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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웃게 하시는 하나님 (창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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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이봉 목사 (상도교회)

□ 웃게 하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아브라함이 그 낳은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그 아들 이삭이 난지 팔일만에 그가 하나님의 명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낳을 때에 백세라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또 가로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 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 마는 아브라함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 (창 21:1-7)

미국 인디아나 주 <볼 메리> 병원에서 발표한 것을 보면, '웃음은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줄>의 양을 줄여주고 우리 몸에 유익한 엔돌핀을 많이 분비시켜서 15초를 웃으면 이틀을 더 산다'고 하였습니다. 웃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만병통치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에도 '항상 기뻐하라'고 하였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였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누구보다 웃으며 사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만일 믿는 사람의 얼굴에서 항상 근심의 그늘이 서려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란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삭의 출생에 관한 기록입니다.
'이삭'이란 이름의 글자 뜻이
'웃음'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사라가 이삭을 낳고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창21:6)고 하였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웃음을 가져왔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셨다'
'하나님이 내게 웃음을 주었다'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웃음을 가져다주었다'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이 웃게 하셔야 참된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1. 사라의 웃음이 우리에게 준 교훈이 매우 큽니다.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웃음이 점점 사라진 세상입니다.
간 곳 마다 경쟁에서 오는 갈등과 미움과 싸움 뿐인 세상입니다.
땅 덩어리는 좁고, 사람은 많으니 자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겠지만, 우리 사회에 경쟁이 없는 곳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심지어 휴게소의 화장실에서도 줄을 서야 하는 상태입니다.
아침마다 출퇴근하는 분들, 전철 안에서 부터 밀리고 밀면서 시달려야 하고, 직장 안에서도 서로 경쟁의 하루하루를 살아가다 보니, 언제 웃을 수 있는 기회가 다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편리한 세상에서 살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예전에 비하여 점점 각박해져 갑니다.
그래서 웃음을 잃은 사람들에게 웃게하는 직업까지 등장하였습니다. 요즘 교회에서도 웃기는 목사님들이 인기가 있다고 합니다.

사라는 웃음이 없는 사람의 대표자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잉태의 능력이 없어 항상 웃음 없는 하루 하루를 살았습니다.
창세기를 읽어보면 사라는 아브라함과 결혼하여 지내면서 그 몸에 혈육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조카 <롯>을 아들 삼아 함께 지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천사가 그에게 잉태의 예언을 하였습니다.
처음에 그 예언을 듣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내 나이가 이렇게 많은데 이제 무슨 잉태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면서 허탈한 웃음을 웃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그대로 이루어져, 오늘 사라는 진정한 웃음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사라의 웃음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매우 큽니다.

2. 사라의 웃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한 웃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기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기적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마른 뼈들에게도 부활의 능력을 불어 넣었습니다. 에스겔은 골짜기에 깡마른 해골들을 보았습니다.
이 해골들 위에 생기의 바람으로 들어가게 하시니 큰 군대를 일으키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마른 뼈들이 살아나겠습니까?

이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사라의 몸에서 잉태할 능력이 생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라 자신도 웃었다고 하였습니다.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로 단정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웃음을 잃은 사람에게 오늘도 하나님은 웃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에게는 지난 날의 웃음 없이 산 세월을 허무하게 여겨집니다. 
찬송가에도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 것은 지나고 새 사람이로다' 라는 찬송처럼 주님의 새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에게는 매일 매일 아침마다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살게 됩니다.
그것이 신비로운 웃음입니다.
사라의 웃음은 세상이 준 웃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웃음이었습니다.
오늘까지 이런 웃음을 체험한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지금 불가능처럼 여겨지는 환경에서 웃음을 잃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사라에게 웃음을 준 하나님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불가능한 조건이나, 환경이 되면 낙심부터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웃음을 웃게 합니다.
미국 신시내티에 있는 <프록터 갬블 비누회사>를 설립한 <할레이 프록터> 라는 사람은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회사가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십일조를 철저히 드리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직원 중에 한 사람이 비누 만드는 기계를 가동시키면서 규정된 시간보다 더 오래 가동시켜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기계에 있던 비누들은 전부 다 불량품이 되 버렸습니다.
꺼내서 보니까 비누가 물에 둥둥 떠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직원은 어쩔 줄을 모르고 당황했습니다. 회사가 큰 손해를 입게 되었으니까요. 이런 경우 보통 최고 책임자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화부터 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전해들은 <프록터> 사장은 화부터 내지 않고, 하나님 앞에 묵상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때 한 가지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목욕탕에서는 물에 뜨는 비누가 훨씬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엉뚱하게 만들어진 이 비누를 [아이보리]라는 이름으로 시장에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비누는 나오자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고, 마침내 그는 거부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아이보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비누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것에서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3. 사라의 웃음은 불신에서 참 웃음으로 바뀐 웃음이었습니다.
희브리어에는 웃음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처음 사라의 웃음과 같은 웃음을 <사하크>라고 하고,
나중 사라의 웃음과 같은 웃음을 <체호크>라고 합니다.
우리 사람들은 불신 중에 <사하크적 웃음>을 지을 때가 많습니다.
그와 같은 웃음으로 우리 말로는 조소(嘲笑), 냉소(冷笑), 고소(苦笑)란 말이 있습니다. 활짝 웃는 기쁨의 웃음이 있는가 하면, 마지못해 짓는 쓴 웃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쓴 웃음을 참 웃음으로 바꾸어 놓으시는 분입니다.

처음 잉태의 예고를 들었을 때 사라의 웃음은 불신의 웃음이었습니다. '내게 무슨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라는 고소(苦笑)의 웃음이었습니다. 요즘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 이런 웃음을 짓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말에 '웃기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거의 믿을 수 없을 때 하는 말입니다.
사라의 처음 웃음은 '그렇게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마는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는가?'라는 냉소(冷笑)의 웃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웃음은 진정한 기쁨의 웃음이었습니다.

냉소와 고소가 변하여 진정한 웃음으로 변한 것이 사라의 웃음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사라의 웃음이 하나님께로 부터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에게 쓴 웃음을 참 웃음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의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께 우리 모두 사라와 같이 불가능에서 가능으로, 불신에서 참된 신앙으로 웃을 수 있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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