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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간관계를 통한 하나님의 손길 (삼상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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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황요한 목사

오늘은 ‘인간관계를 통한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는 줄 믿습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헌신적인 사람, 기도하는 사람, 하나님의 영에 충만한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일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는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다양한 수백명의 임원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이 세우셨고,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하는 그 분명한 주님의 요청에 성실하게 응답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저녁 예배 시간에는 새해에 일하실 여선교회 회장들이 발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일을 맡으실는지, 누구에게 맡기시든지, 중요한 것은 바로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을 때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준비해야 합니다. 기도로 준비해야 되겠고, 말씀으로 준비해야 되겠고, 하나님이 우리를 쓰시도록 우리가 그릇을 만든 토기장이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만들었느냐고, 이런 종류로 만들었냐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쓰임에 합당하도록 깨끗하게 준비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를 이렇게 쓰시던지, 저렇게 쓰시던지 내가 준비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늘 주님 앞으로 기도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준비된 그릇으로, 합당한 그릇으로 우리가 늘 주님 앞에 서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늘 주님 앞에 서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수요일부터 열흘간 특별새벽기도회가 시작됩니다. 2005년을 준비하면서 우리가 기도로 준비하자는 것입니다. 다음 주일 저녁부터 수요일까지는 부흥성회가 시작됩니다. 말씀으로 새해를 준비하자는 것입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새해를 준비할 때 우리에게 어떤 것도 걸림돌이 다 무너질 줄로 믿습니다. 우리 앞에 어떤 장애와 장벽들도 기도와 말씀이 다 무너질 줄로 믿습니다.

공문에 있었던 빌립보 감옥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와 찬송을 하면서 옥문이 열려지는 역사가 있었던 것처럼 이번 특별새벽기도회와 말씀부흥회를 통해서 여러분의 심령 속에 하나님 앞에 좀 더 다가가지 못했던 세상적이고 육적인 것들, 여러 제약된 장애와 제약된 요소들, 깨어지고 무너지고, 열려지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들을 준비만 하시고, 기도할 준비만 하신다면, 여러분들에게 성령이 폭포수와 같이 여러분에게 광야에 풍성한 식탁을 제공하셨던 만나가 여러분에게 임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간관계를 통해서 주님의 역사를 이루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줄 믿습니다.

저는 오늘 인간관계라는 대조를 통해서 두 관계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첫째는 다윗과 요나단의 인간관계입니다. 1절과 3절을 보면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는 얼마나 깊고 놀라운 관계였는지,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관계입니다. 거듭 거듭 그들은 반복해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요나단을 자기 생명 같이 존중하고 사랑하였다고 했습니다.

저는 다윗과 요나단이 이렇게 가까운 관계가 되기까지의 어떤 배경이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 사람은 왕의 아들입니다. 장차 왕이 될 사람입니다. 왕자지요? 한 사람은 목동입니다. 바로 직전까지, 블레셋과의 싸움 직전까지 목동으로 있었던 그러한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왕궁에서, 한 사람은 목장, 배경으로 보면 친구가 되기 어려운 관계입니다.

사회적인 지위로 보아도 친구가 되기 어려운 관계입니다. 그런데 다윗과 요나단은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고 존중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저는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런 관계가 만들었는지 성경을 통해서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해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역사관이 같았고, 그들은 무엇보다도 신앙관이 같았다고 하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역사관, 이 나라가, 이 세계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를 신앙고백 적으로 본다는 거지요.

여러분, 이 대한민국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여러분들 어떤 눈으로 바라보십니까? 민족사관으로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뜻으로 보는 우리 한국사 같은 좀 더 다른 각도에서 이 한국의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 대부분의 역사관들은 일본시대, 일본 역사관에 훈련된 학자들에 의해서 쓰여진 그런 내용이 되어서 우리의 역사관이 상당히 왜곡되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도 이씨 조선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씨라고 하는 한 가정, 한 가문의 나라라고 폄하했습니다. 마치 블레셋의 골리앗이 이스라엘의 군대를 사울의 군대라고 폄하한 것과 같았어요. 그러나 다윗은 골리앗에게 이야기하면서 정정하지요? 하나님의 군대라고 정정하고 있습니다. 일제시대에 민족 사관을 가졌던 학자들은 조선시대를 이씨조선이라고 했어요. 우리 시대에 국사를 공부하면서 우리는 이씨조선이라고 배워서 이씨조선, 이씨조선이 입에 뱄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젊은 학자들이 그건 아니다, 이씨조선이 아니다. 그것은 일본인들이 한국의 왕조를 낮추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한 역사다. 그래서 이씨조선이라고 조선왕국이라고 하는 분명한 정체를 가르치기를 시작을 했습니다. 지금도 연세가 높으신 분들은 이씨조선이라는 말이 습관이 되어있고, 그렇게 훈련이 되어져 있습니다.

