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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흥(2) “말씀: 부흥의 영원한 기초” (행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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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안상혁 목사

1. 우선순위

“말씀”은 부흥의 영원한 기초입니다. 부흥이란 “내 속에 성령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는 것”이라고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말씀’이야말로 부흥을 가능케 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사도들은 “무엇이 교회 안에서 왕좌를 차지해야 하는가?”라는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해답은 “기도와 말씀 사역”이었습니다.(2, 4절: performance #1) 사도들이 특히 “말씀 사역”(the ministry of the Word)에 에너지를 집중한 결과?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케 되었습니다. 또한 이와 동시에 초대교회는 큰 부흥을 맛보았습니다.(7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부흥을 기대하는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언제나 왕좌를 차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멘?

2. “왜 말씀인가?”

1) “왜 말씀이 그토록 중요한 것일까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직 성경만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유일한 법칙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 외에 다른 모든 책들은 우리의 삶의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얼마 전, 소위 ‘지구촌 최대의 베스트셀러’가 된『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Who moved my cheese?)라는 책이 등장했습니다. 이 책은 짧은 우화를 통해 현대인들에게 ‘변화’를 두려워말고 오히려 이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것을 교훈합니다. 비록 우화이지만, 사람들은 이 교훈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기 시작했습니다. NBC의 찰리 존슨은 육상 부분을 담당하는 스포츠 해설자입니다. 어느 날 직장상사가 그에게 육상대신 수영을 중계하라고 지시합니다. 이에 존슨은 크게 당황하며 불만을 토합니다. 이 때 그는 “누가 내 치즈를..”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변화를 긍정적으로 수용합니다. 그 결과 오히려 성공적인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간증(?)합니다. 그렇다면 전 세계의 수많은 독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은 이 책의 교훈을 두고 우리는 그것을 ‘진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최근 서점가에는 이 책의 내용을 비판적인 입장에서 수정 내지 반박하는 “Who Cut the Cheese?”라는 (같은 제목의) 두 권의 책--각각『누가 내 치즈를 잘랐을까?』와 『치즈 내 것 만들기』로 번역--이 출판되어 역시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습니다. 특히 두 번째 책은 “새로운 치즈를 맹목적으로 따라 가는 삶은 인간을 결코 행복하게 만들지 않는다!”고 말하며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의 교훈에 대한 근본적인 이의를 제기합니다. 정말 그렇지 않겠습니까? 자, 보세요. 이처럼 인간의 지혜로 만든 책은 제아무리 베스트셀러가 된다고 할지라도 결코 완전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내 삶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2) 그렇다면, “오직 성경만이 진리이다”라는 사실은 교회의 “부흥”과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잘 들으세요. “부흥은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에 기초했을 때에야 비로소 ‘참된 부흥’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곧  “말씀에서 떠난 부흥 운동은 모두 가짜다!”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성령님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다스린다고 했는데, 말씀을 떠나서 성령 하나님의 통치, 곧 ‘부흥’이 실현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기독교 역사를 통해 (말씀에서 떠난) 수많은 “거짓 부흥”의 예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십자군 운동”입니다.

