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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설병과 골리앗의 칼 (삼상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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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석기현 목사

일전에 미국 뉴욕 부근에 있는 어느 ‘유태인 대학살 기념관’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유태인에 대한 끔찍한 박해와 학살에 대한 생생한 증거물들과 함께 그 쫓기는 유태인들을 숨겨 주고 탈출시켜 준 사람들에 대한 기록과 사진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들을 보면서, 그 당시 그 공포의 도가니 속에서도 정말 눈물겨운 인간애가 곳곳에 살아 있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목숨을 건지기 위하여 도망 다니던 사람들이 자기들을 숨겨주고 도와주는 손길과 마음을 대하게 되었을 때 그 기분이 과연 어떠했겠습니까? 그들이 마루 밑 지하실로 넣어 주는 감자 한 톨이 바로 생명 양식이요, 그들이 끊어 준 기차표 한 장이 그야말로 생명 길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다윗이 바로 그런 처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사울의 살의가 명백해지고 요나단과 눈물의 작별을 한 후 그는 문자 그대로 갈 곳 없고 의지할 곳 없는 도망자(fugitive)가 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비참하기 짝이 없는 생애가 시작되는 바로 첫 순간부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놀라운 도움과 위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오늘날의 성도들 역시 인생 길을 가다가 때로는 마치 사면초가와 같은 궁지에 몰려 어디로 어떻게 빠져 나가야 할지 막막한 경우를 자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처럼 환난 당한 성도들을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떻게 도와주고 계십니까?

1. 하나님께서는 ‘다른 성도의 희생적인 사랑’을 통하여 환난 당한 성도를 도우십니다.

이것이 바로 ‘진설병’을 통하여 다윗에게 주어진 도움이었습니다. 본문 1절부터 3절에 「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니 아히멜렉이 떨며 다윗을 영접하며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 /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왕이 내게 일을 명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바와 네게 명한바 일의 아무 것이라도 사람에게 알게 하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나의 소년들을 여차여차한 곳으로 약정하였나이다 / 이제 당신의 수중에 무엇이 있나이까 떡 다섯 덩이나 무엇이든지 있는 대로 내 손에 주소서」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아히멜렉 제사장이 다윗을 「떨며」 맞이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그가 사울이 내린 다윗 체포령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 신변에 위험을 느껴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 아히멜렉 제사장이 다윗에게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느냐」라고 질문한 것은 이미 다윗은 어디 나갈 때 자기 부하들을 이끌고 다닐만한 지위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하여 다윗은 사울왕이 자기에게 어떤 명령을 내리면서 「아무 것이라도 사람에게 알게 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나의 소년들」 즉 자기 부하들과 따로 떨어져 가다가 약속 지점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둘러대었습니다. 즉 우리나라 옛날의 암행어사와 같이 무슨 특수 비밀 임무를 수행 중이라고 대답한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말한 것은 아히멜렉을 속이려 했다기보다는, 나중에 그가 사울왕으로부터 추궁 당하게 될 경우에 그로 하여금 변명할 말이 있도록 하려고 그랬을 가망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는 ‘사울의 신하’인 ‘도엑’이라는 사람도 마침 와 있었고, 다윗이 염려했던 대로 나중에 사울왕에게 밀고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아히멜렉에게 「떡 다섯 덩이나 무엇이든지 있는 대로」 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도망자 신세에 제일 필요한 것은 그 무엇보다도 식량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이러한 요청에 아히멜렉은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4절로부터 6절까지 말씀에 「제사장이 다윗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항용 떡은 내 수중에 없으나 거룩한 떡은 있나니 그 소년들이 부녀를 가까이만 아니하였으면 주리라 / 다윗이 제사장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참으로 삼일 동안이나 부녀를 가까이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나의 떠난 길이 보통 여행이라도 소년들의 그릇이 성결하겠거든 하물며 오늘날 그들의 그릇이 성결치 아니하겠나이까 하매 / 제사장이 그 거룩한 떡을 주었으니 거기는 진설병 곧 여호와 앞에서 물려낸 떡밖에 없음이라 이 떡은 더운 떡을 드리는 날에 물려낸 것이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항용 떡」이란 ‘보통 떡’ 즉 일반인들이 평상시 식생활에 먹던 떡을 가리키는 말인데, 아히멜렉에게는 마침 이것이 없었습니다. 그 대신 있던 「거룩한 떡」이란 바로 ‘진설병’ 즉 성막 안에 항상 차려져 있던 열두 개의 떡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것은 일주일에 한 번씩 매 안식일마다 「더운 떡」 즉 새 떡으로 바꾸어 놓게 되어 있었는데, 그때 물려낸 떡은 오직 제사장과 그 가족만 먹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히멜렉 제사장은 다윗 일행이 「부녀를 가까이 하지 않았으면」 그 진설병을 주겠다고 허락했습니다. 이것은 레위기나 여호수아서 등에 있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전투 임무 중에는 부녀자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성결 규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에 대하여 다윗이 대답하기를 “우리가 평소에 무슨 원정 전투를 나갈 때에도 이삼일 전부터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고 있다가 떠났는데, 하물며 이번 경우는 오죽하겠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아히멜렉은 더 이상 묻지도 않고 「진설병 곧 여호와 앞에서 물려낸 떡」 즉 더운 새 떡을 차려 놓으면서 물려내었던 떡을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아히멜렉이 진설병을 준 것이나 다윗 일행이 그것을 먹은 것이나 다 원칙적으로는 율법을 어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12장 3~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구약 호세아 6장 6절의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한다’는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바로 이 다윗이 진설병 먹은 것을 정당화하셨습니다.

