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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보다 더 큰일도 하리라 (요 14: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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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영기 목사

2차 대전 당시 빅터 프랭클이라는 유대인 정신과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수년간 고생하다가 전쟁이 끝나면서 자유를 얻게 되었고, 자기가 수감되어 있는 동안 겪었던 많은 일들을 정신과 의사의 눈으로 분석하여 참 유익한 책을 썼습니다.
그가 수용소에 갖혀 있는 동안 함께 수감된 사람 가운데 국제적으로 꽤 알려진 어떤 작곡가 한 사람이 있었답니다.
어느 날, 그 작곡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보, 의사 양반. 내가 긴히 할 말이 있어요. 얼마 전에 아주 희한한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서 누군가 내게 다가오더니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알고 싶은 게 잇으면 무엇이든지 물러보라. 그러면 내가 다 대답해 줄게.’ 그래서 내가 이 전쟁이 언제 끝날지 가르쳐 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그는 1945년 3월 30일 날 끝날 거라고 대답했어요.”
이 말을 듣고 프랭클이 되물었습니다.
“언제 꾼 꿈입니까?”
“한 달 전 쯤입니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때는 1945년 3월 초였으니까 10여일만 있으면 전쟁이 끝나고 수용소의 철조망 문이 열리면서 그들은 자유를 얻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이 말을 하는 작곡가의 얼굴은 희ald의 빛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왠일인지 시간이 흐르고 흘러, 3월 말이 다가오는데도 수용소 문이 열린 것 같지 않았습니다. 물론, 1945년에 2차 대전이 끝난 것은 사실이지만, 수용소 안에서 볼 때는 도무지 이렇다 할 징조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작곡가의 마음이 자꾸 초조했습니다. 30일을 하루 앞둔 29일, 결국 사고가 나고 말았습니다. 그 작곡가가 갑자기 고열이 나더니 쓰러져 버린 겁니다. 그 다음날 그는 의식을 잃고 횡설수설 하다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병원에서 검사해 보니 발진티푸스가 원인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빅터 프랭클은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사람이 희망을 가지고 있을 때는 몸의 면역 기능이 활발하게 작동하기 때문에, 발진티푸스 균이 들어와도 그 균을 충분히 억제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작곡가의 경우, 30일이 다 돼어 가는데도 자기가 꿈에서 들은 그 말이 성취될 가망이 전혀 보이지 않자 절망에 빠진 것입니다.
“이제는 도대체 무엇을 믿고 기대하며 살 것인가?”
“이제는 정말 끝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근심과 불안이 그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고 말았던 겁니다. 그러자 몸 속에 있는 면역체의 기능이 완전히 힘을 잃어버려, 발진티푸스 균을 억제하지 못하고 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가끔 그런 것 봅니다. “살만 하니까” 아주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죽어라 하고 고생하며 살아다, 그러다 집이라도 마련하고 살만 하니까 덜컥 병이 들었다든지.... 하는 거 말입니다. 사람들이 그럽니다. “이제 살만하니까”
찢어지게 가난할 때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고자 하는 꿈이 있었습니다. 해야 한다는 희망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그것이 이제 이루어졌구나 하는 순간, 그 동안 그것을 이루기 위해 애쓰고 수고한 모든 것이 확 풀어진 몸에 병이 되는 것입ㄴ다.
그래서 사람은 생명 다하는 그 순간까지 꿈이 있어야 합니다. 희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주신 것은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늘의 별 땅의 티끌 같은 후손을 주겠다 하셨고,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이 땅을 다 너와 너의 후손에게 주겠다.”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그의 꿈이요 희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출애굽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그것은 하나님이 약속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꿈이요, 희망으로 삼은 사람들은 광야에서의 그 엄청난 어려움들을 이겨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희망하지 않는 사람들은 당장의 어려움에 불평하고 원망 하다가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글, “참 다운 행복은 우리들이 어떻게 끝맺느냐 보다 어떻게 시작하느냐에 달려있고, 무엇을 소유하느냐 보다 무엇을 바라느냐에 달려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꿈을 가지십시오. 희망을 가지십시오.
비록 내일 일을 예측하기도 힘든 세상이지만, 꿈이 있고, 희망이 있는 사람은 오늘의 어떤 환난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끝내 승리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떠날 때가 되신 예수님. 이제 곧 십자가를 향해 가실 예수님.
