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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사 입니까, 원망 입니까? (시 75:1~3, 고전 1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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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성희 담임 목사
 
  또 다시 감사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감사주일뿐만 아니라 매일 매주의 삶이 감사가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감사와 원망이 항상 교차되는 인간사를 살고 있습니다. 감사와 원망은 항상 공존하는 인간의 감정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사 찬송보다 원망 소리가 더 높았습니다. “죽을 데가 없어서 우리를 이곳까지 이끌고 왔느냐”?그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원망을 퍼부었습니다. 감사의 찬송은 원망의 소리와 함께 하지 못합니다.

  감사주일의 기원도 그렇습니다. 핍박을 받은 청교도들은 고향을 버리고 생면부지의 땅 아메리카를 찾아옵니다. 그들에게 불평할 것, 원망스러운 것을 열거하면 한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 많은 것을 열거하면 감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 잘 믿으려다가 고향 버리고 쫓겨왔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습니까? 배타고 오다가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바다를 원망할 수 있겠습니까? 새로운 땅에 도착하여 인디언에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죽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살자고 온 것인데 오자마자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척박한 땅을 일구느라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첫해 생각보다 적은 수확을 했을 것입니다. 이런 열악한 조건은 그들에게 감사치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감사의 조건을 찾았습니다. 자유의 땅에 와서 예수를 마음대로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 심한 풍랑 가운데서도 살아남았습니다. 인디언에게 씨앗을 얻었습니다. 척박한 땅에서도 수확을 주셨습니다. 생각보다 풍성한 열매를 가지고 그들은 감사드렸습니다.

  어떤 이가 말했습니다. “제일 가르치기 어려운 수학문제는 우리가 받은 축복을 세어보는 문제이다”. 정말 그렇습니다. 복을 세어보는 것은 항상 어렵습니다. 찬송가에는 “주신 복을 세어 보아라”고 합니다. 복을 셀 수 있고, 감사를 셀 수 있는 것이 지혜입니다.
  성경은 소극적인 계명과 적극적인 계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감사는 적극적인 계명입니다. “감사하라”고 합니다. 시편 92:1에는 “여호와께 감사하라”고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8에는 “범사에 감사하라”고 합니다. 어디에나 감사는 적극적인 계명입니다.
  골로새서 3:5-11에는 새로운 삶의 소극적 측면을 얘기합니다.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3:12-17에는 새로운 삶의 적극적 측면을 말합니다. “감사하라”, “감사하는 자가 되라”, “감사함으로” 등으로 권하고 있습니다.
  감사는 신구약 성경에 180번 나오는 빈번한 단어입니다. 이 말이 우리의 삶에서 중요하기에 강조하고 생활에서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반면에 알면서 못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성경에는 다른 경전과 달리 감사란 말이 많습니다. 기독교는 감사의 종교라고 합니다. 감사란 은혜를 받은 자가 은혜를 베푼 자에게 고마움을 보답하는 뜻으로 마음과 행동, 그리고 입술로 표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미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은 우리는 누구보다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주일에 다시 한번 감사의 의미를 새겨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감사는 초점이 달라질 때 가능합니다.

  감사는 우리의 초점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초점을 잘 맞추어야 합니다. 초점이 맞지 않으면 그림이 흐릿합니다. 또 요즘은 TV에서 사람의 얼 굴 등을 가리기 위하여 모자익 처리합니다. 초점을 잘 맞추고 모자익 처리하지 않으면 또렷이 보이고 감사가 확실합니다.
  초점이 맞아 분명해지면 감사가 넘칩니다. 초점이 맞지 않으면 흐릿하여 감사가 없습니다. 우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Focus on God). 성경은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춥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래야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 편에서 내 일을 보면 감사가 넘칩니다. 내 편에서 하나님의 일을 보면 불평이 넘칩니다.

  둘째는 우리가 가진 것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Focus on What We Have). 예수님은 어린이의 도시락인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도 감사했습니다. 그 까짓것을 가지고 감사기도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감사할 때에 기적은 나타났습니다. 남의 것에 관심을 가지면 불평이 넘칩니다. 소유는 우리를 지체 높은 괴물로 만드는 일종의 독입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인정하게 되면 물질에 대한 태도가 달라집니다. “내 소유 가운데 얼마를 하나님께 드려야 할까?” 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 가운데 내가 얼마를 사용해야 할까?”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존 웨슬리는 자기 집이 화재로 잿더미가 되어 어떤 사람이 와서 불난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그 대 “주님의 집이 불 탔구나”라고 했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자기의 것을 가지고도 평생 다 못 쓰는 사람들입니다.

