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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주일] 초막절을 지키라 (신 16:13 -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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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영무 목사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한 주부가 늘 남편에게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주말이 되면 아내와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고 늘 혼자 도망을 쳤습니다. 골프도 혼자 가고 낚시도 혼자 가고 등산도 혼자 갔습니다. 부인은 주말이면 주말 과부가 되곤 했습니다. 이제 화를 참고 참다가 이 아내가 폭발했습니다. 어느 날 그 지역의 신문에다가 광고를 냈답니다. "우리 남편을 염가에 양도합니다" 고 말입니다. 그리고 "골프채와 사냥개와 낚시도구도 덤으로 드립니다" 하고 광고를 냈습니다. 그랬더니 한 60여통의 전화가 걸려왔는데 남편을 사겠다는 사람은 없고 그런 남편이 있는 것도 감사하며 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래도 그 집 남편은 바람을 안 피우는 것을 감사하고 살라고,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남편은 필요 없고 사냥개만 팔 수 없느냐고 물어보는 전화도 있었더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 가운데 살다보면 감사보다는 불평과 원망이 더 많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주 사용해야 되는 말은 감사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쓸 수 있는 단어 중에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고 고귀한 단어는 감사라는 용어입니다. 감사는 메마른 인간 생활에 있어서 윤활유와 같습니다. 감사는 황량한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습니다. 사막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목이 말라죽을 지경인데 그 시원한 물 한 컵을 먹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마치 황량한 세상 가운데 감사하는 삶은 마치 시원한 음료수와 같다는 것입니다. 또 인간관계가 아무리 딱딱하고 냉랭할지도 감사의 정이 오고갈 때 우리는 따스한 정을 느끼게 됩니다. 처음 만난 사람일지라도 서로 감사할 수 있을 때 마음 문이 열려지게 되지요. 또 우리는 감사할 때 삶의 흐뭇함과 행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우리에게 감사의 생활을 명령하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15절에 보니까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고 그랬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7절에 보니까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 보니까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매년 가을이 되면 추수감사절을 지킵니다.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은 두 개의 전통과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구약에서 하나님이 명령하신 감사제입니다. 유대인들이 지키던 감사절의 전통을 우리가 이어받고 있습니다. 또 한가지는 영국에서 종교적인 박해를 피해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의 추수감사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1620년 영국 국교의 종교적 박해를 피해서 102명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라는 배를 타고 65일 동안의 사투 끝에, 거친 항해 끝에 아메리카 신대륙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게 되었습니다. 종교적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들은 얼마나 좋아했을까요?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뿐이었습니다. 그들을 맞이한 것은 겨울의 혹심한 추위와 배고픔과 영양실조였습니다. 그래서 102명이 도착을 했는데 그 겨울을 다 나기 전에 44명은 추위와 영양실조로 죽어가야만 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든 생계를 해결해야 되었습니다. 그 때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인디언들이 와서 씨앗도 빌려주고 그리고 농사짓는 법을 가리켜 주었습니다. 그들로부터 농사를 짓는 법을 배워서 이들이 농사를 지어서 첫 해에 아주 초라한 수확물이지만 그것을 놓고 하나님 앞에 추수 감사를 드린 거예요. 그것이 바로 감사절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로 미국 정부에서는 11월 넷째 주일을 감사절로 정해서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그 전통을 이어받아서 우리는 1912년부터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신명기 16장에 보면 유대인들이 지켰던 세 가지 절기에 대해서 말씀해 줍니다. 처음 소개되는 절기가 뭐예요? 무교절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흔히 무슨 절기라고 그럽니까? 유월절이라고 그럽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오던 날 이스라엘의 장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랐고 죽음의 사자가 애굽의 장자들을 쳤지만 피를 바른 유대인들의 장자들은 치지 않았습니다. 그냥 건너뛰었습니다. pass over, 즉 뛰어 넘었다하여 우리는 그것을 유월절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누룩을 넣지 않은 무교병을 먹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애굽에서의 억압과 학대와 그 죄악의 땅에서 자유함을 얻은, 탈출한, 해방됨, 바로 그것을 기념하는 절기가 유월절 곧 무교절입니다.