“나는 너희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하셨고, 그 말씀에 제자들은 근심과 공포와 낙담으로 앉아있습니다. 그 자리는 한숨과 탄식이 새어나오는 자리였습니다. 그 자리는 무겁고 침울한 자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제 너희는 내 아버지를 알고 있으며 그 분을 이미 보았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언제 예수님의 아버지를 보았다는 겁니까?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지만 한번도 예수님의 아버지를 본적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다면 더더구나 그 하나님을 언제 보았다는 겁니까?
빌립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다 함께 지냈는데도 너를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하고 말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자기의 일을 하신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내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 보다 더 큰일도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내가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 주겠다. 이것은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얼마나 희망이 되며, 이 얼마나 감격이 되는 말씀입니까?

보세요!
그 동안 함께 하시던 예수님께서 떠나신 답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여태 누굴 믿고, 누굴 따라 왔는데.... 예수님 아닙니까? 그런데 그 예수님이 떠나신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이 떠나시고 나면, 제자들은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만도 못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도대체 예수님은 어디로 가신다는건가?” 별의별 생각으로 우울하게 앉아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네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 보다 더 큰일도 할 것이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여러분도 할 수 있습니다. 아멘?
여러분도 예수님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습니다. 아멘?
입으로만 아멘 하지 마십시오. 이건 굉장한 겁니다.
보세요.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 보십시오. 병든 사람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죽은 사람도 살려 주셨습니다. 하늘의 복음을 들려주셔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새 생명을 얻고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영생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예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여러분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아니, 예수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믿습니까? 아멘?
아멘 하면서도 좀 그렇지요? 어떻게 죽은 사람 살려요? 어떻게 병든 사람 고쳐요? 어떻게 사람들에 영생을 주어요?
예수님의 제자들을 봅시다. 예수님은 팔레스타인 밖으로 나가신 일이 없습니다. 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자들 보십시오. 마태복음 28장 18절 이하의 말씀처럼 모든 족속으로 제자 삼았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의 말씀처럼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얼마나 굉장한 일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믿으신다면 이 예수님의 말씀에 여러분의 희망을 거십시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일도 할 것이다.” 이 말씀에 여러분의 희망을 거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먹고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만 걱정하며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6장의 예수님의 말씀과 연결해서 말씀드린다면,
“왜 너희가 염려하느냐?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것은 다 이방인 곧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이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걱정하고 염려하는 먹고, 마시고, 입고하는 것은 내가 다 알아서 해결해 준다. 그러므로 너희는 먹고, 마시고, 입고하는 것은 염려하지 말고, 큰 꿈을 가져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겠다는 큰 꿈을 가져라.“
그렇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 곧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예수님의 일이요, 예수님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큰일인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사는 것은, 태어났기에 어쩔 수 없이 사는 것 아닙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하루하루를 힘들게 보내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것은,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료하셨던 바로 그 일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로마서 14장 7-8절, “우리 가운데는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또 자기만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우리의 고백입니다.
우린, 예수 안 믿을 때는 나를 위해 살았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옛사람이 죽고 예수님과 함께 새 사람으로 태어난 후에는, “나를 위하여”는 십자가에서 죽고, 이제는 “주님을 위하여” 다시 살아난 사람이 바로 여러분과 저 입니다. 그래서 살아도 주님을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 죽습니다.

오늘 본문과 연결해 보면, “나는 살아도 주님이 하신 그 일을 하기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이 하신 그 일을 하기 위해 죽는다. 그러므로 내가 사나 죽으나 나는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 살고 죽는다.”
그러면 이마도 예수 믿는 믿음의 확신이 없는 사람은 이 말씀이 기분 나쁠겁니다. “그러면 난 뭐냐?” 싶을 겁니다. 사나 죽으나 주님을 위하는 거라면, 사나 죽으나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한 거라면 그러면 나는 뭐냐 싶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이 말씀이 오히려 힘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곧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가면 보혜사 성령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12절엔,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할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이 함께 하시면, 예수님께서 하신일도 할 수 있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큰일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숨어 있었지만,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거리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이심을 외쳤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고 구원 받았습니다.
성령의 사람이 아니면 주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사람이 아니면 나를 위하여 먹고 사는 것을 고민하며, 그것 때문에 애쓰는 삶을 삽니다. 이들은 결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람 곧 성령의 사람들은 먹고 사는 것 그 이상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며 살게 됩니다. 성령 곧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에 보면,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랬습니다.
여기 질그릇은 바로 우리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 인간은 질그릇 같다는 것입니다. 겉모습도 보잘 것 없고 쉽게 박살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안에 보물을 담고 있습니다.