세상을 보는, 역사를 보는 눈도 중요합니다. 저는 우리 평안의 성도들이 이 역사의식도 뚜렷하고 분명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 역사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역사라는 사실을 우리가 고백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요나단은 14장 6절에서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요나단이 병기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이것이 요나단의 역사관이자 신앙관입니다.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로 우리가 들어가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일하실 것이다. 확실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서 우리로 하여금 승리하게 하실 것이다. 여호와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군대의 수가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아주 분명한 고백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7장 47절에 가보면 다윗이 골리앗 앞에 하는 고백을 보면서 우리는 다윗의 역사관과 신앙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가로되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니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부치시리라. 이 고백 속에 다윗의 역사관과 신앙관을 우리는 잘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도와 대화를 통해서 그 사람의 역사관과 그 사회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 사람의 신앙의 정도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의 신앙이 옅은지, 이 사람의 신앙이 깊은지, 이 사람이 부정적인 사람인지, 이 사람이 긍정적인 사람인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경솔한 사람인지, 신중한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요나단과 다윗은 이런 신앙고백을 통해서 하나가 될 수 밖에 없는 신앙적인 일치의 그런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만남은 감동적인 만남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평안의교회라고 하는 그런 공동체 안에 있지만, 모두가 같지는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다윗과 요나단과 같은 그런 신앙적인 고백을 통해서 당신과 내가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사람 앞에 자기 생명 같이 아끼고 존중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관계가 성도들간에 맺어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비슷한 사람끼리 맺어지겠지요. 한 사람은 주일이 되면 어디 재미있는데 없나? 어디 백화점 세일하는데 없나? 어디 영화관 개봉하는데 없나? 오늘은 친구가 날 안 불러내나? 그리고 기다리다가 10시 50분까지 그런 일이 없으면, ‘에이 교회나 가야지.’ 그리고 그냥 10분 늦게 들어오는 사람과 한 주일 내내 주일을 사모하고 기다리면서 목욕을 하면서 예배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와이셔츠를 다려 입어도 주일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사모해서 예배 전에 나와서 성전에 내가 돌볼 부분이 없는가를 생각하는 사람과 죄송하지만 하늘과 땅차이겠지요.

그런 사람은 서로 친구 사이가 좋은 교우 사이가 될 수 없을 거예요. 서로 친구가 되라고 붙여놔도 안 될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어떻게 하면 방언을 받을까? 어떻게 하면 은사를 받을 수 있을까? 사모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끼리 삼삼오오 그룹이 됩니다.

어떻게 하면 전도를 잘 할 수 있을까? 작년에는 한 사람 밖에 못 했는데, 올해는 그래도 두 사람은 해야 할 텐데, 그런 사모함을 가진 전도의 사모함을 가지는 사람들끼리 하나가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교회에서 봉사하며 섬길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끼리 가까워집니다.

그냥 앉으면 목사 비판하고, 그저 앉으면 교회 비판하는 사람은 이상하게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져요.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무슨 자석의 플러스 마이너스처럼 그런 사람들끼리 끼리끼리 모여져요.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발견하는 일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있어요. 봉사하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과 가깝습니다. 어떻게 하면 목욕봉사할까? 어떻게 하면 무료급식 하는데 봉사할까? 어떻게 하면 거리청소하는데 봉사할까? 봉사하는데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습니다.

