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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를 통하여 보면 (고전 1: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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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동호 목사 (숭의교회)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안경을 썼습니다. 시력이 0.2 정도였습니다. 한 십 여 년 전부터 노안이 오기 시작하여 안경을 쓰고는 글을 보기가 어려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근시는 노안이 오면 안경을 벗어야만 오히려 글이 더 잘 보입니다. 때문에 책을 볼 때는 안경을 벗고 평상시 생활을 할 때는 안경을 써야만 합니다.

컴퓨터를 할 때는 거리가 애매하여 안경을 써도 힘들고 벗어도 힘듭니다. 그래서 컴퓨터를 위하여 안경을 만들었습니다. 그 안경은 책을 읽을 때도 맞지 않고 운전을 하거나 일상 생활을 할 때도 맞지 않습니다. 오로지 컴퓨터를 할 때만 사용합니다.

눈이 좋지 않으니 불편한 것이 많습니다. 그래도 안경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내가 만일 안경이 없는 시대에 태어났다면 지금 아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벌써 되었을 것입니다. 그다지 많은 돈을 주지 않아도 얼마든지 살 수 있는 안경이지만, 생각해 보면 안경은 우리 같이 눈이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 인간은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의 원죄로 말미암아 매우 중요한 영적인 시력을 잃었습니다. 모든 것을 제대로 정확하게 보고 읽어 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관(觀)입니다. 어떤 인생관을 가지고 세상과 사람과 자신을 보고 사는가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바르고 정확한 인생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야만 하는데, 우리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그 중요한 觀이 왜곡되고 말았습니다.

왜곡된 觀을 바로 잡기 위하여 안경이 필요합니다. 영적인 안경이 필요합니다. 모든 것을 정확하게 보고 바로 볼 수 있기 위하여 써야 할 영적인 안경이 있다면, 저는 그것을 십자가라고 생각합니다. 제 짧은 경험을 통하여 볼 때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과 역사 그리고 사람과 자신을 볼 때 가장 정확하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과 사람과 자신을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십자가를 잊어버리고 그냥 세상과 사람과 자신을 보면 언제나, 한번도 예외가 없이 언제나 세상과 사람과 자신이 왜곡되게 보이곤 하였습니다.

십자가 없이 세상과 역사를 보면 언제나 절망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과 역사를 보면 소망이 보이곤 하였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고 절망적이어도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을 보면 그곳엔 언제나 소망이 있었습니다. 죽고 망할 인생과 세상이라면 우리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셨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의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면 그곳에는 언제나 구원의 소망이 보이곤 하였습니다.

살다보면 힘들고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는 것과 같은 자리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힘들고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세상이 불안하여 금방이라도 망할 것 같아 잠을 이루지 못하는 때가 있습니다. 물론 그와 같은 상황이 사실일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상황 보다 우리의 시각에 문제가 있을 때가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잊었을 때 언제나 우리의 시각은 절망적이고 우리의 삶은 불안으로 가득차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십자가를 통하여 그 절망적인 상황과 불안한 상황을 다시 보면 극심한 절망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 세상과 역사 그리고 우리의 인생을 궁극적으로 지배하시고 역사하시는 분이 나와 사람이 아니라, 인간의 정치가 아니라, 살아계신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잊으면 절망이 보이고, 십자가를 생각하면,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을 보면 희망이 보입니다.

십자가 없이 나와 사람을 보면, 언제나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눈의 티만 보입니다. 겸손함과 사랑은 없어지고 교만과 시기와 다툼과 분쟁만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하여 자신과 사람을 보면 전혀 다른 것이 보입니다.

십자가 없이 자신을 보면 언제나 자신의 의가 보입니다. 허물과 죄는 보이지 않고 자신의 의만 보이기 때문에 언제나 교만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하여 보면 진정한 자기 자신의 모습이 보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죄인인 자기 자신의 모습이 보입니다. 십자가 앞에 우리 인간은 언제나 죄인입니다. 십자가 앞에 의인은 있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 밖에 서있으면 우리 인간은 자동적으로 교만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안에 서 있으면, 다시 말해 십자가를 통하여 자신을 보면 우리들을 자동적으로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언제나 십자가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우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훌륭한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십자가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보았기 때문에 자신을 죄인으로 인식하였습니다. 죄인 중에 괴수로 인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늘 고민하였습니다.

자신이 그와 같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귀한 그릇으로 쓰임 받는 것에 대하여 그는 늘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의와 능력 때문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십자가를 통한 죄 사함 때문에 가능해 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고백하였고, ‘십자가 외에는 자랑하지 않겠다.’며 고백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의와 능력을 자랑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도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라는 역설적인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교만처럼 볼 상 사나운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 겸손처럼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밖에 서 있으면 우리의 삶은 언제나 볼 상 사나운 교만에 빠지게 되고, 십자가 안에 서 있게 되면 우리의 삶은 언제나 훌륭하고 아름다운 겸손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밖에서 자기 의를 바라고 어리석고 흉한 교만에 빠져 사는 사람이 되지 말고, 십자가 안에서 언제나 자기의 죄를 바라봄으로 아름다운 겸손에 처해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십자가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보면 죄인이 보이는데, 이상하게도 그 십자가를 통하여 타인을 보면 죄인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인간이 보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귀한 인간이 보입니다.