비록 아히멜렉 제사장이 법을 어기기는 했지만 그것이 범죄가 아니었던 이유는, 그 행위가 바로 ‘자비’의 발동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사야말로 자기의 전공이고 제사 음식의 규례를 따지는 데 그 누구보다도 정통한 아비멜렉이었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더욱 원하시는 인애를 잃지 않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적어도 법보다는 동정과 이해와 사랑이 먼저 필요한 때가 언제인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사울의 공식적인 명령이 내려져 있던 터라 아비멜렉 제사장은 다윗의 진짜 사정을 이미 다 눈치 채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울왕의 특수 임무를 띠고 파송 받았다는 사람이 식량조차 제사장에게 구걸하러 온다는 것이 벌써 말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또 곧 이어서 나타나지만 다윗은 식량은커녕 무기 하나 변변히 가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히멜렉 제사장은 다윗을 꼬치꼬치 추궁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자초지종을 솔직하게 말해 달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도에 어긋난 부탁을 받았지만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을 도와줌으로써 자기에게 미칠 화를 생각할 때 분명히 두려웠겠지만, 그는 그 두려움을 무릅쓰고 약자 편에 서 주었습니다. 세상에서 의지할 곳 단 한 군데도 없는 다윗이 느닷없이 자기에게 손을 펴 왔을 때, 그는 그 다윗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그저 베풀어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진설병은 법을 지키는 대신에 의리를 따른 것이었고, 공포에 사로잡히는 대신에 사랑에 충만히 젖어 건네 준 떡이었던 것입니다.

도와달라는 말을 들으면 먼저 ‘계산부터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을 지금 도와주면 나중에 나한테 어떤 이익이 돌아올까?’라는 계산, 혹은 ‘이 사람을 도와주었다가 나중에 내가 무슨 손해를 보게 될 위험은 없는가?’라는 계산부터 하는 것입니다. 돕기 전에 먼저 꼬치꼬치 ‘따지고 캐어묻는’ 사람도 있습니다. “당신 어쩌다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어?”라고 취조부터 하고 “그러게 내가 뭐라고 했어?”라고 일장훈시까지 덧붙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설사 남을 도와준다 하더라도 무슨 의리나 사랑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기 이익이나 체면 때문에 할 뿐입니다. 또 이런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게 되는 쪽에서도 진정한 감사가 우러나올 수 없을 것도 자명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그저 도와주는 의리 있는 친구, 정말 얼마나 고마운 사람입니까?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그저 자기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오히려 물어 주는 이웃, 어려울 때 정말 얼마나 반가운 사람입니까? 격식이나 법을 따지지 아니하고 ‘그저 베풀어 주는’ 사랑만 가득한 성도, 환난 당한 성도에게 그 얼마나 눈물겹도록 귀중한 형제자매이겠습니까?

어려움 당하는 성도가 내 곁에 있으면, 그 성도는 반드시 나의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아무 조건이나 이유를 달지 말고, 그저 이 사람이 지금 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그 조건 그 이유 한 가지만 가지고도 약한 자를 감쌀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 제약이나 법에 구애받지 아니하는, 그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 새 계명에만 철저히 구속되어서 남이 당한 환난을 내 일처럼 도울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피차 성도라는 이름으로 알게 하시고 교인이라는 관계로 교제하게 하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인생길에 지쳐 쓰러져 있는 당신의 자녀를 바로 이런 손길을 통하여 일으켜 주고 계시는 줄을 깨닫고, 아무 말 묻지 않고 그냥 건네주는 ‘진설병’, 이 희생적인 사랑으로써 환난 중에 서로를 돕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미리 준비해 두신 섭리’를 통하여 환난 당한 성도를 도우십니다.

