유는?>
플로리다의 한 마을에서 강도 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윌리엄 브래들리(William Bradley)라고 하는 80세 된 노인이 강도를 만났는데 이 노인은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었습니다. 강도는 발로 브래들리의 목을 밟은 채 위협하면서 강도 짓을 했습니다. 드디어 경찰이 범인으로 추정되는 젊은이 한 사람을 체포했습니다.

문제는 브래들리 노인이 장님인 까닭에 강도인지 아닌지 어떻게 분간을 하느냐 하는 점이었습니다. 그런데 브래들리 노인은 이 혐의자의 발을 만져 보더니만 자기에게 못된 짓을 한 강도가 틀림없다고 확인을 해주었습니다. 나중에 신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브래들리는 자기가 앞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일일이 만져서 사물을 확인하는 버릇이 있다는 사실을 토로했다고 합니다.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나면서부터 소경이 된 사람을 고쳐주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소경을 고쳐주신 방법이 조금 특별합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주로 말씀 한마디로 불치의 병을 간단히 고치셨는데 본문에서는 조금 요란한 방법으로 고쳐주셨습니다.

6절 말씀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땅에 침을 뱉어서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소경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실로암 연못에 가서 눈을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 눈먼 사람이 실로암 못에 가서 씻었더니 눈이 밝아져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분명히 여러 가지 복잡한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특히 요 9장 전체에는 아주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우리는 초점을 딱 한 가지에 맞추어 봅시다. 예수님께서 왜 통상적인 방법이 아닌 다소 복잡한 방법으로 눈먼 소경을 고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러분, 6절 말씀을 다시 한번 주목해 보세요. 예수님께서 땅에 침을 뱉어서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평소에 말씀 한 마디로 아무리 중한 병이라도 간단히 고치시던 예수님이신 데 이 소경의 경우,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 환자의 눈에 바르셨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위생적으로 볼 때에도 불결하기 짝이 없는 일을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침을 발라 환자를 고치신 경우는 딱 두 번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실로암의 기적과 에바다의 기적입니다. 막 7: 33에 보면 예수님께서 '귀먹고 어눌한 자'를 그의 혀에다가 침을 뱉어서 고쳐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 에바다의 기적은 본문에 나오는 실로암의 기적보다 더 불결합니다.

예수님께서 귀먹고 말더듬는 사람을 먼저 무리로부터 떨어져 다른 곳으로 데려가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고 침을 뱉어서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침을 땅에다 뱉으셨는지, 당신의 손가락에다 뱉으셨는지, 아니면 직접 남자의 혀에다가 뱉으셨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남자의 혀가 굳어 있어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혀를 풀어주시려는 노력의 일환으로서 주님께서 이와 같이 복잡한 의식을 베푸셨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남자가 귀머거리였기 때문에 귀를 뚫기 위한 노력으로서 양 손가락을 귀에 넣으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평소에 말씀 한 마디로, 심지어 현장에 직접 가지도 않으신 채, 죽어가던 사람도 간단히 살리시던 주님께서 왜 이렇게 복잡한 의식을 동반한 채 병을 고쳐주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귀먹고 어눌한 남자는 자기의 직접적인 믿음 때문이 아니라 다른 친구들의 믿음과 증언 때문에 수동적으로 예수님께 나아왔기 때문에 믿음을 심어주기 위하여 하나의 상징적인 행위로 이렇게 하신 것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본문에 나오는 소경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소경의 병을 고쳐주시기 전 까지 이 소경이 예수님에 대하여 어떤 믿음을 가졌는지에 대해서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요한 복음 9장 전체는 이 소경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소개하는 장(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쨌든지 간에 아주 중요한 사실은 이 소경이 예수님에 대한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예수님께 먼저 나아 온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먼저 보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보았다는 말은 단순히 힐끗 쳐다보았다는 말이 아니라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응시했다는 말입니다.

