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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양심을 깨우라 (창 42: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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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피영민 목사 (강남중앙침례교회)

18 삼일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 19 너희가 독실한 자이면 너희 형제중 한 사람만 그 옥에 갇히게 하고 너희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들의 주림을 구하고 20 너희 말째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리하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그들이 그대로 하니라 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 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22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너희더러 그 아이에게 득죄하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피 값을 내게 되었도다 하니 23 피차간에 통변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그 말을 알아들은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24 요셉이 그들을 떠나 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취하여 그들의 목전에서 결박하고 25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인의 돈은 그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

(서론)

  신앙생활에서 양심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믿을때에는 양심을 따라 믿으면 됩니다. 때문에 양심을 어떻게 지켜나가야 하는가가 신앙생활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어느 신학교에 굉장히 양심적이고 율법적인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무슨 행동이든 성서적인 근거가 있어야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이 신학생이 한 자매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데이트를 하고 헤어질 때 굿바이 키스를 하고 싶은데 성서적인 근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신학생이 성경을 찾고 찾다가 로마서 16장 16절을 발견합니다.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기쁜 마음으로 성서 해석학 교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교수님 이 말씀을 근거로 연애하고 있는 자매와 굿바이 키스를 해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교수님이 가만히 보시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교회 상황에 적용되는 말씀이지 연애상황에 적용되는 말씀은 아닌 것 같다.” 이 대답을 들은 신학생은 절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달이 가고 해가 가고 결혼할 때가 되었는데도 신학생이 프러포즈할 생각도 없는 것 같고 굿바이 키스 한 번 안 해주니까 자매는 애가 탔습니다. 어느 날 신학생이 데이트를 마치고 자매와 헤어질 때 역시 그냥 인사만 하고 가려고 하니까 이 자매가 신학생을 붙잡고 키스를 해 버렸습니다. 신학생은 키스를 당하면서도 이렇게 외쳤습니다. “성서적인 근거! 성서적인 근거!” 그러자 자매
가 마태복음 7장 12절을 근거로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그래서 이 신학생의 양심이 위안을 받았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창세기 42장은 양심을 깨우는 장입니다. 우리의 양심에 호소하는 장입니다. 양심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작은 소리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그것은 죄다! 그것은 죄다!”라고 말합니다. 이렇듯 우리 신앙생활에서 양심은 대단히 중요한 기능을 행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잡혀 공회 앞에서 연설할 때 사도행전 23장 1절을 보니 “형제들이 오늘날가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섬겼노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 열심을 다해 섬기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양심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 열심을 다하는 섬김이 바른 섬김은 되지 못합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과 바르게 하는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르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바르게 하는 것은 양심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3장 9절에서 양심을 버린 사람은 ‘믿음에 관하여 파산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양심을 버리면 믿음이라는 배는 제대로 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양심 따라 산다고 해도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양심에 악이 들어올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0장 22절을 봅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성경에는 ‘악이 들어온 양심, 부패한 양심’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2절에는 “화인 맞은 양심”, 고린도전서 8장 7절에는 “더러워진 양심”, 고린도전서 8장 12절에는 “악한 양심, 상한 양심”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양심은 악한 것도 있기 때문에 양심이 선한 양심, 착한 양심이 먼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한 양심이란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된 양심을 말합니다. 보편타당성이 있는 하나님의 원리를 받아들인 양심을 선한 양심이라고 합니다. 가장 보편타당성 있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말씀으로 양육된 양심이라야 그 양심이 착한 양심이고, 선한 양심인 것입니다. 불교의 교리로 양육된 양심, 이단의 교리로 양육된 양심은 선한 양심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에 언제부터인가 ‘양심적 병역 거부’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단자들이 자신의 양심 때문에 군대 가기를 거부하고 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른 양심입니까? 착한 양심입니까?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가서 고생하고 나라를 지키다가 돌아오는 데 자기만 거부하는 것은 착한 양심이 아닙니다. 이단 양심에 불과합니다. 보편타당성이 없는 양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양심에 악을 깨닫기를 원하시고, 깨끗한 양심으로 섬김 받기를 원하십니다.

