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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너를 세우리라 (학 2: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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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곽주환 목사

마쓰시타는 세계적인 기업이다. 일본 최고의 공과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한 학생은 모교에서 마련해 준 기회들을 거절하고 미쓰시타 회사의 입사 시험에 응모했다. 그러나 최종 합격자 명단에는 빠져 있었다. 수치심과 분노에 괴로워하던 학생은 그만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하고 말았다. 다음 날, 전보가 한 장 날아왔다. 입사시험의 수석 합격자인데 전산 처리에 문제가 생겨 누락됐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회사 인사부의 책임자도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이 소식이 그룹의 총수가 이 말을 듣자 그의 반응은 전혀 엉뚱했다. “이 학생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은 참으로 애석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 회사가 이 학생을 받아들이지 않게 된 것은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정도의 좌절을 이겨내지 못한 것으로 봐서 그 학생의 심리적 자질이 형편없으며, 그런 심리적 자질로 회사의 중요한 자리에서 좌절을 만나게 될 경우 스스로 자살을 선택한 것처럼 다분히 충동적이고 비극적인 방법으로 일을 처리할 가능성이 크고, 그럴 경우 회사에 막대한 손실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 뻔하다는 이유였다.
우리는 쉽게 넘어지고 좌절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어려운 시험을 당할 때에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이 앞설 때도 있을 것이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 앞에 큰 일을 감당했던 사람들도 영적으로 시련을 당할 때가 있다. 위기를 당할 때가 있다. 대표적인 예로 엘리야를 들 수 있다. 그는 영적으로 기적을 체험한 사람이다. 아합 왕 때에 바알 숭배가 얼마나 극심했는지 모른다. 극심한 가문이 들자 바알을 따르는 선지자 450명과 대결하여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승리를 거두웠다. 450명의 선지자들이 모두 죽었다. 하나님이 지금 살아서 역사하고 계심을 확신케 하는 사건이었다. 이 일로 인하여 화가난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쫓아간다. 엘리야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엘리야는 로뎀나무 밑에서 내 목숨을 거두워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렇게 엄청난 영적인 체험을 하였고, 바알 선지자 450명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엘리야도 이렇게 어느 순간 무너지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주변 환경을 통해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고통을 경험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육신의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십년 동안 그 몸을 치료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고치지 못하고 결국에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스스로 목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라. 학개를 통하여 스룹바벨에게 말씀하신다. “스룹바벨아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취하고 너로 인을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개역 개정판 성경에는 “스룹바벨아 너를 세우고 너를 인장으로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을 취하고, 스룹바벨을 세우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스룹바벨은 누구인가? 바벨론에서 돌아온 사람으로 페르시아의 왕이 스룹바벨을 유다의 총독으로 세웠다. 스룹바벨은 정치적인 지도자로서 백성들과 힘을 합하여 성전을 잘 지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성전을 지은 자랑스러운 사람이다. 하나님의 뜻을 세워드린 사람이다. 바로 그 사람, 스룹바벨을 향하여 “내가 너를 취하고, 내가 너를 세우리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은 스룹바벨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다.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감당하면 주님이 세워주신다. 주님의 뜻을 세워드리면 주님이 우리를 세워 주신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것 같아도,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감당하면 주님이 우리를 택하신다. 주님이 우리를 세워주신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가장 사랑받던 제자이다. 모두 떠나도 예수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자신 만만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에 그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였다. 쓸쓸하게 고향 갈릴리로 돌아와 고기를 잡고 있었다.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그의 삶이 넘어진 상태이었다. 그를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것도 세 번이나 반복하여 물으신다.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신다. 새로운 기회를 주신다. 베드로에게 주님의 귀한 양떼를 부탁하신다.