사실 목사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많이 없어요. 왜냐하면 제가 부족한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소중한 시간에 그런 일이 쓴다고 하는 일이 얼마나 아까운 일입니까? 모르겠습니다. 이따가 제가 물어볼 것인데, 1부시간에 제가 성경을 다 읽은 분 손 들라고 하니까 지난 주보다 갑절을 들었어요. 감사했습니다. 지난주에는 손 드신 분들이 많지 않아서 한 주간 더 기회를 드렸는데, 사무엘상과 고린도전서를 절반 이상이 더 손을 드셨더라구요.

여러분들도 제가 예배 후에 물어볼 것입니다. 다는 기대하지 않아요. 한 사람이상이라도, 목회자는 성도들이 말씀을 통해서 살기를 원하는 그 응답이 된 사람들은 한 주간동안이라도 말씀을 읽었을 거예요. 사실 그 말씀은 한 번 읽는데 한 나절 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지난 주 동안 성경을 읽는데 한 나절, 몇 시간도 투자를 안 하셨다고 하는 것은 여러분, 그 많은 시간들 아깝지 않습니까?

주님이 많은 시간을 주셨는데, 그 많은 시간을 읽고, 그 은혜 받는 시간에 단 몇 시간도 쓰지 않았다는 것이 아깝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신앙이 같은 사람들이 가까워 지기 마련입니다. 결국 다윗과 요나단도 각각의 삶도 살았고, 사회적으로는, 신분적으로는 가까워 질 수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이 신앙관과 그들의 삶을 통해서 하나가 될 수 밖에 없는 그런 좋은 감동적인 만남을 이룬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는 다윗과 사울의 관계입니다. 1절에서 5절까지 보면, 그 분위기는 너무나도 화기애애합니다. 인정해 주는 그런 분위기입니다. 축복해 주고 축복 받는 분위기입니다. 요나단이 사울왕에게 블레셋 골리앗을 죽였는지를 설명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 저녁에 골든벨 성경퀴즈대회에 관심이 많아요. 그런데 궁금한게 많은가 봐요.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것은 어떻게 죽인 것인가요? 무엇을 물어보는지 그런 느낌이 있어서 성도들이 질문 하는 것 같아요. 성경 읽는 그대로입니다. 다윗이 물매에 돌을 담아서 골리앗을 향해서 돌을 던졌을 때, 골리앗의 이마에 돌을 맞고 쓰러졌어요. 물매에 맞고 죽은 것은 아니지요.

물매에 맞고 쓰러졌습니다. 다윗의 손에 칼이 없었던 건고로 다윗이 달려가서 골리앗의 그 큰 칼을 빼어서 골리앗의 목을 베었다고 그랬습니다. 죽인 것은 골리앗의 칼로 죽인 것입니다. 성경 있는 그래도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 조금 깊이 정확하게 해야할 부분들이 있는 것을 제가 발견했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다윗과 사울의 관계에서 그런 다윗의 좋은 모습들이 사울왕에게 소개가 되어졌을 때,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쳤을 때, 옆에서 듣고 있던 요나단의 마음에 감동이 생겼어요.

사울왕도 그 소식을 듣고 얼마나 감동을 받고 기뻐했는지, 그 날 이후로 다윗을 집에 가지 않게 했어요. 사실 그 전에는 다윗이 사울왕이 심적으로 우울하고 병이 들면 다윗이 와서 수금을 타면서 수금을 타 주고는 했었습니다. 음악치료를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제는 왕이 다윗을 집에 보내지 않고, 왕궁에서 완전히 상주하도록 그렇게 요청을 했습니다. 그만큼 사울왕이 다윗을 인정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자기의 겉옷과 창과 활을 다윗에게 선물로 줄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는 가까워 졌습니다.

사울왕이 가만히 보니까 다윗이 너무나 훌륭합니다. 다윗을 보내는 곳곳마다 지혜롭게 행동을 했습니다. 지혜롭게 행동을 하다는 히브리 뜻은 왕이 보내는 곳마다 다윗이 가서 승리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 다윗은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사울왕으로부터 쓰임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군인들도 신하들도 백성들도 마땅히 여겼노라고 성경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인정받으면 나이가 문제가 아니겠지요. 인정받으면 경력이 아니겠지요. 하나님의 교회는 사회적인 이력과 경력이 중요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 이 다윗은 여러 가지 사회적 제약, 나이가 어리다던지, 군대의 경험이 적다던지, 이러한 제약을 뛰어넘고 군대의 장이 되었습니다. 군대의 장이면 장수가 되었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가는 곳곳마다 하나님이 그에게 지혜롭게 하셔서 승리하게 하신 줄 믿습니다.

