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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더 많은 사랑을 받았음에도 (마 11: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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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덕만 목사 (아름다운교회)

사람이 사는 곳마다 지구상에는 많은 도시들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구상에는 셀 수도 없는 많은 도시들이 존재하였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형성된 도시 가운데 사라진 도시들도 많이 있습니다. 자연적으로 사라졌거나 또는 어떠한 급작스러운 사건으로 사라진 도시들이 있습니다.

폼페이라는 도시는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만 연안에 있던 고대도시입니다. 지금은 내륙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사르누스강 하구에 있는 멋진 항구도시였습니다. 제정 로마 초기에는 이 도시 곳곳에 로마 귀족들의 별장들이 들어선 휴양지로서 성황을 이루었던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79년에 화산 폭발로 말미암아 사라진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6세기 말부터 발굴이 시작되어 1748년에 본격적으로 발굴이 된 도시입니다.

이 폼페이가 최후를 맞은 이유에 대해서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도시에 타락이 극에 다 달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성적으로 더 이상 문란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폼페이의 최후’라는 제목으로 전시회가 있었을 때 어느 코스에는 미성년자들은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폼페이는 타락으로 말미암아 멸망한 도시입니다.

성경 속에서 나타난 도시 중에 멸망한 도시가 어느 도시입니까? 대표적인 도시는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이 소돔과 고모라도 그들의 죄악이 극에 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죄악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닿았기 때문에 유황불로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은 어떻습니까? 소돔과 고모라와 다르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도시들을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니시던 도시 가운데 가장 많이 권능을 베푸신 고을들이 있었습니다. 이 도시들은 예수님께 특별한 은혜를 입은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장 많이 권능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도시들에 대해서 “화있을진저”라고 말씀하시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두로와 시돈에서 권능을 행하였다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두로와 시돈이라는 곳이 어디입니까? ‘두로와 시돈’은 지중해 연안에 위치했던 고대 페니키아의 상업도시로서 우상 숭배와 간악으로 인해 구약 선자들로부터 많은 책망을 받았던 곳입니다. 즉 두로와 시돈은 우상 숭배와 간악함이 있었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이 두로와 시돈보다도 더 완악하고 패역한 도시가 바로 고라신과 벳새다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라신과 벳새다에서 많은 권능을 행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능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면 그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마땅한 것 아닙니까?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을 받았다면 그 사랑을 보답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자녀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베풀어 주신 은혜를 받았다면 그 은혜에 감격하여 그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하며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특별한 사랑을 받고도 잊어버립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은혜를 특별하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진정으로 은혜를 받았다고 깨닫게 되면 회개하게 됩니다. 내가 지은 죄가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섭섭하게 했던 것이 회개가 됩니다. 충성하지 못하였던 것이 회개가 됩니다.

여러분 진정한 회개가 없이 신앙이 올바로 성장하기 어렵습니다. 회개는 구원의 과정이고 구원의 완성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면 또한 회개의 삶이 동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아무나 하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맨톤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회개를 미루는 사람은 결국 그 영혼이 사단에게 저당 잡혀 있는 사람이다.”
회개를 미루지 마십시오.

회개는 죄를 자각하고 슬퍼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깨닫고 슬퍼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죄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과 가지고 있는 죄를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자기의 입으로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죄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기쁘게 용서해 주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여러분 이 말씀을 믿습니까?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멀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라신과 벳새다와 함께 권능을 많이 나타냈던 도시가 가버나움입니다.
4복음서를 통하여 예수님의 행적을 볼 때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 주셨습니다. 열병으로 앓아누운 베드로의 장모도 고쳐 주셨습니다. 무덤 사이에서 더러운 귀신들려 방황하던 사람을 고쳐 주신 곳이 바로 가버나움입니다. 네 사람에게 메워 온 중풍병자를 고쳐 주시 곳도 바로 이곳입니다. 마태복음 8장 16절에 보면 이곳에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설교도 하셨고 제자들도 이곳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주 무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렇게 많은 가르침과 많은 권능을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교만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십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 까지 높아지겠느냐?”

교만한 사람을 우리는 하늘 높은 줄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가버나움이 바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담을 수 없습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봉우리에는 물이 고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골짜기에는 물이 고입니다. 교만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무리 많이 나타난다 할지라도 그 은혜가 담겨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작은 은혜도 놓치지 않고 담습니다.

여러분 교만의 증상은 암의 증상과 유사합니다. 처음에는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몸속에서 서서히 자랍니다. 그제 서야 우리는 조금씩 뭔가 제대로 움직이고 있다 않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토록 작고 보잘 것 없게 여겨지던 것이 자라나서는 우리를 꼼짝 못하게 하며 치명적인 병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교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잠언 16장 5절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잠 16:5)

잠언 18장 12절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 18:12)

야고보서서 4장 6절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음부에 까지 낮아지리라”

그러므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교만하여지면 안 됩니다. 바벨론 왕조의 느브갓네살 왕은 교만 때문에 쫓겨났습니다. 사울 왕도 교만 때문에 쫓겨났습니다. 하만장군도 교만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우리가 고백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그렇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만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면 그것에 합당한 열매들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사랑은 무엇을 기대하면서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내가 특별한 사랑을 주었다면 거기에는 기대감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러시기 않습니까? 특별하게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사랑했다면 그래도 그 사람에게 기대감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에 가장 많은 권능을 나타냈다는 것은 그 도시에 주님이 기대하시는 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도시는 회개하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교만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도시를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22절과 24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 11: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마 11:24)

결국 이 가버나움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사라진 도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포도원에 심기운 무화과나무로 비유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3장 6절에 보면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눅 13:6)

포도원에 무화과나무가 심기었다는 것은 특혜를 받은 무화과나무라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아무데서나 자라는 나무입니다. 그런데 포도원에 심기었다는 것은 특별한 은총을 입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가르치는 것이며 동시에 우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특혜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포도원에 심기운 나무입니다.
그러므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끝으로 조만식 장로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평양 산정현 교회의 청빙을 받게 되었습니다. 교회 대표로 조만식 장로님이 주기철 목사님을 찾아가 교회의 청빙 결정을 전하고 모시기로 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을 찾아온 조만식 장로님은 젊은 주목사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 저희 교회에 부임하실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청원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주기철 목사님이 오산학교를 다닐 때 조만식 장로님은 교장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해서 산정현 교회에 부임한 후 어느 주일 낮 조만식 장로님이 바쁜 일로 예배에 늦었습니다. 황급히 들어와서 신을 벗어 신을 들고 신장에 넣으려는 순간 조만식 장로님을 본 주기철 목사님이 소리쳤습니다. "조장로님 거기 서 계십시오. 장로님이 예배에 늦으면 어떻게 본이 되겠습니까?" 그날 조장로님은 문간에 신발을 손에 든 채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배 후 다시는 예배에 늦지 않겠다고 사과를 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진 장로님이십니까?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멋지게 보답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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