내가 넘어지는 위기에 있어도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이 세워 주신다. 내가 고통 스러운 상황에 있어도 내가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감당하면 주님이 우리를 세워 주신다. 우리는 지금 한참 거룩한 성전을 짓고 있다.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주의 성전을 지을 때에 주님은 우리를 세워 주실 줄로 믿는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역사가 있다. 하나는 전쟁의 역사이다. 전쟁에서 이기면 세상의 지도가 바뀐다. 문화가 바뀌고, 권력이 바뀐다. 세상의 역사는 전쟁에서 이긴 자에 의해 역사가 다시 쓰여진다. 그러나 그 어떤 세력도 영원할 수 없다. 로마의 역사가 영원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 영국의 역사가 영원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 전쟁에서 이긴 강한 자가 영원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설사 더 강한 자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도 내부의 모순과 반란으로 무너지게 된다. 이것이 역사의 과정이다. 본문의 말씀에 “동문의 칼에 엎드러지리라”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역사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이다. 다윗을 혈통으로 인하여 예수가 이 땅에 태어나시게 되는데 하나님은 그 혈통에 있는 스룹바벨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취하리라. 내가 너를 세우리라. 당시에 전쟁의 역사에 의하면 페르시아의 황제가 더 큰 권력을 갖고 있었고, 스룹바벨은 황제가 보낸 유다의 총독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스룹바벨을 택하시고, 그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역사는 전쟁의 역사가 모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세상은 구원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로 움직여 간다. 호랑이하고 토끼하고 싸우면 분명히 호랑이가 이긴다. 호랑이가 토끼를 잡아 먹었으니 산에는 호랑이로 가득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다. 산에 호랑이를 볼 수는 없어도 토끼는 온 산에 가득하다. 이 세상의 역사는 강한 힘을 지닌 전쟁의 역사로 이어지는 것 같지만, 구원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로 전개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로마 정부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에 그것은 전쟁의 역사요, 호랑이 같지만, 로마의 권력은 무너져 내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가 온 세상에 퍼지고 있다. 호랑이 앞에 약한 토끼의 모습으로 죽었지만 토끼가 온 세상에 가득하게 된다.

스룹바벨은 페르시아 황제에 비하면 토끼에 불과하다. 그런데 하나님은 힘있는 황제를 택하지 않으시고, 토끼같은 스룹바벨을 택하시고, 그를 세우신다고 약속하셨다. 왜 그런가? 그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의 성전을 세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전을 완공하였다.
여기에 분명한 메시지가 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의 뜻을 세워드리면 주님이 우리를 세워주신다. 성전 세우면 주님이 우리를 세워 주신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감당하면 주님이 우리를 세워 주신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예루살렘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호산나 호산나 외치며 주님을 환영한다. 그 때에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다. 나귀를 보면 왠지 불쌍해 보인다. 나귀를 보면 왠지 처량해 보인다. 그런데 그 나귀가 예수님을 모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나귀는 더 이상 처량하지 않다. 나귀는 더 이상 불쌍해 보이지 않는다.

세상에 살면서 우리가 불쌍해 보일 때가 있다. 힘들어 보일 때가 있다. 병이 들어서 힘들어 보이고, 사업이 잘 되지 않아서 힘들어 보이고, 인간 관계로 인하여 힘들어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시고, 구원의 역사를 위하여 쓰임받으면 주님께서 우리를 세워 주신다. 복있는 사람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붙잡아 주신다.
나는 확신한다. 나는 믿는다. 나는 고백한다. 성도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전을 짓고 있다. 감동된 마음으로 성전을 세우고 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실 줄로 믿는다.

이같이 성전 건축을 마친 스룹바벨을 하나님께서 취하여 세우셨다. 본문의 말씀에 보니, “그 날에 내가 너를 세우고 너를 인장으로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니라.”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을 하나님의 도장으로 삼으신다고 말씀하셨다. 당시에 도장이 새겨진 반지를 끼고 다녔다. 카작스탄에 갔는데 입국 심사하는 사람들이 도장이 새겨진 반지를 끼고 그것으로 도장을 찍는 것을 보았다. 도장이 얼마나 중요한가? 도장을 아무데나 맡기겠는가? 도장을 잘못 찍으면 내가 재산을 모두 잃을 수도 있고, 도장을 잘못 찍으면 내가 다른 사람의 호적에도 올라갈 수 있다.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을 취하고, 그를 세워서 그에게 하나님의 도장을 맡기겠다고 말씀하셨다. 즉, 주님의 대리인으로 세우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기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전을 지은 스룹바벨을 향하여 내가 너를 세워서 나의 대리인으로 세우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결과가 이렇게 엄청나다. 성전을 지은 그 손이 이렇게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다.

사랑하는 성도여! 우리는 이 성전을 지으면서 단지 교회가 커진다고 생각하지 말라. 좀더 편안하게 예배드릴 수 있겠다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생각하지 말자.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겠다는 생각에 그치지 말자.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의 마음 속에 꼭 담아두자. “스룹바벨아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세우고 너를 인장으로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우리 교인들에게 이 말씀을 이렇게 전하고 싶다. “구로중앙의 교인들아, 베다니에서 생긴 일을 감당할 성도들아,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세우고, 너를 인장으로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내가 주님의 뜻을 세워드리면 주님이 우리를 세워 주신다. 주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삼으신다. 여러 가지 힘든 상황에서 넘어지지 말고, 주님의 뜻을 세워드리자. 주님께서 우리를 세워주시는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할 줄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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