1. 요셉 형들의 양심의 부패

  창세기 42장을 보면 요셉의 형들의 양심의 부패를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42장의 이야기는 요셉이 구덩이에 빠진지 22년이 지난 뒤의 이야기입니다. 구덩이에 빠진 나이가 17세, 총리가 된 나이가 30세입니다. 그리고 요셉의 꿈 해석대로 풍년이 지난 지 7년이 되었습니다. 흉년이 시작된 지 2년이 지나니까 먹을 것이 없어서 요셉의 형들이 지금 요셉에게 온 것입니다. 이렇게 22년의 세월이 흘러 요셉의 나이가 39세가 되었습니다.

  애굽에, 가나안 땅에, 온 땅에 기근이 임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사는 형들이 먹을 것이 없기 때문에 양곡을 얻으러 요셉에게 왔습니다. 요셉은 그들이 형인 줄 알아보지만 형들은 외국에서 22년 동안 산 요셉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외국 생활을 오래하면 그 나라사람처럼 보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어떻게 합니까? 모르는체하고 스파이 누명을 씌웁니다. 그러자 형들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42장 9절을 보겠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이렇게 묻자 10절, 11절에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주여 아니니이다 종들은 곡물을 사러 왔나이다 우리는 다 한 사람의 아들로서 독실한 자니 종들은 정탐이 아니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독실’이 무슨 뜻입니까? ‘독실’은 영어로 ‘Honest(정직)’입니다. 이들이 과연 정직한 사람입니까? 이들의 양심은 22년 동안 마비가 되었습니다. 이미 마비가 되어 자신들이 정직하지 못한 사람인 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양심이 어떻게 마비되었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장남 르우벤은 자기의 서모 빌하를 통간했습니다. 둘째, 셋째는 시므온과 레위는 여동생 디나의 겁탈 사건이 발생하자 세겜 남자들을 속여 할례 받게 하고 아파서 누워있는 틈을 타서 모두 죽였습니다. 넷째 아들 유다는 어떻습니까? 유다에게 아들이 셋 있는데 두 아들은 너무 악해서 하나님이 죽이셨습니다. 그리고 말째 아들은 크면 며느리 다말에게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주지 않자 자신을 창녀로 속이고 시아버지 유다와 관계를 맺고 그 씨를 잉태했습니다. 나머지 형들은 어떻습니까? 요셉을 죽이려 했고, 노예로 판 후에는 아버지 야곱에게 와서 악한 짐승이 동생을 잡아먹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들은 거짓말쟁이요, 잔인한 자들입니다. 이것이 독실한 것입니까? 정직한 것입니까? 그리고 요셉에 가족에 대해 자세히 묻자 뭐라고 대답합니까? 13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가로되 주의 종 우리들은 십 이 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 말째 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 없어지다니요. 바로 앞에 총리가 되어 서 있는데 말입니다. 이들의 양심이 22년 동안 얼마나 악하고 부패해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양심이 악해지면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없습니다. 

2. 양심의 악을 깨닫게 하시는 방편

  하나님께서는 양심의 악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몇 가지 방편을 쓰셨습니다. 첫째, 요셉의 형들의 삶 가운데 어려운 압박을 주셨습니다. 먼저 경제적인 압박이 왔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애굽에 와서 양식을 구해야 하는 압박이 온 것입니다. 또 육체적인 압박이 왔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삼일 동안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심리적인 압박이 왔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애굽에는 양식이 있으니 가서 구해 오거라”라고 말할 때마다 형들은 요셉을 판 곳이 애굽이기 때문에 양심의 악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압박의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양심의 악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입니
다.

