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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경건 (마 6:1-6,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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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노강국 목사 (신시네티교회)

오늘 본문에서 언급되는 “구제와 기도와 금식”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경건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이라고 여겨지는 일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실제로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생활화하게 된 데에는 신, 구약 중간시대에 나왔다고 알려져 있는 토빗 書(The Book of Tobit)라는 문서에 근거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 신, 구약 사이에는 약 300~400년의 기간이 있어서, 이를 편의상 “신, 구약 중간시대”라고 합니다. 이 “신, 구약 중간시대”에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여기고 중요시한 문서들이 있는데, 이를 “외경(外經, Apocrypha)”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구약과 신약 성경을 “표준이 되는 경전”이란 의미로 “정경(正經, Canon)”이라고 말하는데 비해, 이 “외경”은 “이러한 표준에서는 제외된 경전”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외경 중에서 몇 권은 오늘날 카톨릭에서는 정경으로 받아들여 성경에 속해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외경 중에서 토빗서 12:8-9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금식과 구제와 의로써 기도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구제는 죽음으로부터 사람을 구원하며,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말씀에 근거하여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인으로서 마땅히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열심히 해야 경건한 삶을 이룰 수 있다고 여겨서 예수님 시대에는 이러한 세 가지의 경건 생활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경건의 생활은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아주 필수적인 자세입니다. 오늘날 건강이 중요하다하여 운동을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8). 그렇다면 어떤 점에서 이러한 경건의 생활이 유익할까요? 그것은 이러한 경건의 삶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바른 관계를 지탱해 나갈 수 있는 자세를 만들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구제하는 일을 볼 때, 이는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바르게 이끌어줄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대인(對人)관계에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여 늘 마음에 염려가 되는 분들은 자발적으로 구제하거나 남을 돕는 일들을 하고자 힘써 노력한다고 하면, 이러한 문제점은 해결될 가능성이 깊어질 것입니다.

또한 기도하는 생활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윤택하고 친밀하게 해 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줍니다. 이런 점에서 기도는 대신(對神)관계에 도움을 주는 경건의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허물이나 죄로 인하여 그리고 여러 가지 모습으로 하나님과 불편하다고 여기는 분들은 하나님께 늘 기도하는 습관과 하나님께 나의 마음을 솔직담백하게 전하고자 하는 열린 마음으로 늘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하게 유지됨으로 모든 삶에 진정한 자신감과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심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금식의 생활은 나 자신을 바르게 지켜줄 수 있다는 점에서 대자(對自)관계, 즉 “나 자신과의 관계”를 바르게 지탱해 나갈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에게 늘 콤플렉스를 느끼거나 열등감 혹은 우월의식에 사로잡혀 있어서 매사에 삶을 비뚤어지게 보게 되는 경향이 있다면, 금식을 해 보시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그리하여 나 위주의 생각이나 자세를 극복해보고 또한 진정한 나의 필요가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해 보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이렇게 구제와 기도와 금식 생활은 결국 “나”라고 하는 한 인격체를 바르고 온전한 모습으로 이끌고 갈 수 있게 해 주는 모습이라는 점에서 경건생활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구제와 기도와 금식의 생활을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아주 철저하게 시행하였다고 합니다. 기도는 매일 여러 번 하다시피 하고, 금식은 일주일에 두 번, 그리고 구제는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하고자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러한 구제와 기도와 금식의 삶을 스스로 잘 실행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건의 삶을 어느 누구에게 강조하기보다 나 스스로 먼저 생활하는 자세와 습관을 갖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고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이렇게 중요하고 유익한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예수님은 문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경건의 삶의 내용을 문제 삼으신 것이 아니라, 방법을 문제 삼으셨습니다. 그것은 이 세 가지의 경건 행위를 언급하시면서 말씀하시는 공통된 표현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참으로 공통된 표현들이 많이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공통적인 표현을 우리는 주의 깊게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 첫 번째 표현은 그것은 “사람에게 보이려고”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1절, 5절, 16절에 공통적으로 나오고, 특히 구제와 관련된 2절의 말씀에서는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라는 더 강한 표현으로 나옵니다. 아마 구제하는 일에 뒤따르는 사람들의 칭찬이 더 크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행위”를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와 같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이러한 경건의 행위가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로 향함으로 그 방향이 잘못된다면, 아무리 훌륭한 행위를 하더라도 그 의미가 없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행위 자체보다도 그 행위의 동기가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하나님의 일이라고 여기는 일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우리는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보통 “하나님의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일들을 우리는 나 스스로를 위해서 얼마든지 할 수도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일을 나를 위해서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일은 과연 하나님의 일일까요? 아니면 나의 일일까요? 두말할 것 없이 그것은 나의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무엇보다도 그 일을 하고자 하는 동기를 점검해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늘의 말씀은 바로 우리들이 하고자 하는 그 일의 동기와 목적이 치유되어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일이라도 그 일의 동기와 방향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가 참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둘째로 나타나는 공통된 표현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라는 말씀입니다(2절, 5절, 16절). 이 말씀의 단어는 상업적인 용어(Business language)라고 합니다. 문자적으로 풀이하면 “영수증을 받았다(To have a receipt)”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더 받을 것이 없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신앙생활에 있어서 밑지는 장사를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 양보하고 손해 보더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것이 없는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말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6-27). 사도 바울은 엉뚱한 방향, 곧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사람에게 영광 얻으려고 하는 그런 삶은 살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런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내 몸을 치는 것과 같은 자기와의 싸움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남이 알아주지 않을 것에 대한 아쉬움과 두려움, 안타까움을 극복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교묘하게라도 남이 알아주기를 기대하는 우리 사람들의 심리를 우리는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자기와의 싸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러한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라는 말씀을 얼마나 강조하셨는가 하는 사실 또한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 역시 공통된 표현에서 찾을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것은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라는 말씀을 하실 때 나타난 표현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씀입니다(2, 5, 16절). 여기서 “진실로”란 말은 바로 “아멘”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영어 성경 번역에는 “내가 진실로”라는 의미의 “Truly I say to you"라고 번역하지 않고, “Amen, I say to you"라고 번역한 곳도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그만큼 강조하며 말씀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이렇게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라고 하시면서 말씀하는 내용들은 특별히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에서 우리의 상을 이미 받는 자가 되지 않도록, 특히 남을 위한다고 여길 수 있는 이른바 “선한 행위들”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고자 하는 우리들의 본능적인 욕심을 넘어설 수 있는 자기 훈련이 필요합니다.