  셋째는 미래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Focus on Future). 인간은 소망의 존재입니다. 미래의 존재입니다. 미래에 소망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피아닌이란 분은 “세가지만 있으면 원망할 자격이 없다. 한끼 음식, 건강, 소망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감사 생활의 실천의 한 방법은 열망하는 좋은 일이 실제로 일어나기 전에 미리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선불감사라고 합니다. 어떤 유대인은 “하나님, 이번에 꼭 복권에 대박이 터지게 해주십시오. 제가 십일조를 미리 내겠습니다”라고 했답니다. 예수님도 나사로를 살리러 가셨을 때에 무덤 앞에서 말씀합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요11:41). 그리고 또 말씀을 들으실 것을 미리 감사하셨습니다.

  넷째는 하나님의 약속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Focus on the Promise).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은 실재입니다.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 때 잔과 떡을 들으시고 감사기도를 드리셨습니다(눅22:17-19). 약속의 실현입니다.

  다섯째는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존재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Focus on Being not Having). 가진 것이 없어도 존재 그 자체가 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전도한 마을이 회개하지 않음을 개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한탄이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에까지 부어집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1:25에는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하나님의 감사는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마르틴 바텐이란 독일 재무장관을 지냈던 분이 여행중 분실한 구두 때문에 불평하였습니다. 그런데 길을 가다가 발목이 없는 사람이 감사하는 것을 보며 자기 삶의 기준을 바꾸었습니다. 다 떨어진 신발이라도 신을 수 있는 발목을 가진 것을 감사하였습니다.

둘째, 원망은 멸망을 가져옵니다.

  고린도전서 10:10에는 말합니다. “그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감사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원망 혹은 불평입니까? 감사의 반대말 중 좋은게 하나도 없습니다. 감사의 반대는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왜 타락했습니까? 사탄이 원망과 불평을 심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선악과를 못먹게 한 것은 하나님이 샘이 나서 먹지 못하게 한다고 하와를 꼬득였습니다. 결국 하와가 불평하게 하였습니다. 불평이 결국 반역죄를 일으켰습니다. 인류 최초의 사람을 타락하여 에덴에서 쫓겨나게 만든 것입니다.

  출애굽의 축복을 원망과 바꾼 백성들을 보세요.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원망이 악함을 보셨습니다. 성경의 많은 구절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에 대한 원망은 결국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불뱀에 물려 죽게 했습니다. 원망은 가나안과는 멀어집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사람의 자격은 감사입니다. 가나안은 감사하는 자의 땅입니다. 원망하는 자는 출입금지인 곳입니다.

  토마스 머턴은 “감사와 배은망덕 사이의 중립적 입장은 없다. 감사하지 않는 이들은 곧 모든 것을 불평하기 시작한다. 사랑하지 않는 이들은 미워한다”고 하였습니다. 욥기 1:22에 보세요.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은 극도로 어려운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감사는 생각의 방향을 바로 잡아야 가능합니다. 방향이 잘못되면 원망이 나옵니다. 원망은 나쁜 습관입니다.

  한 교회를 섬기는 두 사람이 서로 미워하는 것을 본 천사는 안타까워했습니다. 천사는 이 두 사람에게 제안을 하였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기도하면 옆사람이 두배를 받도록 합시다” 옆사람 때문에 두배의 감사를 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내게 100억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더니 옆 사람이 200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이 두배나 많은 돈을 가지게 되니 시기가 나서 이번에는 “천사님, 100원만 주세요”하고 기도했더니 옆에 있던 친구는 200원을 받았습니다. 옆에 있던 친구가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하면서 “천사님, 제 한쪽 눈을 뽑아주십시오”라고 했답니다.

  루터는 “마귀의 세계는 감사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원망은 망국 백성의 근성”이란 말이 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죄중의 죄는 감사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톨스토이는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젊어진다”고 하였습니다. 골프의 황제라고 하는 잭 니클라우스는 “감사합니다”란 말을 많이 하기로 유명했습니다. 감사해서 손해 본 사람 봤어요? 감사해서 손해 본 사람은 없습니다.

