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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산상수훈강해 ①>행복하여라! (마 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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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하준 목사 (효자교회)

산상수훈의 가치

인도의 성자요 인도 독립의 아버지라 불리는 마하트마 간디를 잘 아실 것입니다. 간디는 영국과의 기나긴 독립투쟁을 지도하면서 놀랍게도 비폭력 무저항주의라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독립을 위한 투쟁을 하되 철저하게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저항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이 인도인을 철저하게 억압하고 잔인하게 시위를 진압할 때 간디는 오히려 저항하지 않고 철저하게 인도인들의 정신 속에 독립의식을 심는 일만 전념했습니다. 그 결과 놀랍게도 이 비폭력 무저항주의가 승리했습니다. “대영제국에는 해가 지지 않는다.”며 절대적인 권력을 자랑하던 영국이 이 초라한 노인의 비폭력 무저항주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그런데 철저한 힌두교도였던 간디가 주창한 비폭력 무저항주의의 배경에는 놀랍게도 기독교의 산상수훈의 정신이 들어 있습니다. “신약성서를 읽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새로운 감명을 받았는데 특히 산상수훈은 나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간디의 자서전에 나온 내용입니다. 간디는 그의 비폭력 무저항주의 정신을 바로 이 산상수훈에서 배운 것입니다. “귀하의 나라와 우리나라가 산상수훈에 나와 있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우리는 우리 양국의 문제들만 아니라 전 세계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간디가 전 인도총독 어윈 경에게 한 말입니다. 산상수훈이 얼마나 위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 잘 가르쳐주는 일화입니다.

이제 오늘부터 약 10주에 걸쳐서 산상수훈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5장부터 7장에 걸쳐 나오는 예수님의 설교를 사람들은 산위에서 주신 가르침이라는 뜻에서 ‘산상수훈’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이 짧은 석장의 분량 속에 8복 선언, 주기도문, 황금률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주옥같은 말씀들이 들어있어 보배로운 말씀이라는 뜻으로 ‘산상보훈’이라고 부르기까지 합니다. 이 산상수훈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는지 이 시간 다 말씀드릴 수 없지만 어느 신학자가 남긴 “산상수훈은 천국의 대헌장이다.” 혹은 ‘산상수훈은 수백의 보석으로 꾸며진 왕관’이라는 극찬으로도 이 산상수훈의 가치는 이루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제 이 산상수훈의 놀라운 가르침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열린 마음과 은혜 받을 준비를 하게 하셔서 이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통해 큰 은혜 받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행복의 조건

그러면 이제 오늘은 산상수훈의 첫 부분인 마태복음 5장 1~12절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부분은 흔히 팔복으로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왜 팔복이냐? 본문을 보십시오. ①‘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②‘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③‘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④‘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⑤‘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⑥‘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⑦‘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⑧‘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렇게 여덟 가지의 복을 말씀하셨다고 해서 팔복입니다.

이 팔복은 한 마디로 참된 행복은 외부적인 조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내면에서 오는 것임을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다행 행(幸)에 복 복(福) 자, 즉 행운과 복이 따라온다는 뜻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저마다 다 다르게 대답하겠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모두가 나름대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산다고 대답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공하고 출세하기 위해 살아간다고 대답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학문의 업적을 이루기 위해, 나름대로 좋아하고 기뻐하는 일, 보람 있는 일을 하기 위해 살아간다고 대답합니다. 모양이 조금씩 다를 뿐 모두가 자기 나름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 첫 번째 부분인 팔복을 보면서 과연 예수님이 말씀하신 여덟 가지 복은 무엇인지, 과연 성경은 어떤 것을 참다운 행복이라고 말하고 있는지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 팔복을 잘 이해하면 우리는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지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영적인 태도에 따른 네 가지 행복