  둘째,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심으로 양심의 악을 깨닫게 하십니다. 형들은 22년 전에 뿌린 씨대로 거두고 있습니다. 22년 전에 요셉은 형들이 잘 있는지 안부를 물으러 온 것인데 요셉을 아버지의 스파이로 몰아 구덩이에 집어넣고 노예로 팔아버린 것입니다. 무고한 사람을 스파이라는 누명을 씌웠기 때문에 똑같은 누명을 쓰게 된 것입니다. 요셉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구덩이에 집어넣었기 때문에 형들은 삼일 동안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주를 통치하시는 대원리입니다. 21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 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심은 것을 거둘 때 우리는 ‘아차!’하게 됩니다. 양심의 악을 깨닫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양심의 악을 깨닫게 하십니다. 요한복음 8장을 보면 유대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예수님께로 데려오는 사건이 있습니다. 시험을 하려고 데리고 온 것입니다. “모세는 율법에 간음하다 잡힌 여인은 돌로 치라하였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아주 어려운 시험입니다. 돌로 치라하면 평소에 사랑을 강조한 예수님이 사랑이 없다고 할 것이고, 치지 말라하면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거짓 선생이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땅에 글자를 쓰시기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일어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8장 7절을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큰소리로 말씀하시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마치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슬금슬금 그 자리를 떠나고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양심의 악을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만을 가지고도 양심의 악이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다시 창세기 42장 18절을 보겠습니다. “삼일 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입니까! 이 형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아브라함의 증손이요, 이삭의 손자요, 야곱의 아들들로서 하나님의 택함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들 입에서는 ‘하나님’이라는 말이 한마디도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겨우 28절에 자루에 있는 돈이 들통 나니까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고”하면서 말하고 있는 것이 다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들의 양심이 이 말을 들을 때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주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 하지 않으면 길가의 돌들이 소리 지르고, 아이들이 부르짖을 것입니다.

3. 양심의 악을 씻는 방편

  악을 깨달으면 악을 씻어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양심의 악을 씻어내는 여러 가지 방편이 나와 있습니다. 첫째, 자신의 양심에 악이 있음을 인정해야 됩니다. 시인을 해야 합니다. 양심의 가책은 세월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오래 전에 지은 죄도 양심의 가책으로 남아 있으면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인정해야 됩니다. 21절에 보니까 형들이 죄를 인정합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22절에도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너희더러 그 아이에게 득죄하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피 값을 내게 되었도다”라고 죄를 인정합니다. 이렇게 죄를 인정하는 것이 치료받는 첩경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비하신 하나님,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2장에 흐르는 주된 내용은 ‘요셉의 자비’입니다. 요셉이 형들을 삼일 동안 가둔 것은 형들의 악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지 복수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가두면서도 절망할까봐 자신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니 너무 크게 절망하지 말라는 힌트도 줍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형들이 서로 자신들의 죄를 인정할 때 그 말을 듣고 그 자리를 떠나가 울고 다시 돌아오는 요셉의 모습을 보십시오. 또 형들이 자신들의 자루에 돈이 들었다고 다시 가져왔을 때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가지라고 말하는 요셉의 모습을 볼 때 얼마나 자비합니까? 요셉의 자비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그림자입니다. 하나님은 잘못된 사람이 잘못됨을 인정하면 용서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악에 빠진 사람이 “나는 악에 빠졌으니 건져주세요!”하면 건져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나는 지옥가야 마땅한 사람입니다!”하며 회개하고 예수 믿은 사람은 하나님이 천국으로 옮겨주시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비의 극치는 신약성경에 나타납니다. 우리의 양심의 악을 씻어주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히브리서 9장 14절에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 양심의 악을 능히 씻어내는 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심의 악이 있으면 인정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내 양심의 악을 씻어주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우리 양심은 깨끗하게 되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게 될 줄로 믿습니다.

(결론)
 
여러분의 삶 가운데 압박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 압박을 통해서 양심의 악을 깨우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영원한 지옥 형벌에서 건져내어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자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의 악을 인정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고, 그 피로 악을 씻어 내셔서 선한 양심, 착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인간이 살 길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는 길입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양심에 악과 부패가 있으면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데 장애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바울처럼 힘써야 됩니다. 사도행전 24장 16절
에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힘써야 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사람에 대해서도 거리낌이 없는 양심을 갖기를 힘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시대가 아무리 어렵고 흉흉해도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착한 양심, 선한 양심으로 살면 됩니다. 여러분 모두가 착한 양심, 선한 양심을 따라 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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