살다보면 참 힘들고 어려운 사람이 있습니다. 싫고 미운 사람이 있습니다. 못 마땅한 사람이 있습니다. 나에게 고통을 주고 어려움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시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천한 사람이 있고 악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은 십자가를 통하여 저들을 보면, 전과는 전혀 다른 눈으로 저들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저들을 보면 저들도 나와 똑같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과 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들도 나와 똑같이 하나님 앞에 귀한 존재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함부로 미워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를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함부로 깔보고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정하고, 긍정적으로 보고, 높여 주어야 할 귀중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에게도 힘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가시 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한때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저들로부터 받아 오른 쪽 머리 한 부분이 마비가 되었습니다. 그날 저는 정말로 죽는 줄 알았습니다. 눈으로 열이 올라와 눈을 뜰 수도 없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회복되었지만 아직도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습니다. 세상에 사람처럼 힘든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로, 십자가를 통하여 저들을 바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거기에는 전에 내가 생각하던 사람과 전혀 다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바뀐 것은 아니었는데, 사람을 보는 제 눈이 바뀌었던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놀랍게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나처럼 귀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함부로 미워하고, 함부로 판단하고, 함부로 정죄하고, 함부로 업신여겨서는 안 되는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큰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정죄하거나 미워하지 않는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깔보거나 업신여기지 않는 정말 큰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과 자신과 타인을 보면, 소망과 죄인과 사랑이 보입니다. 십자가 밖에서 세상과 자신과 타인을 보면, 절망과 의인과 죄인이 보입니다. 자연스럽게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과 자신과 타인을 보는 사람들이 모이면 화평이 역사하고, 십자가 밖에서 세상과 자신과 타인을 보는 사람들이 모이면 불화가 역사하게 됩니다. 자기의 의에 사로잡혀 교만해 진 인간들은 절대로 다른 사람과 화평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을 때 절대로 불화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고린도교회는 참으로 대단한 교회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5절에 보면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말씀을 통하여 고린도교회에는 세상적으로 출중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장 7절에 보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고린도교회가 신앙적으로 아주 열정적이고 뜨거운 교회였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교회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교회 안에 파가 갈리어 서로 다투고 싸우는 분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사역을 하였던 교회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교인인 글로에를 통하여 고린도 교회에 분쟁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것을 책망하기 위하여 쓴 서신이 바로 고린도전서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부터 말을 돌리지 않고 저들의 분쟁을 언급하며 책망합니다. 그리고 저들의 치명적인 분쟁을 종식 시킬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바울이 제시한 방법은 정말 탁월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였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말씀합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문제가 사람들이 십자가를 잊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자신과 사람을 보지 못하고 십자가 밖에서 자신과 사람을 보았기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다짜고짜로 십자가의 도를 다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위에 모든 은사까지 받고 보니 교만해졌습니다. 모든 구변과 지식은 물론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도 누구의 것이 더 크고 높은 것인가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불화와 분쟁의 원인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의 원인은 저들이 십자가 밖에서 자신과 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자기 자신을 볼 수 있었다면 자신의 허물과 죄를 볼 있었을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구변과 지식과 은사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여겨졌을 터인데, 저들은 십자가 안에서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고 십자가 밖에서 자기 자신을 보았음으로 자기의 죄와 허물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의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은사와 구변과 지식이 다 은혜가 되지 못하고 자신의 의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허물과 죄를 보지 못하고 의를 보는 사람은 반대로 타인의 의를 보지 못하고 타인의 허물과 죄를 보게 됩니다. 그래야만 자기는 더 높아지고 다른 사람은 더 낮아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높이고 남을 낮추는 마음을 가지고 함께 교회생활을 하였으니 그 교회에 어떻게 분쟁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어떻게 보면 요즘 시대의 고린도교회와 같은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만히 보니 우리 교회에는 구변과 지식이 뛰어난 사람들이 그 어떤 교회보다 많은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교회와 같이 모든 은사에 뛰어난 사람들이 그 어떤 교회보다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정말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고린도교회와 비슷합니다.

이제 개척 된지 3년이 지났습니다. 허니문 기간이 지난 셈입니다. 드디어 제 귀에도 점점 다툼과 분쟁의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실망과 절망의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다툼과 분쟁 그리고 실망과 절망의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을 소홀히 여기지 말고 찾아 그 원인을 제거하는 일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재판관의 역할이 아닌 십자가의 도로 풀려고 하였듯이 우리도 우리 교회의 문제를 십자가의 도로 풀 필요가 있습니다. 십자가 밖에서 문제를 보고 풀려 하지 말고, 언제나 십자가 안에서 문제를 보고 풀려고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십자가 밖에서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를 보면 희망이 없습니다. 모든 구변과 지식에 뛰어나고 모든 은사에 충만한 교회라는데 희망을 걸었던 사람들은 결국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와 같은 것들은 절대로 우리의 희망과 소망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교회를 바라볼 때 비로소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그 희망을 함께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희망은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듯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힘써 만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3년 된 나무에서 희망이 익어 떨어지기를 바란다는 것은 무리일 수 있습니다.

십자가 밖에서 자신과 타인을 보면 자신의 의와 타인의 허물이 보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안에서 자신과 타인을 보면 자신의 허물과 타인의 의가 보입니다. 우리가 다 부족하고 허물이 있는 사람들이지만, 십자가 안에 들어가게 되면 우리는 다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사도바울의 고백과 같이 십자가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와 교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십자가의 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과 자신과 타인을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 즉 구원의 능력으로 함께 교회와 세상을 세워 나가는 것입니다. 다툼과 시기와 미움과 분쟁을 잠재우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주의 몸 된 교회를 주의 화평으로 가득 차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자기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을 박았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몸과 마음과 삶을 그리고 觀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으십시다. 십자가 없이는 그 어떤 것도 보지 말고, 생각하지 마십시다. 무의식중이라도 십자가 밖에 서지 않도록 조심하고 노력하십시다.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을 보고, 자신을 보고, 타인을 봄으로, 우리가 바라보고 살아가는 세상과 교회와 가정에 하나님의 구원이 언제나 충만할 수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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