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제자의 우선생활 (마 6:33 - 7:12)

  • 잡초 잡초
  • 195
  • 0

첨부 1


- 설교 : 김창인 목사 (광성교회)

본문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제자의 우선 생활』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제자로서 먼저 해야 될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 한 가지 일만 하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많은데 그 중에서도 꼭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먼저 해야 될 일을 제쳐놓고 나중에 하면 그 일도 안 되지만 그 인생 자체가 안됩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 예수님의 제자 된 사람들은 꼭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뜻으로 제목을 정하고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한 번은 산에 올라 가셔서 아주 보배로운 교훈을 제자들에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7장을 가리켜 '산상보훈'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산 위에서 베푸신 아주 보배로운 교훈이란 뜻인데 이때의 대상은 바로 제자들이었고 오늘의 말씀은 그 내용중의 일부입니다. 이 내용은 주로 제자 된 사람에게는 먼저 해야 될 일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을 닮아가야 되고 또 예수님처럼 살아가야 될 제자 된 우리들로서는 본문이 가르쳐 주는 대로 이것 저것 다 제쳐놓고 먼저 해야 될 일이 있다는 말씀이기에 그 가르침을 배우려고 합니다.

I. 영적인 생활(33-34절)

33, 34절을 설명 드리면 우리는 육신적인 생활 혹은 세속적인 생활이 있는데 이 세속적인 생활보다는 하늘 나라를 위한 영적인 생활과 천국을 위한 생활을 먼저 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주일은 일주일 동안에 장사가 제일 잘되는 날입니다. 그런데 이 날 문을 열어 놓고 돈을 벌어야 하느냐 아니면 문을 닫고 예배를 드려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돈을 벌면 육신에 좋고, 예배를 드리면 내 믿음에 좋은데 그럴 때에는 문닫고 나가서 하나님께 영적으로 예배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꼭 해야할 일이란 말씀입니다.

이 내용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는 것입니다. 그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요, 그의 의는 하나님의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의를 우리가 힘입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영과 육의 두 가지 요소로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에서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육이라고 하는 것은 흙을 빚어서 만들었기 때문에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요 또 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육신이란 짐승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짐승이란 잘 먹여주고 잘 재워주면 좋다고 꼬리를 흔듭니다. 그저 먹고 자는 것 밖에 모르는 짐승처럼 우리 육신도 몸만 편하게 해주면 좋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은 하나님이 안 계셔도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람에게는 영과 육신, 이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두 가지 생활을 할 수밖에 없을 때 나는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에 영적인 생활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적인 생활을 위주로 하게 되면 천사의 경지를 넘어서서 마지막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타락하여 자꾸 짐승의 세계로 떨어지게 되면 이런 사람은 사람인지 짐승인지 모를 지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타락하면 악마의 세계까지 가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영적인 생활을 하면 그리스도의 분량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은 마주 앉으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말 밖에 하지 못하고 또 눈만 뜨면 그저 먹을 것, 입을 것, 돈만 찾다가 그저 먹고 입고, 자고 깨고 그러다가 죽고 만다면 그것이 사람의 생활의 전부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짐승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되시는 예수님을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내가 염려하고 걱정한 것보다 더 주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내가 백 만원이 있어야 하겠다고 염려했는데 영적으로 살다보면 하나님께서 백 만원보다 더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나에게 프라이드 차가 하나 있었으면 하고 생각하면 그것보다 더 좋은 소나타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우리가 해야할 것은 영적인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 된 우리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원한다" 고 하였던 것입니다.

II. 자기 갱신의 생활(7장 1-5절)

7장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계셨는데 아주 젊은 여자 하나를 백성들이 끌고 오는데 그것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주동이 되어서 그 여자의 머리채를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저마다 양손에 돌멩이들을 하나씩 쥐고서 갖은 욕설을 다 퍼붓고, 갖은 모욕을 다하면서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 당당히 세워 놓고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라고 하였습니다. 현장에서 잡혀왔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뒤좇아 다녔다는 말도 됩니다. 왜냐하면 남녀가 간통하는 장면을 현장에서 잡기란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고소하는 사람들이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당장 돌로 쳐죽이라고 했는데 죽일까요, 말까요 하면서 예수님께 대드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예수를 궁지로 몰아 책잡으려고 한 것입니다. 죽이라고 하면 사형 집행권이 없는 예수님이 월권이 되고, 즉 로마법을 어기는 것이 되고 죽이지 말라고 하면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니 이래도 걸리고, 저래도 걸리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다분히 고의적인 것이 아닙니까? 예수를 궁지로 몰아넣기 위해서 오랫동안 한 여자의 뒤를 따라 다녔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악착스러운 인간들입니다.

