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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로의 하나님 (사 51: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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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이봉 목사 (상도교회)

□ 위로의 하나님 

(가라사대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여늘 나여늘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같이 될 인자를 두려워하느냐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예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 결박된 포로가 속히 놓일 것이니 죽지도 아니할 것이요 구덩이로 내려가지도 아니할 것이며 그 양식이 핍절하지도 아니하리라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바다를 저어서 그 물결로 흉용케 하는 자니 내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고 내 손 그늘로 너를 덮었나니 이는 내가 하늘을 펴며 땅의 기초를 정하며 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려 하였음이니라) (이사야 51:12-16)

요즘 우리 주변에서 보면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회 각 계층마다 요구사항들이 많아 데모하는 일들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공무원들까지도 데모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또 농사를 짓고 있는 순박한 농민들도 살기 힘들다고 데모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업이 부진하여 부도를 내고, 생활고로 인하여 아파트에서 뛰어 내려 온 가족이 함께 동반 자살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모두 안타까운 일들이요, 그렇게 절박한 사정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사람들로서 어떻게 위로할 길이 없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통하여 진정한 위로자는 누구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시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너희를 위로할 자 나 밖에 또 누가 있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 된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가 되어 잡혀가 갖은 고생을 하는 중에 주신 말씀입니다. '너희를 위로할 자, 나 밖에 또 누가 있겠느냐?'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사회의 혼란 중에서, 위로할 자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말씀으로 위로 받기를 바랍니다.

요즘 우리 주변에는 위로 받아야할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다시 실직당한 분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노숙자들이 다시 많이 생겼습니다.
경제적 위기에서 실직당한 이들,
육체의 병으로 건강을 잃은 사람들,
남에게 사기를 당하여 낙심 중에 있는 분들,
그리고 가족을 먼저 하늘나라에 보내고 슬픔 중에 있는 사람들,
이 모두가 위로 받을 자들입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위로 받을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사람의 말로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비관합니다.
자살의 충동을 억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린 것들과 함께 동반 자살까지 합니다.
이 얼마나 불행스러운 일입니까?
'과연 위로 받을 곳이 없는가?’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위로할 자 나 밖에 또 누가 있는가?' 라고 하십니다.

저의 장모님은 25살에 남편을 잃고 92세에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가셨는데, 저의 집 사람과 오빠 남매를 남겨놓고 돌아갔으니, 저의 집사람은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자랐습니다.
그 젊은 나이에 어떻게 그 험한 세월을 사셨는가? 물었더니,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받고 살았다고 하시었습니다.
더욱이 그의 유일한 희망이요 생명과 같이 의지하였던 아들이  6.25 휴전되기 1달 전에 전사했습니다.
처음 아들의 전사 통지서를 받고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더랍니다. 처음에는 넋이 나간 사람이 되어 눈물도 나지 않더랍니다. 그리고 통 사람을 만나기가 싫어지더랍니다.
사람의 위로한다는 말이 싫어서 두문불출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비몽사몽간에 아들이 군복 입은 복장으로 나타나 '어머니! 내가 이렇게 좋은 곳에 가 있는데 왜 울고만 계십니까?’ 하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고 합니다.
꿈은 꿈이나 너무나 분명한 현실처럼 보여준 꿈이었다고 합니다. 그 후부터 마음을 가다듬고 성경을 보는데, 요한복은 14:1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아니하였으면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는 말씀이 그렇게 마음을 편하게 하고, 위로하는 말씀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인간의 말은 이처럼 아무 것도 위로할 수 없습니다.
슬픔을 당한 사람에게,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아무리 좋은 말로 위로해 봤자, 그 말이 위로가 됩니까?
사람의 말처럼 힘없이 들리는 것도 없습니다.

2. 하나님은 모든 위로의 근본이십니다. 
참된 위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샬롬(Shalom)입니다.
사람의 위로나,
물질로부터 오는 위로나,
환경으로부터 오는 위로는 잠시 뿐입니다.
세상이 주는 물은 마실 때 잠간 갈증을 해소하지만, 속에서 부터 해갈을 얻는 것은 주님께로 부터 오는 생수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갈하지 아니하리라'(요4:14)고 하였습니다.