이것이 곧 ‘골리앗의 칼’을 통하여 다윗을 도우심으로 나타났습니다. 7절 이하 9절에 기록하기를 「그 날에 사울의 신하 한 사람이 여호와 앞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는 도엑이라 이름하는 에돔 사람이요 사울의 목자장이었더라 /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여기 당신의 수중에 창이나 칼이 없나이까 왕의 일이 급하므로 내가 내 칼과 병기를 가지지 못하였나이다 / 제사장이 가로되 네가 엘라 골짜기에서 죽인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이 보자기에 싸여 에봇 뒤에 있으니 네가 그것을 가지려거든 가지라 여기는 그밖에 다른 것이 없느니라 다윗이 가로되 그 같은 것이 또 없나니 내게 주소서」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보니 「도엑이라 이름하는 에돔 사람」이 그 당시 「사울의 목자장」 즉 왕실의 모든 가축을 담당하는 분과에서의 최고 직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마침 그날 「여호와 앞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은, 그가 무슨 정결 예식을 거행하기 위하여 성소를 찾아왔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가 참된 신앙을 가지지는 않았다는 사실은 나중에 그가 사울의 앞잡이가 되어 제사장을 멸절시키는 일에 앞장 선 것을 보아서도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시편 52편은 바로 다윗이 그 도엑이 나중에 사울에게 밀고한 것을 듣고 난 후에 지었던 노래입니다. 거기서 다윗은 「이 사람은 … 제 악으로 스스로 든든케 하던 자라 하리로다 오직 나는 …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도엑은 다윗과 아히멜렉을 사울에게 밀고하는 ‘악’을 수단으로 삼아 출세하고 입지를 굳히려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반면에 다윗은 이 사건을 겪으면서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인자’하심에만 평생 의지할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바로 이 본문의 사건에서 그런 하나님의 기적적인 간섭을, 바로 ‘골리앗의 칼’을 통하여서도 뼛속 깊게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히멜렉 제사장으로부터 그처럼 비상식량을 얻게 된 다윗은 또 염치없는 청을 하나 더했습니다. 「당신 수중에 창이나 칼이 없나이까」라고 물어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아무 병기도 휴대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는 「왕의 일이 급하므로」라고 또 둘러대었습니다. 이것 역시 누가 들어도 뻔한 거짓말이었습니다. 특수 임무를 받들어 파송되었다는 군인이 아무리 급해도 개인 무기도 휴대하지 않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히멜렉은 이에 대해서도 아무 군소리 하지 않고 마침 그 성소 안에 옛날 다윗이 죽였던 블레셋 장군 「골리앗의 칼」이 보관되어 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아히멜렉이 「여기는 그밖에 다른 것이 없느니라」고 말한 것처럼, 원래 제사장 집이나 성소에 어떤 무기가 있을 리 없었습니다. 다윗이 “당신 수중에 무슨 병기가 없습니까?”라고 물어 본 것도 워낙 처지가 급하고 아쉬워서 한 번 물어 보았던 말이지, 실제로 있을 것이라고 기대는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전혀 뜻밖에 아히멜렉이 ‘골리앗의 칼’이 바로 거기 있다고 대답하자, 다윗은 그야말로 환호작약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같은 것이 또 없나니」라고, 즉 “그만큼 좋은 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정말 잘 되었습니다.”라고 반가워했던 것입니다. 그 골리앗의 칼은 다윗이 돌팔매질로 골리앗을 쓰러뜨린 후 그의 목을 잘랐을 때 썼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좋은 칼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사무엘상 13장 19절에서 나타나는 대로 블레셋의 전략적 정책 때문에 당시 이스라엘에는 제대로 된 철공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무기는커녕 농기구 제조조차 블레셋 사람에게 의존해야 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니 블레셋 대장이었던 골리앗의 칼은 적어도 그때로서는 최고 품질, 최고 성능의 무기였을 것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 골리앗의 칼이 이제 와서 다윗의 손에 제 발로 찾아 들어온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었습니다. 사방에 현상수배 되어 쫓기던 다윗에게 누가 자진해서 무기를 제공해 주겠습니까? 설사 다윗에게 돈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이스라엘 어디에도 그런 고급 외제 칼을 팔만한 가게도 철공도 없었습니다. 그런 불가능한 상황에서 느닷없이 골리앗의 칼이 다윗의 손에 돌아온 것입니다.
그것이 운이었겠습니까? 그것이 아히멜렉 제사장이 알아서 미리 마련해 둔 것이었겠습니까? 그것이 다윗이 어떤 감을 잡아서 찾게 된 것이었겠습니까? 아니었습니다.
그 골리앗의 칼은 전적으로 바로 이때의 다윗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해 두셨던 것이었습니다. 가장 구하기 힘든 것을, 도무지 구할 수 있으리라고는 사람으로서는 짐작도 못할 장소에, 오래 전부터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이미 준비해 두셨습니다. 다윗이 그 절박한 상황에서 꼭 필요로 했던 것을, 하나님께서는 아예 최고로 좋은 것으로 일찌감치 마련해 두셨다가 다윗에게 제공해 주셨던 것입니다.
정작 골리앗을 죽였을 때에 일찍 그 칼을 주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때 미리 주셨더라면 어린 다윗이 들고 다니느라고 얼마나 무거웠겠습니까? 아니 사울이 샘을 내어 빼앗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 다윗은 그 칼을 쓸 만한 힘이 생겼습니다. 아니 이제 그런 칼이 꼭 필요한 때가 되었습니다. 다윗에게 쓸 데 없는 짐이 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 골리앗의 칼을 이때까지 성소 안에 잘 보관해 놓으셨다가 그야말로 적시적소에서 다윗의 손에 건네 주셨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절묘하기 짝이 없는 ‘여호와이레(여호와께서 준비하심)’입니까? 다윗이 가장 약하고 두려워할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얼마나 그를 한시도 잊지 않고 완벽한 섭리를 통하여 돌보아 주고 계시는지를 그 ‘골리앗의 칼’을 통하여 확신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 칼을 쥔 다윗이 얼마나 큰 힘을 얻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토록 오래 전부터 예비해 두신 섭리가 얼마나 오묘하게 체험되었겠습니까? 바로 그 순간부터 이제 어디를 가도 하나님께서 항상 지켜 주실 것이라는 확신에 그의 마음은 든든하기 짝이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것이라고 무조건 일찍 우리 손에 쥐어 주지는 않으십니다. 아무리 ‘좋은 칼’이라고 해도 아직 우리 자신이 그것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힘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는 때가 될 때까지 친히 보관해 두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이제 ‘좋은 칼’만 있으면 마음껏 힘을 발휘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것 가지고 함부로 놀다가 생사람 다치게 할 위험이 있는 것을 아시는 까닭에 아직은 우리 손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숨겨두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돈 때문에, 승진 때문에, 건강 때문에 그렇게 아쉬워하고 기다려도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당장 우리 손에 쥐어주지 않으시는 것은 다 그런 깊은 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언제 어떤 도움이 우리에게 필요한지를 가장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아무리 사람이 자신의 불안한 미래를 두고 걱정하고 대비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이와 같은 먼 안목의 근처에라도 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미리 저금해 놓는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적시적소에 완벽하게 준비해 놓으신 것보다 더 충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당한 환난에서 빠져나오려고 백방으로 손을 뻗치며 몸부림치는 것이 이와 같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섭리를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성도가 서로를 위하여 의리를 지키고 희생적인 사랑으로 돕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해 놓으시고 직접 도우시는 그 마음 씀씀이와 그 손의 크기와 상대가 될 수 있겠습니까? 결코 비교조차 될 수 없습니다.