세 번째로 공통된 표현에서 우리는 이러한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위선적인 자세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모든 일들을 은밀한 가운데 하라는 것입니다. 3~4절,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6절,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17~18절,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이렇게 예수님은 행위의 은밀성을 강조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은밀함 속에서 만나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기도할 때의 모습으로 제시되는 “골방”은 그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보물 창고로 사용되는 방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잠글 수 있는 방”(E. Schweizer)이라는 뜻이랍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은밀성을 강조하시면서 더불어 강조하시는 것은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하나님을 “하나님”이라는 종교적 표현이 아닌, “아버지”라는 인간적 표현을 사용하시고, 그 아버지의 특징으로 “은밀함”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여기서 신앙인의 신비한 감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은밀한 만남이 바로 이러한 신앙인의 신비한 감격인 것입니다. 이러한 신비한 감격을 지닐 수 있기를 예수님께서는 바라시고 또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은밀함을 간직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해야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성경 주석가는 “우리의 뇌의 구조상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를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이 은밀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 5:16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어떻게 보면, 이 말씀은 은밀함을 강조하는 오늘 본문의 말씀과는 아주 대조적인 말씀으로 보입니다. 특히 구제와 같은 선행의 경우는 많은 사람에게 드러나야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될 큰 행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은밀함을 지니면서도 구제와 같은 선행을 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이러한 구제와 같은 선행을 공동체의 이름으로 할 때에 이러한 은밀함과 선행을 같이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 5:16의 말씀의 “너희 착한 행실”에서의 “너희”는 2인칭 복수형입니다. 반면에 마 6:2-4의 구제에 관한 말씀 가운데 “너”는 2인칭 단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구제와 같은 선행을 하되, 그 일들을 공동체의 이름으로 한다면 이러한 은밀함과 착한 행실을 겸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기도 운동을 펼친 바 있는 대천덕 신부(Archer Torrey)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전도하라고 내 보낼 때, 왜 두 사람씩 짝 지워 보냈는고 하면, 그것은 한 사람이 가면 사람들로부터 받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자기가 가로챌 수 있지만, 두 사람이 가면 하나님께 그 영광을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일리 있는 해석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라도 이러한 행위의 은밀성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야 우리는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의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독일이 통일되는 과정에서 서독의 교회는 동독의 교회를 많은 물질로 도왔다고 합니다. 서독의 교회는 아주 오래 전부터 동독의 교회를 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서독의 교회는 그 많은 도움을 서독 교회의 이름으로 도운 것이 아니라, WCC(World Council of Churches)라는 세계 교회협의회의 이름으로 도왔다고 합니다. 그러니 동독의 교회는 서독의 교회가 자기들을 돕는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지닐 수 있는 은밀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서독 교회의 은밀한 행위를 은밀한 중에 보시고 갚아주신 줄 압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의 경건행위가 실제로 하나님께 인정받음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심은 물론, 우리도 온전케 될 수 있게 해 주시고자 하신 예수님의 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담긴 예수님의 귀하신 의도를 깊이 간직하면서 우리의 모든 행위가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주시는 귀한 모습의 열매로 나타날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귀한 말씀을 바르게 잘 간직하여 우리의 모든 경건의 삶의 토대로 삼을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소위 “자기 PR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이러한 은밀함의 메시지는 현실성이 부족한지는 몰라도, 우리는 사람들에게 보임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가 아니라, 오직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보이며, 인정받고자 하는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저희들의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영광을 받으시는 귀한 일들이 많이 생겨질 수 있도록, 저희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주님의 가르침을 따를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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