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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맞다! 이 길 (빌 3: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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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황금성 목사

초행길에 여행을 하다보면 두 갈래 길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지도도 없고 방향도 모르고 이정표도 없습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길을 잘못 들어서면 목적지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동행자는 이쪽이라고 합니다. 서로 생각이 다릅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길을 찾아야 할까요? 가위 바위 보를 할까요? 제비를 뽑을까요? 다수결 투표를 할까요?

우리가 인생의 두 갈래 길에서 선택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직업을 선택할 때, 결혼 배우자를 선택할 때가 있습니다. 한번 선택하면 돌이키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매우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인생길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종교입니다. 종교를 선택하는 일은 매우,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길이냐, 멸망의 길이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가신 십자가의 길 외에 다른 길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타종교에 배타적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으로 가는 진리의 길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타종교와의 대화를 시도하는 사람들을 종교다원주의라고 합니다. 불교와 심지어는 무당까지도 대화하자고 합니다. 이런 말은 옹졸하지도 않고 생각이 넓은 것처럼 보입니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등산에 비유합니다. 산 정상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개가 있습니다. 이처럼 어떤 종교를 믿어도 정상에서는 다 만난다고 합니다. 믿는 내용과 방법이 다를 뿐이라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인생길은 등산이 아닙니다. 단지 두 가지 길이 있을 뿐입니다. 천국 가는 길과 지옥 가는 길입니다. 이쪽이냐 저쪽이냐 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속에는 인생의 두 가지 길을 달린 사람들이 소개됩니다. 하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인생을 살면서 각기 추구하는 것이 다릅니다. 길이 서로 다릅니다. 각각 도착한 곳은 서로 너무나 다른 곳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는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확실한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주일 설교는 푯대를 향해 달려가란 말씀을 했습니다. 푯대를 향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울은 뒤를 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오직 앞만 향해 달렸습니다. 그런데 아직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진행형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우리 온전한 자들이란 말을 하고 있습니다.
15 절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2 절에서 바울은 온전히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에 비추어 볼 때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이란 말은 이상하게 들립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해석이 어렵습니다. 본문을 해석하려면 우선 유대인들을 봐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는 자신들이 온전하다고 말해 왔습니다. 빌립보교인들이 이런 유대인들의 말을 들으면서 반감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영향을 받고는 역설적으로 예수 믿는 믿음이 온전히 이룬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즉 빌립보교인들이 자기들이 예수를 믿으면서 진정으로 온전한 자, 성숙한 신앙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스스로 온전함을 이룬 자들이라고 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달리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올바르게 깨우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각자 믿음의 경주를 계속 해야 합니다.

그래서 16 절에서 바울은 빌립보교인들에게 계속 달리라고 채근하고 있습니다.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니라.”

중간쯤 달리다가 의심합니다. 이 길이 맞나? 내가 선택한 이 길이 참된 길인가? 과연 이 길이 생명의 길인가? 내가 믿는 것이 진리가 확실한가?

그래서 바울은 어느 지점까지 도달했든지, 거기서 뒷걸음치거나 방황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을 계속 따라가면 마침내 푯대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서 17 절에서 바울은 위대한 선언을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참으로 위대한 선언입니다. 오늘 목사들 중 몇 명이나 교인들에게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선언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신앙, 나의 윤리적 삶, 나의 경건을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바울의 이런 선언에서 저는 커다란 도전을 받습니다. 나를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참 목자일 것입니다. 설교자가 설교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 성도들에게 본이 됩니다. 그 설교가 설득력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바울이 자기를 본받으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모방자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이것을 특권으로 여겼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했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같은 모습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그리고서 바울은 자신의 모범과 반대로 사람들에게 개탄합니다. 여기서 자신을 모범으로 사는 사람들과 반대로 사는 사람들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두 길입니다. 하나는 그리스도를 본받고 삽니다. 그런데 다른 하나는 십자가의 원수로 삽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빌 3:18-19>

그들은 십자가를 구원으로 보지 않습니다. 단지 십자가를 저주의 상징으로 봅니다. 철저히 자기주장의 원칙대로 삽니다. 저들이 믿는 것은 자기 배입니다. 저희의 신은 배라고 한 것은 유대인들의 음식을 가리는 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철저한 정결의 법입니다. 배속에 무엇이 들어가는가 하는 문제를 크게 봅니다.

또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 부끄러운 것이란 할례를 두고 한 말입니다. 바울은 3:2 절에서 이것을 손할례당이라고 악평했습니다. 여기서는 부끄러운 것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의 할례는 로마사회에서 놀림거리가 되었습니다. 로마는 목욕문화가 발달했습니다. 또 당시 헬라인들은 운동경기를 할 때 옷을 벗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할례는 쉽게 이방인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고대에는 유대인들이 언약백성의 상징이라고 할례를 자랑했었습니다. 그런데 전세가 역전이 되어 이제는 부끄러운 상징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수술로 할례자국을 없애려고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음식을 먹는 문제와 할례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땅의 일을 생각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땅에 있습니다. 그들은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눈물로 그들의 멸망을 애처롭게 보는 것입니다. 그들의 불신앙을 보면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을 바라보는 바울의 마음이 타는 듯 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믿지 않는 자들을 바라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까? 저들의 멸망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지 않습니까? 저들은 지금 죽음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잘못된 길이지만 그 길의 끝이 멸망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20-21 절 말씀입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할렐루야! 저와 여러분은 이 구원에 반열에 선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자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부활의 영광스러운 몸체를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결코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 길은 참된 길입니다. 여기에는 구원이 있고, 생명이 있습니다. 이 길을 걷는 자는 천국에 다다르게 됩니다.

우리 모두 이 믿음의 길을 끝까지 경주합시다. 중간에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믿는 이 길에서 낙망하지 맙시다. 어떤 유혹과 시련이 닥쳐도 이 길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오늘 성찬을 받습니다. 우리의 성찬의 잔에 생명의 은혜를 가득 담으십시다. 구원의 은혜를 가득 담으십시다. 이 구원의 잔에 참여하지 못하는 이들을 안타까이 여기십시다. 저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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