이렇게 소란스럽고 위급한 때에 예수님께서는 땅에 글씨를 쓰셨습니다. 이것을 두고 어떤 신학자는 말하기를 제일 앞장서서 외치는 사람의 죄를 상세하게 땅에 쓰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치라" 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고소하던 사람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만약에 돌로 치게 되면 그 자신도 역시 자기 죄 때문에 돌에 맞아 죽게 될테니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더 있다가는 자기의 죄만 드러나게 될 것을 알게 되자 그만 도망을 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사람들도 슬금슬금 모두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이때 그 여자는 예수님께 용서함을 받고 돌아가 새 삶을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찾아보아야 될 것은 정작 죽일 놈은 나 자신인데 다른 사람의 죄만 찾기 위해서 악착같이 좇아 다녔다는 말입니다. 즉 죽일 놈은 나인데 네가 죽일 놈이라고 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고 하니 칠 수가 없을 뿐 아니라 하나같이 도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뭡니까? "무엇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흉본다" 는 우리 속담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정작 죽을 놈은 누구고 혼날 놈은 누군데, 정작 부서지고 갱신되어야 할 사람은 누군데, 자꾸 남을 비판한다는 말입니다. 자기 주제는 파악하지 못하고 남을 비판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먼저 자기 주제부터 파악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눈 속에 들보가 있으면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겠다고 달려들지 말고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부터 먼저 빼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갱신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갱신은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집안 꼴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 남을 탓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바로 나에게 책임이 있으니 나로부터 변화가 일어나야 되는 것이며 자기 갱신부터 먼저 해야 하는 것입니다.

III. 가치관 정립의 생활(6절)

6절에 보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의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함이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개나 돼지들은 거룩하고 값진 것을 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귀한 것을 아는 사람이 귀한 것을 받고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개나 돼지는 개 같은 인간, 돼지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개나 돼지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족속들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사람의 탈을 쓰고도 하나님을 모르는 개와 돼지 같은 인간들이 많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 개나 돼지는 윤리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자기 아버지, 자기 어머니를 알지 못합니다. 그저 먹을 것만 갖다주면 혼자 먹겠다고 물고 달려듭니다. 위아래도 없고 형제도 없습니다.

오늘날도 윤리가 없는 시대, 즉 윤리 부재의 시대가 되고 말았기 때문에 위아래가 없습니다. 학생들이 총장실에 가서 난장판을 만들어 놓는 것을 보세요. 그렇게 해 놓고서도 잘못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제적시킨다고 하니까 겨우 한다는 것이 대자보에다 한마디 사과한다고 하면서 뒤에 가서는 꼭 말꼬리를 답니다. 이것이 잘못했다는 것입니까? 또 나를 가르치는 선생님에게 무엇이라고 합니까? "살찐 돼지 새끼" 라고 합니다. 여교수가 오면 "아줌마는 돌아가서 설거지나 하라" 고 합니다. 어제까지 가르침을 받던 선생님에게 아줌마가 뭡니까? 그러고서도 앞날을 끌고 나갈 이 나라의 지성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글자는 배웠어도 사람 됨됨이는 못 배워서 그렇습니다. 윤리가 없습니다. 그뿐입니까? 자기보다 수준이 나은 사람보고는 부르조아라고 매도합니다. 그렇다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도와주느냐 하면 그것도 하지 않습니다. 아주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런 까닭에 개나 돼지 같은 인간에게는 윤리가 없는 것입니다.

셋째, 개나 돼지는 먹을 것 밖에 모릅니다. 먹을 것만 주면 제일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인간에게 거룩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진주와 돼지 국물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진주는 막 밟아 버리고 국물은 좋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거룩한 것은 오직 복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천상 천하에 오직 거룩하신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내가 아무리 성자로 살아도 인간은 거룩한 존재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거룩하고 하나님과 우리가 관계가 맺어질 때에 그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라 일컬음을 받는 것뿐입니다.