그 보물이 무엇입니까?
6절, “어둠 속에 빛이 비쳐라 하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보물입니다.
그렇게 보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을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담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7절,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질그릇 같지만 우리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물이 있고, 이 보물 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나타나는 능력은 어떤 것입니까?
8-9절,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 받지 않으며, 꺼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질그릇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돌로 치거나 떨어뜨리기만해도 박살이 나는 것이 질그릇 입니다. 그런데 그 질그릇이 깨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떨어뜨려도 안 깨지고 돌로 쳐도 안 깨지고 집어 던져도 안 깨진다는 겁니다.
왜요? 그 안에 보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질그릇이지만 이젠 깨지는 것에 걱정 마십시오. 잘못해서 깨지면, 내 인생이 실패하면 어떻게 하나 두려워 마십시오. 여러분은 결코 깨지지 않습니다. 실패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생명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여러분의 삶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있습니다. 죽음조차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나 같은 것이 뭐라고 주님의 일 할 수 있나?”
“나 같은 것 무슨 큰 기대와 꿈을 가질 수 있나?”
“하루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데 어떻게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사람 많아요. 겉보기는 예수 믿는 사람 같은데. 속으로는 이런 콤플랙스로 가슴앓이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래서 무슨 일이든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겁니다. 무슨 일을 하려면 두렵고 겁부터 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도 그가 할 것이요. 그 보다 더 큰일도 할 것이다.”
“여러분 예수 믿으십니까?”
그러면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한 번 따라 하십시다.
“예수님을 믿는 나는, 주님께서 하신 일을 할 수 있다. 그 보다 더 큰일도 할 수 있다.” 아멘.
어떤 직업을 가졌든, 신분이 어떠하든, 얼마를 배웠든, 얼마를 가졌든, 그런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그 보다 더 큰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기가 죽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성령의 사람들입니다. 그야말로 나물 먹고 물마시고 거적때기를 두르고 살아도 기죽지 마십시오.
“너희는 내가 하는 일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일도 할 것이다.”
예수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목사의 기가 죽었는데 교회가 부흥이 됩니까? 기업가의 기가 죽었는데 기업이 잘 됩니까? 남편과 아내의 기가 죽었는데 가정의 행복하겠습니까? 기죽은 아이들이 어떻게 세상을 승리하며 살겠습니까?
요시야 임금. 그 할아버지 므낫세와 아버지 아몬은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철저하게 하나님을 떠나 악한 왕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태양신과 바알신이 판을 쳤습니다. 국민들 사이에는 빈부격차와 지역감정 등으로 인한 갈등이 심했습니다. 이런 때 왕위에 오른 요시야 임금은 겨우 여덟살입니다. 누구든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앞날이 캄캄한 겁니다. 저마다 어렵고 힘들어 절망의 한숨을 토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스바냐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스바냐3:16)
“두려워하지 말라.”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공동번역에는 “기운을 내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두려워 하십니까? 무엇이 그리 두렵습니까?
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삽니까?
왜 그렇게 슬퍼하십니까? 왜 그렇게 불가능하다고 말합니까?
왜 짜증내며 왜 불평하십니까?
용기를 내십시오. 힘을 내십시오.

여러분! 분명히 예수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그분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습니다.
열명의 사람들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 땅을 차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평하며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절망에 사로잡혀 밤새도록 울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외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그 땅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다만 여러분은 주님을 거역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 땅의 백성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그들의 방어력을 사라졌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민수기 14:8-9)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1960년대 초 미국에 등산하는 청년들 가운데 세계의 최고 높은 산인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하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몇 명의 청년들이 다시 정복하기로 결심하고 에베레스트 산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출발하기 직전 몇몇 심리학자들과 기자들이 이 젊음과 함께 인터뷰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이 산을 정복 할 수 있다고 믿습니까?”
첫 번째 청년이 대답하기를 “글쎄요.” 두 번째 청년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세 번째 청년은 “최선을 대해 보겠다.” 네 번째 청년은 “한번 해 보는 겁니다.” 다섯 번째 청년은 짐 위트카는 “나는 할 수 있습니다.”하고 대답합니다.
1963년 5월 1일, 네 명의 친구들의 목숨을 그 산길 차가운 얼음장 밑에 파묻고 위트카는 홀로 8,880m 에베레스트 정상에 미국의 성조기를 최초로 꽂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려와서 그는 외쳤습니다.
“나는 할 수 있습니다.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께서 주님을 믿는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일도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내가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 주겠다. 이것은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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