여기까지는 너무 좋았습니다. 6절에서 9절의 분위기는 냉냉하기 짝이 없습니다. 문제는 어디에서 생겼습니까? 6절과 7절을 보면 이제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 군대가 사울왕을 중심으로 개선행진을 합니다. 마을로 개선행진을 하고 있는데, 온 마을 사람들이 나와서 승리한 이스라엘 군대를 환영하면서 특별히 여성들이 소고를 치며 노래하며 춤추면서 사울왕과 일행들을 환영하는데. 그들이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7절입니다.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울왕이 안색이 변했습니다. 8절에 보면 이 말에 심히 분노하고 불쾌했다고 그랬습니다. 여러분, 누가 문제인가요? 이 여자들이 경솔했던가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다윗과 사울의 관계가 이렇게 인정하고, 인정받는 은혜로운 관계였는데, 저들의 관계를 빼뜨린 것은 저 주책없는 여자들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여러분들은 평생 은혜의 기회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언제나 문제는 내 안에 있는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과 사울의 관계가 깨어진 것이 이 여자들 때문이었습니까? 여자들이 잘 못 이야기 한 것입니까? 사울은 그 말을 듣고서 변했습니다. 다윗에게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다니, 다윗이 더 얻을 것이 이 나라밖에 더 있겠느냐? 다시 말하면 다윗이 이 나라를 빼앗으려고 나에게 대적하고 덤벼들지 않겠느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다윗은 생각지도 않고 있었는데, 사울은 너무 앞서간 것입니다. 결국 사울은 다윗을 감시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9절을 보면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감시하였더라. 시기하였더라. 미워하였더라. 시기하고 미워만 했습니까? 사탄은 우리에게 쐐기를 박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목회자를 사랑하고, 성도를 사랑하는 그런 마음에 어떤 사건을 통해서 쐐기를 박습니다.

쐐기가 뭐예요? 도끼날이 아주 날카롭지요? 종이창처럼 날카롭지요? 하지만 도끼뒷면을 보셨나요? 주먹처럼 두껍지요? 그래서 장작을 팰 때 도끼날 자루 쪽으로 패지, 주먹같이 넙적한 망치 같은 부분으로 장작을 패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단단한 아카시아나무, 참나무라도 그 도끼날 같은 얇은 면으로 패면 조금씩 조금씩 그 사이가 패여 들어가서 결국은 넒은 부분에 간격이 벌어 들어가서 장작은 분리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사탄 마귀는 처음에 우리에게 틈을 엿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사이에 틈이 없는 거예요. 성도와 성도 사이에 틈이 없는가? 목회자와 성도 사이에 틈이 없는가를 호시탐탐 노리다가 틈만 보면 쐐기를 박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쐐기가 얇기 때문에 어떻게 들어오는지 눈치를 채지 못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가면서 간격은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사울의 마음에 처음부터 다윗을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어요. 그냥 섭섭했어요. 다윗은 만만이고, 나는 천천이라.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런데 그 기분 나쁜 마음이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10절에서 11절에 보면 결국은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모의하는 단계까지 갔습니다. 어떻게 죽일까? 자기의 잔치 자리에 다윗을 초대해서 자기의 맞은편에 배치를 했습니다. 다윗은 왕 앞에 마주 앉을 만한 위치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맞은편에 앉혀놓고 단창을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식사를 한 참 해서 분위기가 좋아졌을 때 사울이 창을 던져서 다윗을 죽이려고 했을 때, 다윗은 그 자리를 두 번이나 피했어요. 두 번이나 그랬습니다.