제자들 역시 이 소경을 보았는데 그들은 예수님과 다른 각도에서 그 소경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이 소경의 미래를 보셨지만 제자들은 이 소경의 불우한 현재와 그 원인이 되는 과거를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이 사람이 이렇게 된 것이 자기의 죄 때문인지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인지 예수님께 여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졌던 전통적인 견해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고통을 받는 것이 자기 자신이나 조상이 지은 죄에 대한 형벌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현재의 고통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영광스러운 일을 보이기 위한 하나의 기회로 해석했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고통에 대해서 과거를 탓하면서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해석을 가했습니다. 이들과 달리 예수님은 현재의 고통을 미래에 하나님께서 고치실 수 있는 하나의 기회로 보면서 고통에 대하여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해석을 가하셨던 것입니다. 현재의 고통을 미래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기회로 해석하셨던 것이지요. 

<밤 = 소경, 낮 = 세상의 빛되신 예수>
여러분, 이제 4-5절의 말씀을 한번 보세요. 이 사람이 나면서부터 소경이 된 것이 자신의 죄 때문도 아니고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신 뒤 뜻 모를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후 곧바로 소경의 눈에 당신의 침이 묻은 진흙을 바르셔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요한 9장 전체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하나의 중요한 본보기를 주기 위하여 소경의 눈을 고쳐주셨다는 것이지요.

4-5절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낮'과 '밤,' 예수님 자신이 '세상의 빛'이라는 표현이 아주 중요합니다. 낮과 밤은 정반대의 개념인 데 낮은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과, 밤은 소경과 각각 관계가 됩니다. 밤은 소경의 상태를 상징합니다. 소경은 훤한 대낮에도 밤에 삽니다. 앞을 보지 못하니 항상 어두움 속에 사는 것입니다.

반면에 낮은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세계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시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는 세상은 언제 어느 곳이나 광명한 낮이 됩니다. 예수님의 진리가 역사하는 곳은 비록 한밤중이라고 할지라도 언제나 찬란한 빛이 비추이는 낮이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밝은 대낮에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세상의 빛되신 예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세상은 어두운 밤이 되고 맙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어두운 한밤중에 살던 소경이 세상의 빛이 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밤에 속한 소경에게 빛되신 예수님께서 먼저 다가가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앞이 어두운 소경, 즉 한밤중에 빠져있던 소경과 세상의 밝은 빛, 즉 언제나 한낮과 같이 밝은 빛을 비추시는 예수님, 얼마나 날카로운 대조가 됩니까?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에게서 드러나게 하기 위하여 소경이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시자마자 예수님은 곧바로 낮과 밤에 대하여 말씀하셨으며 무엇보다도 당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에 당신의 침이 섞인 진흙을 발라주신 사건이 이 말씀 바로 뒤에 나온다는 사실이 아주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왜 소경의 눈을 고쳐주셨을까요? 앞을 보지 못함으로 항상 어두운 밤에 속해 있던 그를 세상의 빛되신 예수님, 즉 광명한 대낮으로 인도하시려고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소경의 어두운 눈을 밝히 뜨게 하심으로 밤을 낮으로 바꾸시려 했던 것이지요! 

<위약효과>
그렇다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왜 예수님께서 말씀 한 마디로 이 소경의 눈을 뜨게 만들지 않으시고 땅에 침을 뱉으시고 그것으로 진흙으로 개어 눈에 바르셨을까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 소경은 자기의 믿음 때문에 예수님께 나아온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님의 은혜 때문에 예수님이 먼저 만나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아직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을 소경에게 일종의 믿음을 불어넣어 주기 위하여 일부러 그렇게 하셨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의학 용어 중에도 위약효과(僞藥效果, placebo)라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에 의사를 쉽게 만날 수 없었을 때에는 할머니 손이 약손인 적이 있었습니다. 어린이들이 할머니한테 가기만 하면 자신의 아픈 데가 낫는다는 막연한 믿음과 기대를 가지게 됩니다. 실제로 배가 아파서 할머니한테 갔는데 할머니는 머리 아픈데 먹는 진통제를 배아픈데 먹는데 낫는 약이라면서 줍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와 같이 전혀 맞지 않는 약을 먹어도 병이 낫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것을 위약효과, 즉 가짜 약이 가지는 신통한 효과라는 말을 쓰는 것이지요. 

