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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의 감사 (골 1: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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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노강국 목사

대만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어떤 대학 교수의 이야기입니다. 어려서부터 열심히 공부하여 유학도 다녀오고 대학교수가 된 사람이 있었답니다. 모든 일에 부족함 없이 잘 살 수 있는 조건이 다 갖추어졌지만, 한 가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일 때문에 늘 아쉬운 마음으로 살았답니다. 그것은 바로 결혼이었습니다. 결혼을 자기 마음에 드는 여성과 한 것이 아니라, 어려서 부모들끼리 합의해서 한 결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색시가 마음에 들었으면 괜찮았는데, 마음씨나 덕성은 그런대로 괜찮은 듯싶은데, 얼굴이 영 마음에 안 들었다는 것입니다. 헤어지고 싶은 마음도 많이 있었지만, 교수라고 하는 사회적인 체면도 있고 해서 그러지는 못하고 그런대로 자식 낳고 살았답니다. 물론 아내를 사랑한다는 감정은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이 대학교수에게, 큰 딸이 대학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을 즈음, 중년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눈이 침침해지면서 점점 가물가물해지더니 잘 보이지 않게 되더랍니다. 병원에 가보니, 의사가 하는 말이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될 것 같다고 하면서 방법이라곤 다른 사람의 성한 눈을 이식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허탈하고 절망적인 마음을 가지고 집에 왔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가족들과 나누는 이 대학교수는 스스로 자기 인생을 원망하고 한탄하기 시작하며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받아보니 누군가가 안구를 기증했다고 하면서, 어서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당장 가서 입원하여 눈 이식 수술을 마쳤습니다. 비록 한쪽이지만 보게 된 것을 감사하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와서 “누군가가 이렇게 눈을 기증해 주어서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하면서 누군지는 모르는 그 사람에게 감사의 말을 하면서, 식구들이 축하해 주기를 바랬습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아내는 머리를 숙이고는 참으로 잘 된 일이라고 말하고는 뒤로 돌아서 나가더라는 것입니다. 이 때, 큰 딸이 훌쩍훌쩍 울면서 말하더랍니다. “그 눈은 어머니 눈입니다.”

이 때, 이 대학교수는 아내를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게 되면서 이제껏 한번도 부르지 않았던 아내의 이름을 부르면서 껴안고 포옹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제까지 자기 눈으로는 아내의 사랑을 보지 못하고, 아내의 못 생긴 얼굴만 보았었는데, 이제 아내의 눈으로 아내를 보니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떤 눈으로 봅니까?

1. “교회”라고 하는 눈으로 봅니다.

교회를 통해서 예수를 보니 때로는 마음에 안 듭니다. 우리 교회는 또한 작은 교회라 교회의 부족한 모습이 많이 있습니다. 혹 대도시나 한국의 큰 교회에 나간다면 조금은 달라 보일지 모르겠지만, 우리처럼 작은 교회에서 서로 부대끼는 가운데서 예수를 보니, 그 예수님도 때로는 볼품없이 보입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를 통해 예수님을 보면 말 많은 예수로, 문제투성이의 예수로 보일 것입니다.

2. 다른 사람의 눈으로 봅니다.

“저 사람, 교회 다닌다는데 왜 저래?”
“저 사람, 집사라면서 왜 저 모양이지?”
“저 사람, 예수 믿은 지 꽤 오래 되는데도 아직도 저래?”
“저 목사는 왜 늘 그 모양이야?”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눈을 통해 예수를 보면 그 예수라는 분은 지극히 볼품없어 집니다. 예수란 그저 하나의 명목이나 장신구에 불과한 모습으로 밖에는 여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통해 보는 예수 - 멋없는 예수요, 닮고 싶지 않은 그리고 그렇게 믿고 싶은 마음이 안 드는 예수이기 십상입니다.

3. 나 자신의 눈을 통해 봅니다.

때로는 “나 같은 죄인도 사랑해 주시는 예수님”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나 한 사람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무력한 예수님으로 볼 때도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오래 믿었는데, 왜 나는 복을 받지 못할까?” “왜 나는 나의 고질적인 단점들을 아직도 그대로 지니고 있을까?”, “왜 나는 변화되고 싶은데, 변화되지 못할까?” 하면서도 그 심중에 이르기를, “예수님은 과연 나 한사람도 제대로 변화시키지 못하는가?” 하는 원망의 소리도 해 보곤 합니다.

나를 통해 보는 예수 - 지극히 미약하고, 변덕스러운 예수일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를 통해서, 다른 믿는 사람을 통해서, 아니면 나 자신을 통해서 예수를 본다면 그 보는 그릇만큼 예수를 보게 되고, 알게 되고, 믿게 됩니다. 예수님의 형제 부모도 처음에는 예수를 그런 눈으로만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보고 “미쳤다”고 하기도 했고, “이젠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다니는 교회도 자랑할 만큼 크기도 하고, 믿는 사람들도 기대 이상으로 아주 모범적이고, 나 자신 또한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신앙생활 잘 해야만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도 대접을 잘 받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는 쉽지 않은 모습입니다. 아니, 어쩌면 불가능한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예수님을 보는 우리의 눈을 바꿔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예수를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예수를 볼 때, 그 예수는 대단한 예수입니다. 우리가 가까이 갈 수 없는 분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감히 이러한 예수님을 “예수, 예수” 하고 함부로 부를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동네로 가시다가 한 우물가에서 쉬신 일이 있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여인이 와서 물을 긷길래, “물 좀 달라”고 청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왜 유대인이면서 사마리아 사람인 내게 ‘물 좀 달라’고 하십니까?” 하고 되물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누군 줄 네가 알았다면 네가 오히려 내게 구했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가 누군 줄 모릅니다. 안다고 하지만 제한된 모습 밖에는 모릅니다. 그저 명목적으로나 교리적으로 조금 아는 것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에게 하나님의 눈이 없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본 모습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눈으로 본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15~20절이 바로 하나님의 눈으로 본 예수 바로, 그 모습입니다.

“그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 만물이 그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왕권이나 주권이나 권력이나 권세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는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은 그의 안에서 존속합니다. 그는 그의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는 근원이시요, 죽은 사람 가운데서 맨 먼저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이렇게 살아나심은, 그가 만물 가운데서 으뜸이 되시려고 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모든 충만함을 머물게 하시기를 기뻐하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셔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기쁘게 자기와 화해시키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에게까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살아갈 때에는 이러한 위대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분이 누군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우리가 지니게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12절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빛 가운데 있는 성도들이 받을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여러분에게 주신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성도로서의 감사를 드리게 되는 이번 감사절이 되도록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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