중세 가톨릭 교회는 성경보다 교황의 말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performance #2 : 성경을 지구로 비유한다면, 성경을 해석하는 행위는 종이 위에 지도를 그리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3차원을 2차원(종이)으로 옮겨 표현하다보니 반드시 ‘왜곡’이 발생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흔히 사용되는 메르카도르 도법은 극지방에 있는 지역을 실제보다 4배나 크게 그려냅니다. 반면 상송도법은 극지방을 지나치게 축소시킵니다. 여섯 개 대륙을 비교적 정확하게 그려내는 구드 도법은 반면 5대양을 통째로 빠뜨립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다양한 도법으로 그려진 지도를 볼 때, 반드시 3차원의 세계에 존재하는 본래의 지구 모습을 확인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 입니다.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설교를 포함해서 성경에 대한 인간의 모든 해석 행위는 반드시 불완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에 대한 인간의 해석은 반드시 성경 말씀에 비추어 반드시 평가를 받아야만 합니다. 성경에 대한 해석마저도 우리는 절대화 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세 가톨릭 교회의 근본적인 잘못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성경대신에 성경에 대한 교황 혹은 교회회의의 해석을 절대화했습니다. 그리고 일반 성도들로 하여금 성경을 직접 읽는 것을 철저히 봉쇄했습니다. 그 결과? 중세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교황의 말씀에 의지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불행을 겪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배경 하에서 십자군 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11세기 말, 교황 우르반 2세가 십자군 운동을 일으켰을 때, 교회는 “성지탈환은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말에 아무 생각 없이 순종했습니다. 교황의 말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 곧 성경 말씀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십자가를 앞세워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는 대신 오히려 유대인과 아랍인들을 대량 학살하는 엄청난 일을 저질렀습니다. 말씀에서 떠난 중세교회가 판단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만일 중세 교회가 성경을 바로 알았다면, “십자군 운동”은 아예 시작조차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은 ‘성지聖地’라는 개념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십자군 시기에 표현된 뜨거운 종교적 열정만을 보고 이것을 교회부흥의 역사에 포함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분명히 잘못입니다. 부흥과 종교적 열광은 반드시 구별되어야합니다. 진리 말씀에 기초하지 않은 (종교적) 열정은 반드시 거짓된 부흥을 낳게 되어 있습니다. 계속해서 십자군 운동에 대해 말씀드려 볼까요? 13세기 초, 프랑스와 독일에는 성지회복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는 몇몇 소년들이 등장했습니다. 교회는 그 계시를 전해 듣고 열광하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을 떠난 교회가 또 다시 판단력을 잃었습니다. 마침내 1212년, ‘소년 십자군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유럽인들은 5만 명의 순수한 어린이들로 구성된 십자군이 지중해에 도달하면, 홍해의 기적이 재현이 되어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성지를 탈환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진리--객관적인 계시, 곧 성경--에 기초하지 않은 (주관적인) 믿음이었습니다. 과연 그들의 소원대로 ‘홍해의 기적’이 일어났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수 천 명의 어린 십자군병들은 방황하다가 결국 악덕 상인들에 의해 다른 나라의 노예로 팔려 가는 비극이 연출되었습니다. (사실 지중해에 다다르기 전, 이미 수많은 어린이들이 알프스 산을 넘는 과정에서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었답니다)

여러분, 과연 십자군이 보여준 이 엄청난 종교적 열정 안에서 우리는 참 부흥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오늘날 한국 교회가 극적으로 표현하는 다양한 형태의 종교적 열정 가운데 적지 않은 부분이 역시 ‘진리’에 기초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유럽인들이 “5만 명의 순수한 어린이들을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은 그 헌신에 감동을 하여 지중해를 갈라주실 것이다!”라고 막연하게 믿었듯이, 우리는 “내가 5만 번의 치성을 드리면, 하나님도 마침내 감동을 해서 내 소원을 들어주실꺼야!”라는 식의 맹목적인 믿음을 갖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진리에 기초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십자군 운동의 믿음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습니다. 또한 이러한 맹목적인 믿음에 기초한 부흥 운동은 비록 그 겉모습이 화려할지언정, 진리에서 떠난 거짓된 부흥이요 결코 참된 부흥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3. 적용

1) 그렇다면 현재 “부흥”을 기대하는 우리는 제일 먼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예,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무엇이 여러분의 삶을 통치하도록 해야 합니까? 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을 읽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 이것이야말로 참 부흥의 내용에 해당합니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 말씀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어떻게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제 간절한 바람은 우리 중고등부 학생들이 그 어느 무엇보다 “말씀”을 사랑하고 진리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갖는 친구들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저와 같은 전도사가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진리 말씀을 잘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설교자는 “말씀의 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성경말씀을 즐겨 읽고 설교 말씀 듣기를 사모하는 사람이 될 때, 성령님은 여러분 안에서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아멘?

2) 부흥이 내 삶 속에서 이루어지기 위해 우리는 굳이 ‘새로운 계시’를 받거나, 신비한 체험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어떤 극적인 체험을 계기로 삶의 변화, 곧 부흥을 체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많은 사람들은 신비체험에 의지하지 않고도 성경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삽니다. 자신의 삶을 주님께 헌신한 합신의 전도사들이 하루 중 제일 많이 하는 것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바로 ‘공부’입니다. 목사와 선교사? 눈물 없이 기도할 때가 훨씬 많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매일의 삶은 이미 그 자체로 성령님의 통치를 받는 삶, 곧 부흥이 실현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부흥은 삶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장소? 바로 여러분의 일상의 삶의 현장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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