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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지어라 (창 6:1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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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윤형 목사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축복하시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창1:28). 그런데 인간은 이 하나님의 축복을 저주로 바꾸었습니다.

인간이 번성하매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했다”고 했습니다(창6:5). 하나님께서 인간의 그 마음의 생각과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사람을 지면에서 쓸어버리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은 심판 중에도 의인 노아에게 구원 계획을 계시하셨습니다.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지어라”고 하셨습니다. 이 방주계시는 노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요, 은총입니다. 이 말씀은 또한 오늘 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성도에게 주시는 사랑의 명령입니다. 이 방주계시는 우리의 구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요,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교회의 예표입니다.

이 시간 우리들의 가슴마다에 구원의 방주가 아름답게 지어지기를 바랍니다.

왜? 우리는 오늘 이 구원의 방주를 지어야 하는가?

Ⅰ. 세상의 끝이 가까왔기 때문입니다.

본문 13절에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6:23).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악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거룩한 셋의 후손들도 영적인 유산을 잃어버리고 점점 세속화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고 했습니다(창6:2).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란 무슨 뜻인가? 본능적인 삶을 산다는 뜻입니다. 자기의 정욕 따라 사는 삶입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은 경제전쟁에서 패하여 망하지 않습니다. 영토전쟁에서 패하여 망하지 않습니다. 어느 때 세상이 망하는가? 죄악으로 타락하여 망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성적으로 타락할 때 세상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노아의 시대가 그러했고, 소돔과 고모라의 때가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부패와 타락을 감찰하신 것입니다.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방주를 지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이 세상의 끝이라는 것입니다. 심판의 때가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방주를 지을 것을 명하시면서 노아에게 아무것도 주시지 아니하셨습니다. “너는 잣나무로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고 하셨습니다(창6:14). 재료도 주시지 아니하시고, 연장도 주시지 아니하셨습니다. 살길을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셨는데, 그 길을 네 스스로 찾아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이때부터 노아에게는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이 시대의 노아와 아들들이 놀고먹었겠습니까? 아닙니다. 아담의 범죄이후에 인간은 이마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도 생업에 종사하여 경제생활을 영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애써서 일해가지고 무엇하는 데 썼습니까? 배짓는데 썼습니다.

성경 기록에 의하면 이 배의 길이가 171.5M, 폭 28.5M, 고 17.2M, 총 톤수 13960톤 - 화물차량 522대의 용적과 맞먹는 규모입니다. 이정도의 배가 건조 되려면 수백억의 건조비가 필요합니다.

이 배는 1884년 이탈리아의 “에투리아”호가 진수되기 전까지는 세계 최대의 선박이었습니다. 노아가 이 일을 하는데 한 두 해가 걸린 것이 아닙니다. 무려 120년이나 걸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배가 지어지기까지 120년 동안 심판을 유보하셨습니다. 왜? 노아와 그의 여덟 식구를 구원하기 위해서 기다리신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그 때처럼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고 하십니다(막1:15).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벧전4:7). 지금은 구원의 방주를 지을 때입니다. 그러나 방주는 마음으로 짓는 것이 아닙니다. 입으로 짓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재료도 가르쳐주시고, 설계도도 만들어 주셨으니, 잣나무를 배어다가 배를 짓고, 역청을 퍼 다가 배의 틈새를 막는 것은 내가 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일을 내가 하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힘도 주시고, 능력도 주시고 그 역사가 잘 이루어지도록 축복하실 것입니다.

Ⅱ. 방주 밖의 인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8장 6절에 “40일이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지은 창을 열고 까마귀를 내어 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다”고 했습니다.

“날아 왕래하였다” 어디서 어디까지 왕래했다는 말인가? 방주에서 세상까지 왔다. 갔다. 했다는 말입니다. 노아가 까마귀를 날려 보내면서 무엇이라고 했겠습니까? “세상이 어떻게 되었는지 살펴보고 오너라” - “네 갔다 오겠습니다” - 그런데 방주에 갇힌 까마귀가 세상에 나와 보니, 세상에는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기가도 시체, 저기가도 시체 - 본래 썩은 것을 좋아하는 까마귀에게는 어디를 가도 먹을 것이 풍성한 것입니다. 배불리 먹고 저녁 때 방주 꼭대기로 왔습니다. “아니야, 내일 하루만 더 먹고 방주로 들어가자” - 그래서 다음 날 다시 세상으로 갔습니다. 왔다가 가고, 왔다가 가고, 그래서 “날아 왕래하였더라”입니다.

오늘 교회에도 이러한 성도가 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세례도 받고, 떡도 먹고, 포도즙도 먹고 ... 축복도 알고, 은혜도 압니다. 주일 날 교회도 나옵니다. 그런데 교회 안으로 들어오질 않습니다. 등록도 않습니다. 봉사도 않습니다. 자기를 가만히 놔두라는 것입니다. 부담주지 말라고 합니다. 알아서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셨습니다(요14:20).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입니다. “네가 내 곁에 내가 네 곁에”가 아닙니다. 교회 안으로 들어와야 할 영혼이 지금도 세상과 교회 사이를 왕래하고 있으므로 그 영혼을 위하여 방주를 지어야 합니다.

Ⅲ. 방주로 돌아오는 비둘기(영혼)가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8장 8절에 “그가 또 비둘기를 내어 놓아 지면에 물이 감한 여부를 알고자하매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접촉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 지라”고했습니다.

썩은 고기를 먹는 까마귀는 세상에 와보니 볼 것도 많고, 먹을 것도 많고, 쉴 곳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날콩을 먹는 비둘기는 먹을 것이 없습니다. 시체에 발을 대지 않는 비둘기에게는 쉴 곳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날아다니다가 방주로 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가 쉴 곳은 세상에 없습니다. “곤한 내 영혼 편히 쉴 곡과 풍랑일어도 안전한 포구”(찬464) 예수뿐입니다. 교회뿐입니다. “접촉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왔다” -

오늘 여러분이 바로 그 비둘기입니다. 까마귀에게는 세상이 풍요롭고 즐거운 곳이지만, 비둘기에게는 세상에 발붙일 곳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피곤한 영혼이 있기에 - 방주로 돌아가야 할 비둘기가 있기에, 오늘 우리는 방주를 지어야합니다.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지어라” 선택의 기회를 잃지 않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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