  두 번째로 소개되는 절기가 칠칠절입니다. 우리가 흔히 맥추절이라 그렇게 부릅니다. 또 오순절이라고도 부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리 농사를 지어 그것을 처음으로 수확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드리는 제사, 그것이 바로 칠칠절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오늘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이 바로 초막절의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년 농사를 다 끝내고 늦은 가을에 모든 농작물을 다 거두어 들여서 창고에 저장한 이후에 하나님 앞에 칠일 동안 장막에서 제사를 드립니다.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그것을 우리가 바로 초막절이라고 부릅니다. 또 혹은 장막절이라고도 부르고 수장절이라고도 부릅니다. 곡식을 저장했다고해서 수장절이라고 합니다. 또 풀이나 나뭇가지로 뭔가 작은 초막을 만들어 놓고 거기서 지켰다고 해서 초막절이라고 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장막생활을 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장막절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러나 중심은 감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명령하셨고 구약성경에 기록된 이 초막절의 규례를 통해서 오늘 이 시대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우리의 자세와 의미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감사절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절기입니다.

  본문말씀 13절입니다. "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수장한 후에 칠일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모든 농사의 수확을 다 끝낸 후에 초막절을 지키라!"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세 가지 절기를 명령하셨습니다. 초막절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왜 하나님은 감사를 명령하셨을까요? 그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은 감사를 잘 잃어버리는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인간은 감사보다는 불평하고 원망을 잘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사절을 지킬 것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그것도 일년에 한 번이 아닙니다. 유월절, 칠칠절, 그리고 초막절 이렇게 일년에 세 번의 감사절을 지키는 거예요. 그것은 일상생활 속에서 감사를 늘 잊지 말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감사의 삶은 추수감사주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지요. 일년 365일이 늘 감사의 은혜 가운데 있어야 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곧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은혜를 주신 하나님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은 그 기본이 감사입니다. 여러분, 감사가 없는 예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까? 감사가 없는 기도, 감사가 없는 찬양이 있을 수 있습니까? 감사가 없는 헌신, 감사가 없는 충성, 감사가 없는 봉사를 생각해 보실 수 있어요? 그것은 형식과 위선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밑바탕에 감사가 기초되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신앙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별 의미를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은 감사를 명령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감사에 인색한지요. 2001년도 119 구급대에서 일년 동안 출동한 횟수가 29만 번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29만 번 정도를 출동해서 21만 명 이상을 긴급한 시간에 위급한 환자를 병원 응급실로 후송했다고 합니다. 죽어야될, 위험한 자리에서 119 구급대의 도움을 받고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받고 퇴원했던 사람들 중에 돌아와서 감사를 어떤 형식으로든지 표현했던 사람은 결코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몇 명쯤 되느냐? 백 명 속에 한 세 명쯤 된다고 합니다. 백 명중에 한 세 명만이 감사를 표현했지 그 다음에는 다 잊어버리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감사에 인색한 존재인가를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의도는 이제 너희가 감사를 훈련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사를 훈련해야 됩니다. "아이, 목사님 감사할 일이 있으면 감사하는 것이지, 뭐 감사를 억지로 합니까?"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당연히 감사해야 됩니다. 왜요? 이미 많은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다 감사하지요. 그러면 여러분, 은혜를 받지 못해서 감사하지 못합니까? 우리가 받은 은혜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부모님의 태에서 이 땅에 태어나 생명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날마다 돈도 내지 않고 맑은 공기를 마시고 있습니다. 이 모두 다 이 추운 겨울이 와도 따뜻한 태양을 비춰 주시는데 여러분, 난로 값을 내신 분이 있으세요? 우리는 다 거저 받았습니다. 그것이 다 은혜입니다. 감사의 조건입니다. 내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깨닫지 못해서 그렇지 이미 우리는 많은 것을 받았고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신앙적으로 감사를 훈련해야 됩니다. 감사가 체질화 되셔야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불평하는 것이 체질화가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늘 불평합니다. 어떤 사람은 남을 비판하는 것이 체질화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뭐만 보면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체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늘 어떤 일을 당해도 감사하는 체질이 있습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늘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감사는 훈련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을 지어 놓고 거기 머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감사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감사했을까요? 아마도 그들을 억압받던 애굽에서 인도하신 것을 감사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의식주를 제공해 주시고 양식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 앞에 그들은 감사하며 그 감사를 묵상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감사를 훈련해야 됩니다.