다윗을 죽이지 못했던 사울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그 다윗을 제거할까? 고민하다가 결국은 자기의 딸 미갈을 다윗에게 주워서 사위로 삼고 사위로 삼으면 멀리 도망가지 못하고 궁 안에서 살게 될텐데, 내가 다시 한 번 다윗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삼자고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이 악해지면 이 정도까지 악해집니다. 자기의 딸을 주어서라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삼겠노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성경을 쭉 다 읽어보면 어느 날 자기 딸 집에 암살자를 보냅니다. 그 딸이 자기 남편 다윗을 미워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날 밤 그에게 감동을 주시고 지혜를 주셨습니다. 자기 남편 모양의 모습만 해서 이불을 덮어놓고 남편은 피신을 시켰습니다. 자객이 들어와서 그를 찔렀지만 보니까 허수아비였습니다.

사울은 자기의 딸의 집에까지 자객을 보낼 정도로 그렇게 달라졌습니다. 나중에는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이제는 더 이상 안 되니까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다윗을 보내서 다윗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겠다고 생각까지 했었습니다. 한 번 빗나가면 이렇게까지 빗나갈 수 있어요.

저는 생각합니다. 사울이 다윗과 이러한 관계가 된 이유가 무엇일까? 몇 가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첫 번째 이유는 우리가 잘 이해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보았을 때 성경은 말씀합니다. 12절이나 28절 보면 사울이 분명히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심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정상적이고 은혜로운 방향으로 가야지요.

저 김집사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사람이야. 저 박권사는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는 사람이야. 나도 어떻게 하면 저 김집사처럼, 박권사처럼 하나님께서 동행하는 사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는 사람으로 그렇게 살아갈까? 라고 생각해야 할 텐데, 저 사람 때문에 내가 이 교회에서 빛이 나지를 않아.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이 교회에서 쫓아낼까? 어떻게 하면 이 교회에서 실족하게 할까? 이렇게 궁리한다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사울은 다윗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 부정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했어요. 왜 그랬을까? 사울은 이미 하나님의 영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람은 성경에 보니까 악신이 사울을 주장했다고 그랬습니다. 사탄이 주장하는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영을 주장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인정하고,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 마음에 하나님의 영이 가득한,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 미워지고 부담스러워지고 멀어지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안에 성령이 계시지 않은 것입니다. 나도 옛날에는 방언기도 했었지. 나도 옛날에는 40일 기도 했었지. 신앙은 과거를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오늘 내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있는가? 오늘 내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살고 있는가가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성령의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을 미워한다면 분명 나는 성령의 사람이 아닌 거예요. 하나님의 영이 인도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다윗이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지혜롭게 생각한다면, 날마다 승리한다면 칭찬받을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시기의 대상이 되고, 미움의 대상이 됩니다. 그 사람은 왜 하는 것마다 잘 돼? 그 사람은 왜 하는 것마다 목사님 칭찬을 받아? 그러면 그것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지 않겠어요? 그런데 왜 그런 사람을 미워하십니까? 여러분 안에 그런 사람들 없습니까?

제가 잘 아는 분들을 칭찬하면 그 사람이 굉장히 힘들어서 저한테 와서 그래요. 목사님, 저 칭찬하지 마세요. 너무너무 피곤하고 힘들어요. 너무 비꼬고 아니꼬와서 그래요. ‘목사님이 칭찬했다며?’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분 안에도 이 사울과 같은 마음들이 있어요.

칭찬하고 가서 지혜롭게 행하고 승리하면 모델이 되고, 축복이 되고, 그를 존중하고 칭찬하는 마음이 되어야지. 그런 사람이 왜 미움의 대상이 되고, 제거해야할 대상이 되느냐 그 말이예요.

사울에게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제거되어야 할, 버려야 할 잘 못된 모습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교회 지도자들이 그런 모습이 있음을 느낍니다. 우리 평안의교회가 축구를 참 잘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축구를 잘 하는 교회나 혹은 다른 교회와 친선경기를 했을 때 우리 평안의교회가 이기면 다른 우리 동역자들이 관심을 안 가져요. 우리 평안의교회가 어느 교회와 해서 3-0으로 이겼다면요?, 5-0으로 이겼다면요? 이런 이야기조차 물어보지를 않아요. 난 조금 물어봤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됐어요?’, ‘응, 이겼지.’ 좀 물어봐 줬으면 좋겠는데, 아무도 물어보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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