첫째, 어떤 사람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3절). 무슨 뜻입니까? 본문에서 ‘가난’이라고 하는 것은 본디 물질적인 가난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심령이 가난한 자, 즉 마음이 가난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어떻습니까? 늘 무능함을 느끼며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게 됩니다. 누군가 나를 도와주지 않으면 내 힘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가난한 자란 늘 자신이 무능한 사람임을 느끼며 하나님의 전적인 도움 없이는 잠시도 살아갈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을 뜻합니다. 겸손한 마음, 갈급한 마음, 깨끗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는 이것을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거지’가 되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가난한 마음, 순수한 마음, 겸손한 마음, 하나님만 의지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급은 무엇입니까?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또 무슨 말입니까? 주님이 천국은 어린아이들과 같은 자들의 것이라고 하신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즉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어떤 외적인 조건이나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우리 심령의 문제이며 이 심령이 가난하여 늘 겸손하고 순수하며, 하나님만 의지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말씀도 있지요? 그것은 재산이 많아서가 아니라 부자들의 마음이 대개 교만하고 누구를 의지하지 않으려는 마음, 자신만 믿고 의지하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심령의 문제요 마음의 문제입니다. 우리도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심령이 부유한 자가 아니라 철저하게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4절). 헬라어에는 슬픔을 표현하는 단어가 두 개 있는데 마태복음은 특별히 ‘클라이에인’이라는 낱말 대신에 ‘펜테인’이라는 낱말을 사용했습니다. 전자는 대개 육체적인 슬픔을 뜻하므로 누가 죽어서 슬픈 것, 재앙이나 심판 때문에 슬픈 것 등을 뜻하는데 후자는 특별히 영적인 슬픔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슬픔은 단순히 마음이 아파서 슬프고 세상이 어렵고 힘들어 슬픈 것이 아니라 세상이 불의하고 타락하여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에 대한 슬픔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슬픔과 애통을 느껴보신 적이 있습니까? 세상이 너무도 죄악으로 가득 차고, 너무도 타락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고, 불의가 판을 치는 것을 보면서 손가락질 하고, 비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내 일처럼 슬퍼하고 아파하는 그런 마음 말입니다. 진정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이런 슬픔과 애통을 느껴보아야 합니다. 오늘의 세상이 바로 이런 세상 아닙니까? 그러면 성경은 이런 애통을 느끼는 사람에게 어떤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까?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세상이 주는 위로, 사람이 주는 위로가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입니다. 요한계시록 21:4에 새 하늘 새 땅이 이루어지면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겨주셔서 다시는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어떤 참된 위로도 줄 수 없습니다. 아픔을 당했을 때, 슬프고 괴로울 때 사람이나 술이나 세상의 쾌락으로 위로를 받으려는 사람이 많습니다만 이런 것들은 절대 참 위로를 줄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애통과 슬픔, 모든 절망이 하나님을 통해 참된 위로 받게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5절). ‘온유한 자’라는 말은 마음이 겸손한 자라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온유함을 부드러운 마음으로 해석하는데 원어의 뜻은 부드러운 마음이라기보다 겸손한 마음을 뜻하므로 첫 번째 복인 ‘심령이 가난한 자’와 비슷한 사람을 뜻합니다. 이런 사람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이 세상의 땅, 복부인들이 그렇게도 좋아하는 부동산이 아니라 하나님의 땅, 즉 천국을 뜻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겸손하고 가난한 자, 낮아질 줄 아는 자,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천국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넷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6절). 여기서 ‘의’는 인간적으로 이룰 수 있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노력으로 의를 이루려고 애씁니다. 선한 일을 하고 업적을 쌓아서 의롭게 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인간은 의롭지 못하다고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는 말씀처럼 모든 사람은 죄인이므로 아무리 애를 쓰고 공로를 쌓아도 결코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의에 의해서만이 의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노력에 의한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의를 갈망하는 자, 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에게는 어떤 복이 내려집니까? ‘저희가 배부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영적인 배고픔은 어떤 음식으로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주시는 의로 말미암아 채워지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영적인 공허를 세상적인 것으로 채우려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자기 의를 쌓으려고 그렇게 노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은혜로 채워주실 때만이 우리가 진실로 배부르게 됩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됩니다. 바로 이런 복을 주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산상수훈 팔복의 전반부로서 이 전반부에 나오는 네 개의 복은 주로 우리의 영적인 태도에 따라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겸손하고 순수하고 의지하는 영적 태도를 가진 사람이 천국을 소유하게 된다는 교훈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천국을 소유하여 천국 백성 되기 원합니까? 세상이 줄 수 없는 영원한 만족과 배부름을 체험하고 싶습니까? 이 네 개의 복을 명심하고 이런 귀한 영적 태도로 살아가면 될 것입니다.