1950년대 후반에 캔사스 대학교의 의과대학 교수인 에드문즈 디몬드(Edmunds G. Dimond)가 이끄는 외과 의사팀이 협심증, 즉 심장에 피를 충분히 공급하지 못해서 가슴에 통증이 생기는 질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13명의 환자들에게 동일한 치료를 시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협심증을 앓고 있는 5명의 다른 환자들에게는 아주 피상적으로, 가슴만 약간 절개했을 뿐 그 어떤 수술도 하지 않았습니다.

협심증을 치료하는 수술을 받은 13명의 환자 중에 10명의 상태는 아주 호전되었습니다. 문제는 실질적으로 협심증 치료를 받지 않은 5명의 다른 환자들 역시 상태가 아주 좋아졌습니다. 위약효과가 일어났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도대체 이와 같은 위약효과가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무도 그 원인을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에 따르면 안도에 대한 어떤 기대감이 병의 원인이 될 뿐 아니라 병의 치료에도 아주 저해 요소가 되는 스트레스와 불안감을 현격하게 떨어뜨려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화학적으로 말해서 두뇌에 엔돌핀이 생겨나 통증을 완화시켜준다는 학설도 있습니다. 어쨌든지 간에 위약효과는 어떤 믿음과 연관된 바 심리적인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우리 현대인들의 눈으로 보면 침을 뱉어서 환부에다가 바른다는 것이 위생적으로 불결합니다. 그러나 고대에는 침으로 환자를 고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예컨대 고대인들은 독사의 독을 막을 수 있는 최고의 약이 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침이 간질병을 막아준다고 믿기도 했습니다. 또한 매일 아침 금식한 후에 생긴 침으로 눈에 발라줄 경우 안염이 낫는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악성 종양이나 목의 근육 경련 역시 침으로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와 같이 고대 사회에서는 침이 어떤 치료의 효력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 아주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손을 불에 델 경우 입에다가 대고 침으로 바릅니다. 사마귀 역시 금식한 후에 생긴 침으로 없앨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현대에도 있습니다.

어쨌든지 간에 이와 같이 침의 치료 효력에 대한 민간 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던 시대에 주님께서 침을 진흙에 섞어 소경의 눈에 발라 주셨다는 것은 주님이 얼마나 좋은 의사였던 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소경에게 어떤 신뢰감을 주셨던 것이지요. 진흙과 침이 뒤범벅된 것을 눈에 발라주심으로서 환자에게 어떤 기대 심리를 심어주셨던 것입니다. 일종의 위약효과를 노리셨던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소경의 소경됨, 한밤중에 있음을 철저하게 자각하게 만드신 예수님>
그러나 이와 같은 위약효과만으로는 이와 같은 의식 행위를 다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소경이 눈에다가 진흙을 바르는 것은 더 큰 소경이 되게 만드는 것 아닙니까? 가뜩이나 어두운 눈에 또 다른 장애물을 뒤집어쓴다는 것은 소경의 눈을 더 어둡게 하는 행위입니다.

더욱이 소경이 자기의 눈에 진흙을 잔뜩 바른 채 실로암 못으로 갈 때 세상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소경의 눈에 묻은 진흙을 주목하지 않겠습니까? 눈에 진흙을 바른 소경의 모습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었겠습니까?