  몇 일 전에 인터넷 난 기사를 읽다보니까 재미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좀 남보다 특이하고 남이 못하는 것을 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기네스북에 올라간다고 하지요. 뭐 높이뛰기를 남보다 높이 뛴다던가 멀리뛰기 멀리 뛴다던가 불 속에 들어가서 몇 시간을 숨도 안 쉬고 견뎠다던가하면 기네스북에 올라갑니다. 이 기네스북 창간 50주년을 맞이하여 특집을 실었는데 거기에 세계에서 1위부터 10까지 죽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10위가 너무 재미있습니다. 그 그림을 보니까 사람의 눈이, 안구가 밖으로 돌출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사람이 안구를 돌출 시키는데 있어서 세계적인 기능 보유자라고 합니다. 정말 보니까 안구를 돌출 시켰는데 주먹만한 것이 두 개가 밖으로 나와있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쑤욱 집어넣으면 또 들어가고, 또 힘을 주면 저절로 툭 튀어나오고 하는 기술이 세계 1위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보니까 걱정도 되더라구요. 그것이 툭 튀어 나와서 땅바닥에 떨어져서 개가 주워 먹으면 어떡할 거예요? 그 사람은 그것을 연습하여 세계적인 기능 보유자가 되었습니다. 누구도 그 사람만큼 안구를 그렇게 많이 튀어나오게 할 수 없습니다. 참 별 밥 먹고 쓰잘데 없는 짓을 다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 글쎄 그걸 왜 연습해요? 그게 뭐 대단한 거라구 말입니다. 여러분, 남들은 쓰잘데 없는 안구 돌출을 위해서 일생을 연습하는데 우리는 신앙의 기본이 되는 감사를 훈련하고 감사를 연습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사는 습관입니다. 어떤 일을 당해도 "감사합니다" "실례합니다" 라고 하는 사람은 늘 그 말이 익숙해져 있습니다.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해도 감사가 먼저 튀어나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불평과 원망이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늘 감사가 충만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감사의 기쁨은 이웃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본문말씀 14-15절입니다.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 /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찌니라"

  감사절은 이미 받은 복에 대해서 감사하며 또 앞으로 복 주실 것을 기대하며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일년동안 많은 농사의 수확을 주셨어요. 그럼 감사하지요. 성경에 나오는 어떤 어리석은 부자는 어떠합니까? 일년 농사를 많이 지어서 창고에 쌓다 보니까 창고가 부족해서 더 큰 창고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이제 많은 양식을 쌓아 놓았으니 먹고 마시고 즐기자" 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뭐라고 그럽니까? "하나님께서 너의 영혼을 이 밤에 거두어 가시면 너의 쌓아놓은 재물은 모두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고 하십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이렇게 쌓아놓고 자기 혼자만 독식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년동안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햇빛을 주시고 맑은 공기를 주시고 적절한 기온을 주셔서 아름답게 농사가 되었다, 그러면 이 기쁨은 이웃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오늘 성경에 뭐라고 그러십니까?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또 객과 고아와 과부들, 네 가정으로부터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이 기쁨을 나누라" 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감사절은 이웃과 함께 나누는 절기입니다. 여러분, 늦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옵니다. 겨울이 되면 가난한 사람은 먹을 것이 없습니다. 농사를 지을 수도 없기에 그들에게 내가 수확한 것을 나누어주라는 것입니다. 그들도 굶어 죽지 않도록 나누어주어라, 그리고 그 수확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잔치를 베풀고 함께 음식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 신앙은 나 혼자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늘 가족과 함께 이웃과 함께 가난한 자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신앙이 기독교 신앙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감사절의 원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한국교회가 추수감사절 전통을 받아들이고 1912년 처음으로 감사절 예배를 드리고 나서 그 감사절 예배에서 얻어진 예물들과 그 헌금을 중국 산동성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에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가능한은 밖을 향해서 나누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그런 소박한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지금은 건축을 하느라고 정신이 없고 그럴 여유도 없지만 건축이 다 끝나고 교회가 좀 안정되면 우리가 맥추감사절과 추수감사절 헌금만은 교회 안에서 일원도 쓰지 말고 다 밖으로 내 보내서 선교사를 돕던가 양로원을 세운다든지 고아원을 돕든지 우리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에, 이웃과 함께 하는 일에 이 재물을 쓰면 좋겠다는 소망이 있습니다. 저는 언젠가 그 일이 현실로 이루어질 줄로도 믿습니다.