  원망은 그 자체가 참 미련스런 일입니다. 잠언 19:3에는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 원망하느니라”고 합니다. 미련하기 때문에 원망합니다.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감사할 줄 압니다.

셋째, 결국 감사와 원망은 믿음의 차이입니다.

  “교양인과 야만인의 차이는 감사할 줄 아느냐 감사할 줄 모르느냐에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구약 절기에는 구속을 기념하는 유월절과, 봄에 뿌린 밀을 수확하는 칠칠절과 한해의 열매를 수확하는 초막절이 있습니다. 이 세 절기가 모두 감사와 연관된 절기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도 감사했습니다. 매를 맞아도 감사했습니다. 주님을 위해 매 맞을 수 있으면 영광입니다.

  감사는 믿음의 완성입니다. 감사는 구원의 완성입니다. 감사는 병을 고칩니다. 감사는 변화시킵니다. 감사는 비로소 완성시킵니다. 감사를 모르는 인생은 아직 미완성입니다. 예수님께 왔다 나음받은 10명의 나환자가 있었습니다. 이 중 9명은 제사장에게 가서 얼른 자신의 병이 나은 것을 판결받고 싶었습니다. 너무 바빠서 감사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나병은 낫고 더 큰 병에 걸린 것입니다. 감사를 모르는 병입니다.

  탈무드에는 “참으로 지혜로운 자는 모든 경우에 있어서 배우는 사람이고, 참으로 강한 자는 자신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며, 정말 부자는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다”라고 합니다. 감사는 지혜로운 자가 합니다. 지혜로운 자는 감사가 무엇인지 압니다.

  감사하는 태도는 세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감사는 그 사람의 신앙상태이며 그 사람의 인격입니다. 첫째는 감사해야 할 일이 있는데 감사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둘째는 감사할 일이 있을 때만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감사할 만한 일이 없는데도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하박국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침공을 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온 백성들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농사도 망쳤습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합니다.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습니다.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습니다. 밭에 먹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 양이 없습니다. 외양간에 소가 없습니다. 그가 말하고 있는 것들은 가정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만약 없다면”이 아니라 “현재 없지만”입니다. 그런데 그는 말합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요즘 얼마나 힘드세요? 잘 되는 사업이 없다고 합니다. 내년에는 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달러의 환율이 낮아져서 수출도 비상입니다. 얼마전에는 자영업자들이 데모를 하였습니다. 자영업자들이 집단으로 시위하기는 세계 최초라고 합니다. 식당주인들이 냄비를 던지는 광경은 처음입니다. 군인들이 총을 내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때에 감사할 일 있을까요? 사방을 둘러봐도 빛이 보이지 않고, 감사할 만한 조건이 없을 때에 하나님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진짜 감사입니다.

  시편 100편에는 말합니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찌어다”. 감사하면서 문에 들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집의 문입니다. 교회는 감사하는 자가 들어오는 곳입니다. 교회의 문은 감사의 문이어야 합니다. 찬송하면서 궁정에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궁정에는 찬송하는 자가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 교회에 들어오신 여러분도 감사하는 자들이기를 바랍니다.

  느헤미야 12:31, 38, 40에는 “감사 찬송하는 자”라는 말이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감사 찬송이란 찬송은 곧 감사란 말입니다. 감사는 곧 찬송이라는 말입니다. 당시의 예루살렘의 형편은 문자 그대로 형편없었습니다. 성은 무너지고, 성전은 파괴되고, 경제가 어려워 성벽 재건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감사 찬송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불평찬송 봤습니까? 원망찬송 있습니까? 찬송은 불평이 없습니다. 가요에는 “어머니 왜 나를 나셨나요?”, “나는 어떡하라고” 이런데 있지만 찬송에는 없습니다. 찬송은 원망이 없습니다. 찬송은 감사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찬송하는 자는 감사하는 자이고 믿음의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가 감사 찬송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 찬송이 풍성할 때에 감사의 조건도 많아질 것입니다.

결론

  미국의 대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매일 아침 스스로 세 가지 질문을 하라고 합니다. 첫째, 내가 즐거워하는 일은 무엇인가? 둘째, 내가 무엇에 행복해 할 수 있을까? 셋째, 내가 감사하는 일은 무엇인가? 즐거움을 찾으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행복을 찾으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감사를 찾으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감사할 때 원망과 불평은 사라집니다.

  날마다 감사를 찾고,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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