여러분, 그러므로 소경이 눈에 흙을 바른 채 거리를 지나가는 것은 자기가 소경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demonstration,' 즉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자신은 철저히 어두운 한밤중에 있다는 사실을 보이는 것입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과 얼마나 다른 모습입니까?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과 달리 이 소경은 진흙을 바름으로서 더욱 더 어두운 소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잖아도 앞을 볼 수 없는 캄캄한 밤의 세계에 살게 되었는데 이제 진흙까지 발랐으니 더 깊은 어두움 속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이제 실로암 못까지 걸어가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 소경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가운데 또 진흙까지 눈에 덮어썼으니 이 사람은 영락없이 소경 위에 소경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세상의 빛되신 예수님 만나기 전에 철저한 소경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만나 주신 소경은,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모습에 다름 아닙니다. 어두운 밤, 캄캄한 밤중 한 가운데 살던 우리의 모습입니다. 빛 없이 어둠 속에 죄악과 위선 한가운데 살던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부인합니다. 인정하지 않습니다. 소경이라는 사실도, 어두컴컴한 밤 가운데 산다는 사실도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에 진흙을 발라서 실로암 못까지 걸어가게 하신 것은 이 사람이 철저한 소경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폭로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빛되신 예수님 앞에 우리 자신이 철저한 소경이라는 사실을 숨김없이 드러내놓는 것, 여기에 진정한 치유의 비결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밝은 빛이 비추이면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듯이 세상의 빛되신 예수님 앞에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우리의 모든 감추어진 죄악들이 샅샅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앞을 보지 못했으며, 어두운 밤에 살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십시오! 여러분 자신의 모든 죄악과 약점을 빛되신 예수님께 숨김없이 드러내십시오! 그리할 때 여러분의 영혼은 치유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소경은 예수님께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령했을 때 그대로 따라 했습니다. 그래서 실로암 못으로 가서 눈을 씻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말씀에 믿음을 가지고 순종했다는 뜻입니다!

<실로암 = 보냄을 받았다>
'실로암'이라는 말은 '보냄을 받았다'(SENT)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분이었듯이, 이 소경 역시 실로암 연못으로 '보냄을 받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두움을 거두고 빛을 증거하도록 보냄을 받으셨다면, 소경은 평생 어두운 밤중에 있다가 환한 대낮의 빛을 보도록 보냄을 받았던 것이지요! 

여러분,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의 병이 나았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서 실로암으로 무작정 갔는데 예수님께서 실로암 현장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병이 나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예수님께서 진흙에 당신의 침을 이겨 눈에 발라주셨을 때 이미 이 사람은 자기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기대와 믿음 때문에 병이 나았던 것이지요!

실로암 못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이 못은 히스기야 왕 때 터널을 뚫어서 이 터널을 통하여 끊임없이 물이 흘러 들어와 고이는 곳이었습니다. 적들이 쳐들어 올 때 용수(用水)를 확보하기 위하여 수로를 만들어 기혼 샘으로부터 물을 끌어 들여 고이게 만든 곳이 바로 실로암 못이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특히 초막절이 될 때마다 실로암 못에 있던 물을 길어서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에 붓곤 했습니다. 그러므로 실로암 못은 그냥 보통 연못이 아니라 신앙적인 의미로 교회인 것입니다. 실로암 못에는 기혼 샘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 들어와 고인 물이 있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 교회는 성령이 끝없이 흘러 들어와 성령으로 충만한 성소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세상에서 소경처럼 살다가 실로암 못, 즉 하나님의 성전으로 보냄을 받은 분들입니다. 그 옛날 예수님께서 소경의 처지를 먼저 아시고 만나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편을 먼저 아시고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에 진흙을 발라주셨던 것은 그에게 믿음과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자신이 철저한 소경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만천하에 드러내놓게 하시려는 의도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도 세상의 빛되신 예수님 앞에 어두컴컴한 밤에 살았던 우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놓을 때 하나님의 크신 영광과 은혜를 볼 것입니다. 세상의 빛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압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 옛날 소경이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 했을 때 아무 말 없이 순종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할 때 우리 하나님께서 소경된 우리에게 빛을 주실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 옛날 소경이 끝없이 생수가 흘러 들어와 고이는 실로암 못에 보냄을 받았듯이 우리는 성령의 생수가 끊임없이 넘쳐나는 하나님의 성전에 보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소경되었던 저와 여러분들이 세상의 빛되신 예수님을 만나고 돌아가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더 이상 어두운 밤에 살지 않고 환한 대낮에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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