  감사절의 원 의미는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시골 교회 같은 경우는 뭐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리면 일년 예산의 절반이 들어온다고 합니다. 그러니 감사절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물론 도시교회는 이제 우리가 추수도 하지 않고 그러기 때문에 감사절 예산이라는 것이 그렇게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의 의미에 가깝게 본다면 이웃과 함께 나누는 감사절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많은 교회들이 감사절을 축제로 지키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을 초청해서 함께 음식을 나누고 함께 이 기쁨을 나누는 그런 절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감사의 기쁨은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정신입니다. 레위기 19장에 보면 "너희가 추수할 때에 곡식을 다 베지 말라 일부러 남겨 두라" 고 했습니다. 또 "땅에 떨어진 벼이삭을 줍지 말라"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그것을 주워서 연명해야되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의 열매를 딸 때는 그것을 다 송두리째 따지 말라 몇 송이는 남겨 두어라 지나가던 나그네가 배고프면 그것을 따먹고 연명할 것이 아니냐" 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정신은 관용이 있고 여유가 있습니다. 이웃을 늘 생각합니다. 너무 빡빡한 것...안 좋아요. 저는 그래서 늘 소망이 그런지 안 그런지 모르지만 교회에서 뭘 좀 할 때는 풍성했으면 좋겠습니다. 모자라는 것보다는 좀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좀 하나 가져가고 두 개를 가져가도 그래 괜찮다고. 그래, 필요하면 그 집은 애들이 많으니까 좀 하나 더 가져가라고 하는 이런 여유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자꾸 각박해져요. 더 가져가면 잡아채고 왜 가져가냐구 그럽니다. 식당에서 밥을 먹다 보면 어느 반찬이 맛있으면 하나 더 먹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왜 더 가져냐고, 집에서나 먹지라고 한다면 그것도 너무 그렇지 않습니까? 너무 세상이 각박한데 교회까지 각박해서야 되겠습니까? 국수를 삶아도 풍성하게 나누어야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여러분, 감사절은 이웃과 함께 나누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웃과 음식도 나누고 이 즐거움을 나누고 감사의 정을 나누는 것입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서 우리가 복음의 기쁨을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만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이웃에게도 복음을 증거해서 그들도 구원받은 자의 기쁨을 누리게 하는 거예요. 우리 예수님이 그랬잖아요. "밭이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이제 추수할 일꾼을 보내어 주소서" 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이 시대의 영적 추수꾼입니다. 감사절의 기쁨도 누리지만 우리가 이웃에게 복음도 증거하는 영적 추수꾼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감사의 예물은 힘대로 드려야 됩니다.

  본문말씀 16-17절 말씀입니다.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찌니라"

  이 모든 절기를 지킬 때는 '공수', 빈손으로 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릴 감사의 예물을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서 힘대로 물질을 드리라는 얘기입니다. 자, 여러분 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 이 감사의 예물을 드려야 될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그 나라의 왕을 뵈러 갈 때는 그냥 빈손으로 가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반드시 왕에게 드릴 진귀한 예물을 가지고 가서 왕을 뵙는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만 왕의 왕 아니십니까? 아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동방박사들이 예수님께 오면서 빈손으로 왔어요? 그렇지 않잖아요?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가지고 와서 아기 예수 앞에 드렸드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감사의 예물을 가지고 나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만 왕의 왕이심을 고백하는 표현이라고 여러분이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그 감사의 예물을 드릴 때 적당히 드리지 말고, 억지로 드리지 말고, 인색함으로 드리지 말고 힘껏 힘닿는 대로 최선을 다해 드리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에 사도 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 그랬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예물이 풍성하게 드려질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도 더 많은 복을 부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 이라는 책이 요즘 많이 읽히고 있는데 그 책의 주인공은 원형제라는 분입니다. 그분은 저하고 똑같은 58년 생인데 중국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예수님을 믿게 되고 그도 따라서 믿게 되었는데, 이 분은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아주 많이 받았습니다. 세 번이나 교도소에 갇히고 감옥에 갇혀서 고문을 받고 거반 죽을 지경까지 매를 맞던 그런 분입니다. 이 분이 세 번째 탈출할 때는 정말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 가운데 탈출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성령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서 자기의 등을 떠밀어서 밀어내는 것을 느꼈습니다. 탈출해야 된다는 뭔가 마음 속에서 음성을 듣게 되고 형제들로부터도 그런 언질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그 날 아침에 그냥 걸어가는데 아무도 자기를 막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 깊은 중국의 감옥에서부터 걸어서 나와서 대문을 열고 나오는데 아무도 그를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참 놀라운 일이지요. 마치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기적적으로 천사의 인도로 그 옥문을 열고 나오는 광경을 우리가 연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후 그가 서방 교회에 와서 중국의 실상들을 알리고 간증하는데 그 분이 서방교회의 예배에 참여하면서 많은 것을 느낀다고 합니다. 정말 예배당이 훌륭하고 서방사람들은 얼마나 다 잘 삽니까? 그런데, 하나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중국과의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서방교회 교인들은 헌금시간이 되어서 헌금을 드릴 때를 보면 두툼한 지갑을 꺼내어서는 가장 작은 액수의 돈을 끄집어내서 헌금을 드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분이 어떤 지역으로 선교하러 갑니다라고 광고를 하면 교인들이 그 분을 위해 헌금을 하는데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몽땅 털어서 노자로 쓰라고 그렇게 헌금을 드린다는 것입니다. 서방교회는 덩치는 커지지만 너무 인색하다고 그는 그렇게 글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어떻습니까? 우리의 감사생활이 대체 어느 정도 되느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물질생활이나 주변 여건은 많이 좋아졌지만 하나님 앞에 우리는 극히 인색하게 살 때가 없느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준비한 예물이 하나님 앞에 정말 합당한 예물인가 너무 인색한 예물이 아닌가, 초라한 예물은 아닌가 하고 우리 자신이 한 번 자신을 점검해보는 그런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진정한 감사란 환경에 구애받는 것이 아닙니다. 