천국시민의 덕목에 따른 네 가지 행복

이제 다섯 번째 복부터는 앞의 네 가지 복과는 달리 천국시민이 소유해야 할 덕목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앞의 네 가지 복은 하나님에 대해 영적으로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 하는 것이었다면 이제 뒤의 네 가지 복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어떤 마음가짐과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알려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섯째 복은 무엇입니까?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7절). 긍휼이란 쉬운 말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다른 사람,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 힘든 삶을 살고 있는 타인을 바라보면서 진심으로 불쌍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긍휼’은 단순히 불쌍한 마음만 드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불쌍한 사람과 동일시하는 태도를 뜻합니다. 내가 저 사람의 입장이 되어 똑같은 아픔과 슬픔을 당해보고 느껴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하는 마음 말입니다. 우리도 남을 불쌍히 여길 줄 알되 그냥 마음으로만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그들의 처지가 되어 함께 그 아픔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이런 것입니다. 교회가, 성도들이 그저 불쌍한 이웃 돕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아픔을 진심으로 느끼고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같은 성도들이 당하는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됩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들에게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주기도문의 한 구절처럼 내가 남의 죄를 용서할 때 하나님도 나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길 줄 알 때 하나님도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여섯째,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8절).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깨끗한 마음이라기보다 단순한(simple) 마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이웃을 향해 복잡한 생각을 품고, 이중적인 두 마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바라보고 집중하는 사람, 이웃에 대해 겉과 속이 늘 같고 시종여일, 처음과 나중이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깨끗한 마음, 단순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집중하는 사람이 진실로 하나님을 보고 만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일곱째,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9절). ‘화평케 하는 자’란 평화를 누리는 자가 아니라 평화를 만드는 자, peace-maker를 뜻합니다. 평화가 있는 곳에 가서 그 평화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평화가 없는 곳을 찾아가 적극적으로 평화를 만들어가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평화 없는 이 세상에서, 싸움과 다툼과 시기와 미움이 있는 곳을 찾아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참 평화를 선언하고 나의 희생과 섬김과 봉사로 평화를 만들어 나가는 적극적인 사람이 될 때 우리는 진정 하나님의 자녀요 참 성도라고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여덟째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10절). 계속해서 11절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살다보면 반드시 핍박을 받게 됩니다. 성경대로 살고, 하나님 뜻에만 순종하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면 반드시 우리를 미워하고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물론 쉽게 사는 방법도 있습니다. 적당히 믿고 적당히 타협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은 편할지는 모르지만 결코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비록 ‘하나님 때문에’(‘나를 인하여’)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고 욕하고 핍박하고 나를 모략하더라도 성경은 분명 이런 사람에게 천국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오히려 12절 말씀처럼 우리가 하나님 때문에 핍박 받고 공격당할 때 더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는 힘들지만 하늘에서 우리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이것 때문에 핍박을 받았고 선지자들도 그러했습니다. 우리가 잠시의 핍박으로 예수님처럼 선지자들처럼 큰 영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할렐루야!

천국백성이 될 때 얻는 참 행복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는 어리석게도 엉뚱한 곳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이 세상이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영적인 세계를 발견하고 깨닫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사람이 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참 행복은 어떤 외적인 조건이나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참 행복은 내 마음 속에 있는 것이요 내 영혼 속에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물질과 지식, 권력을 소유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내 마음속에 천국을 소유했을 때에만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서 어떤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갑니까? 혹시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처럼 엉뚱한 곳에서 찾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 2:13)는 말씀처럼 참 행복의 근원인 하나님은 버리고 엉뚱한 터진 웅덩이에서 행복을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통해 팔복이 약속한 참된 복을 누리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마음속에 천국을 소유한 진짜 행복한 사람들이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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