주님이 주는 생수(生水)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약속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풍성히 거하면 두려워하지 않고 감사하는 자들이 됩니다.
낙심하지 않고 다시 용기를 내어 일어서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실패한 자리에서 이슬처럼 내립니다.
이슬은 밤에 내립니다.
밤에 내리는 이슬로 인하여 열매는 더 충실해집니다.

오늘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던 시대적 배경을 보면, 주전 8세기 경입니다. 주전 8세기경에 세계를 지배했던 나라는 바벨론과 애굽  이었습니다. 특히 바벨론은 고대 국가 중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이었습니다.
바벨론의 유적은 지금도 고고학을 연구하는 학도들에게는 귀중한 자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무라비 법전은 지금도 법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는 귀중한 역사 유물 중에 하나로 여깁니다. 그런 바벨론에게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해야 했었습니다.
그때 이사야는 하나님의 위로를 선포하였습니다.

이사야서는 묘하게 성경 전체와 맞아 떨어집니다.
신구약 성경이 66권인 것 처럼, 이사야서는 모두 66장입니다.
또 구약이 39권, 신약이 27권인 것 처럼, 이사야 39장까지는 포로 전 상황에 대한 준엄한 하나님의 심판의 예언이었고,
이사야 40장부터 66장까지 즉 27장은 포로 후에 대한 회복과 위로의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서학자들은 너무나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후반부 40장 이하에 이사야서를 제2 이사야서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모든 내용이 '위로하라,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말로 시작이 됩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고.... '골짜기 마다 도두어지고, 높은 산마다 낮아지고,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들짐승들로 해갈함을 얻으리라'고....
모두 이렇게 위로의 말씀으로 차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죄 사함에서 부터 출발하고 있습니다.
죄의 멍에를 꺾음에서 부터 시작하는 말씀입니다. 그와 반대로 악령은 우리로 죄의 사슬로 묶어버립니다.
성령은 우리를 죄로 부터 해방 시키지만,
악령은 너는 죄인이라고 더욱더 무거운 멍에를 지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위로의 근본입니다.
그래서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1:3-4)라고 하였습니다.

3. 그러므로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성도(聖徒)는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위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죄의 사슬에서 풀려난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죄(Sin)와 허물(Fault)을 구별해야 합니다. 죄의 값은 사망(Death)이요,
허물의 값은 형벌(Punishment)입니다.
우리는 이제 저주(Curse)의 대상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기에 이제는 사망의 명단에서 옮겨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구속의 기쁨을 못 느끼는가 하면, 허물은 지금도 다 있기 때문입니다. 허물은 고백함으로 용서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7곱번 까지가 아니라 70번씩 7번이라도 용서를 하는 것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아직도 <속죄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구원의 확신이 없다면,
그의 믿음은 사탄의 유혹을 물리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어떤 경우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위로를 전하는 사신(Messenger)들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이란 기쁨의 소식입니다.
죄인에게 기쁜 소식은 죄 사함을 받았다는 소식입니다.
죄의 멍에가 벗어졌다는 소식입니다.
형 집행이 사라졌다는 소식입니다.
이 소식이 위로의 소식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제부터 신분이 바뀌었다는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신분이 바뀌어졌다는 것을 전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기 우리 한사람, 한사람은 모두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였던 일, 그것을 계승할 사명자들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되고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그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것이 오늘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초신자들이나 믿음이 약한 자들을 도리어 실족시키는 일을 삼가야 합니다. 특별히 먼저 믿은 사람들이 신비적 체험을 하였다는 사람들, 예언 기도하는 사람들, 투시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조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악령은 성령의 은사 받은 사람까지도 유혹합니다.
마치 사탄이 40일 금식한 직후에 주님을 찾아와서 시험했듯이, 은사 받은 사람에게도 악령은 찾아옵니다. 그래서 그 은사를 사탄이 이끄는 대로 하게 합니다. 악령도 영이므로 영들은 서로 통합니다. 악령은 사람을 실족케 합니다. 죄를 지적해 냅니다. 그러나 그것을 낙심케 하여 실족케 합니다. 영혼을 살려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위로의 영입니다.

우리 모두 위로의 성령의 역사를 감당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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