  1979년 9월 15일 미국의 95번 고속도로 북쪽 햄프턴이라는 톨게이트 부근에서 대형 교통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교통체증이 아주 심했음에도 불구하고 18개의 바퀴가 달린 대형 트레일러를 운전하던 한 운전수가 어떤 의도였는지 톨게이트에서 주욱 줄을 서서 기다리는 6대의 차량과 추돌 사고를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추돌 사고를 당한 한 자가용 안에 소넨버그라는 한 일가가 타고 있었습니다. 마침 거기에 생후 20개월 된 조엘 소넨버그라는 어린아이가 타고 있었습니다. 추돌 사고가 일어나고 차에 불이 났습니다. 이 아이는 엄청난 화상을 입었는데 전신 85%의 3도 중화상을 입었습니다. 손가락 발가락이 전부 불에 타 없어져 버렸습니다. 코와 입과 귀와 눈꺼풀은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 조엘이라는 어린이는 어린 나이에 병원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습니다. 50여 차례의 수술을 받고 2년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조엘은 이런 장애인으로 성장하지만 그는 조금도 구김살이 없이 자랍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신앙이라는 버팀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히려 장애를 창조주의 선물이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발가락 손가락이 없었지만 다른 장애인들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그는 오히려 학교에 다닐 때 농구선수와 축구선수를 지냅니다. 손가락 발가락이 없는 농구선수 축구선수를 생각해보셨어요? 산악자전거와 클레이 사격에도 고수이기도 합니다. 고등학교 때는 전교 학생회장에 출마해서 당당히 당선이 된 일도 있다고 합니다.

  자, 그런데 이 불의의 교통사고를 일으킨 후에 그 트레일러 기사가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도트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18년 동안 숨어 살다가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법정에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가 다치고 이미 18년이 지났지요. 이 때 이 조엘의 가족이 법정에 출두해서 증언을 하게 됩니다. 조엘의 가족은 그 트레일러 기사를 향해서 "주님의 이름으로 당신을 용서합니다" 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조엘은 이 트레일러 기사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트씨, 저는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무한하다는 사실과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당신이 깨닫게 되기를 저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는 증오심으로 인생을 허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원망과 절망이 또 다른 고통을 낳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그는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감사하지 못하고 종종 얼마나 자주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나 나에게 불행을 안겨 준 사람들을 원망하며 증오하며 살아간 적은 없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누군가를 원망하며 증오하며 살기에는 너무 짧고 아까운 인생입니다. 감사하며 사랑하고 살기에도 부족한 인생인데 말입니다. 현재 26살의 청년인 조엘은 화상의 흔적이 남긴 참혹한 그의 외모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도 명랑하고 즐겁게 살고 있습니다. 어릴 때 엄마 손을 붙들고 시장에 가면 애들이 지나가면서 "어, 저 괴물 좀 봐, 코도 없네 귀도 없고, 괴물이야 괴물! 야, 너 가면 좀 벗어 봐!" 하는 이런 얘기도 수없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앙의 힘으로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지금 참 행복합니다" 하고 고백을 합니다. "나에게는 아직도 꿈이 있습니다. 내 생애에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미래의 꿈을 가지고 오늘도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한 감사란 삶의 여건이나 환경에서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조엘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를 깊이 묵상하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적으로도 이렇게 우리가 8년 동안 준비하고 기도해 왔던 성전건축을 시작하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도 잃어버린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얻어진 많은 것들도 있을 것입니다. 물질은 이렇지만 은혜를 얻었어요. 사업은 부도가 났지만 진정한 친구를 얻었어요. 집의 경제는 어려워졌지만 뜨거운 가족애를 느끼게 되었어요. 우린 잃는 것도 있지만 얻는 것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이미 주어진 은혜를 깊이 묵상하면서 날마다의 삶 속에 감사의 영이 충만한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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