‘너 쓸 것 미리 아시고 주 너를 지키리’라는 찬송 가사 그대로, 성도의 인생에 꼭 있어야 할 ‘생존 필수품’들이 무엇인지를 아시고 그 ‘최고 양질’의 것을 준비해 두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전혀 기대하지도 못하고 있던 적시적소에서 그 좋은 것을 베풀어 주심으로써 그야말로 ‘1퍼센트 가능성의 인생역전’을 이루게 해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도무지 아무 희망도 없다고 여겨지는 환난의 막다른 골목 그 끝에 이 ‘골리앗의 칼’을 미리 예비해 놓고 계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칠전팔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의지할 데 없는 도망자 다윗에게 제사장을 통하여 ‘진설병’의 비상식량을 제공해 주셨습니다. 맨몸 맨손의 다윗을 위하여 ‘골리앗의 칼’을 적시적소에 오래 전부터 미리 준비해 두셨습니다. 인생의 도피자된 자들을, 환난과 곤고에 의하여 사방팔방 포위 당해 있던 성도들을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렇게 도와주고 계십니다. 성도의 의리와 사랑으로 베풀어지는 떡으로 우리를 먹이십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미리 예비해 놓으신 ‘여호와이레’의 검으로 우리를 무장시켜 주십니다. 실로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는 고백이 절로 터져 나오지 않습니까? 오늘도 당신의 자녀를 이런 ‘사랑의 떡’과 ‘섭리의 검’으로 도우시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지하며 끝내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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