여러분! 진주가 무엇입니까? 진주란 예수께서 비유를 들어 사용하셨던 것처럼 천국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안중에도 없는 사람, 이 세상에서 먹을 것, 입을 것만 주면 만사 형통으로 생각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가치관이 정립되지 아니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 먹을 것만 갖다 쌓아 놓았다고 해서 그것이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없이 내가 세상의 온갖 것을 다 가졌다고 해서 그것이 복일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의 가치관을 바로 정립하라고 본문은 말합니다. 땅위의 것이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 나라의 것이 더 가치가 있고 땅위의 것이 더 값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더 귀하다는 것입니다. 이 가치관을 바로 정립하는 것이 성도의 우선 생활입니다. 내가 어디에다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생활이 달라지고 인격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치관 정립을 우선해야 합니다. 이때 그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IV. 기도의 생활(7-11절)

7절에서 11절 말씀을 보면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보다도 기도 생활을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문에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은 표현상 여러 가지이나 이것은 모두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구하는 이가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리리라는 말씀처럼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겠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기를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있는데 그 아버지는 아주 고약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무리 고약하다고 하더라도 생선을 먹고 싶어하고 알을 먹고 싶어하는 아들에게 생선과 알 대신에 뱀을 주며 전갈을 주는 아버지는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악한 아버지라고 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려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밤낮 구하는 자녀 된 성도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꼭 기도하는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기도 생활은 아무리 일이 급해도 먼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모든 일을 시작하기 전에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30년 사생활이 끝나고 공생활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광야에 가서 40일 동안을 기도하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열두 제자를 키워서 하늘 나라 복음 사업을 확장시키기 바로 전에도 산에 가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신 후에 부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속죄의 완성을 하시기 전에도 바로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밤을 새우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이렇게 모든 일을 하시기 전에는 늘 기도부터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에서도 기도를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연약합니다. 연약한 까닭에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우리는 부족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덜 된 것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과 사울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다윗은 항상 먼저 기도한 사람입니다. 인간적으로 다윗을 사울과 견주어 볼 때 모자라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나 다윗은 늘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다른 점입니다. 그러나 다윗도 기도하지 않아서 큰 일 난 적이 한 번 있었습니다. 그 때가 언제입니까? 바로 충성스런 젊은 장수인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고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안 나단이 다윗을 사정없이 책망하자 다윗은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통회 자복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지어 주십시오 제 마음이 여자를 보고 왜 엉큼한 생각을 가지고 이런 엄청난 짓을 저질렀습니까? 나의 마음에 정한 마음을 주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이렇게 다윗이 일을 저질러 놓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그런 잘못을 저지르기 전에 기도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충성스런 젊은 부하의 아내가 목욕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움직일 때 하나님 저 여자를 내가 데려 올까요? 말까요? 하고 기도했었다면 틀림없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또 데려다 놓고도 하나님 이 여자와 관계를 맺을까요? 말까요? 기도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 잘하던 다윗이 그날따라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러 놓고 나서야 깨닫고 회개하고 기도를 드리게 되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습니까? 침상이 젖고 진액이 마를 정도로 통회하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일을 시작하기 전에 기도하는 것과 일을 저질러 놓고 기도하는 것에는 이만큼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제자 된 사람으로서 마땅히 할 일입니다.

V. 더불어의 생활(12절)

본문에 보면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나만 의식하고 살게 되면 남에게 피해를 주게 됩니다. 피해만 주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발전하면 너를 희생시켜야 내가 산다고 하는 사고 방식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나만 의식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너를 의식하고 살아야 함을 본문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런 내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대접 하늘의 시민 받고 싶으면 남에게 먼저 대접을 해야하고, 내가 피해 받는 것이 싫으면 절대로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나만을 의식하고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항상 남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더불어의 삶입니다.

제가 차를 몰고 다니면서 느끼는 것이 참 많습니다. 큰길로 갈 때는 괜찮은데 골목길을 다닐 때는 당연히 한쪽으로 오고 가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차를 할 때에도 한쪽에다 대면 큰 불편이 없는데 자기만 편하게 아무렇게나 차를 대놓고 볼일을 봅니다. 그러다가 뒤차가 여러번 경적을 울려야 나와서 미안하다는 인사도 없이 마지못해 차를 비켜 줍니다. 치워 주면 됐지 무슨 말이 많으냐는 자세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경험을 많이 해 보셨을 것입니다. 이래도 되는 것입니까? 우리는 전혀 이웃을 의식하고 살지를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부터 너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을 어울림의 생활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에도 해당이 됩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자기가 조금 불편하면 몸을 비비꼬고 야단입니다. 예배란 모든 성도가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조금 불편해도 옆 사람에게 방해가 될까 봐 조심해야 하는데 그런 것은 조금도 안중에 없고 자기 생각만 하면서 예배 분위기를 망쳐 놓습니다. 이런 것부터 생각하고 지킬 줄 아는 사람이 바로 예배드리는 사람이요 예수님의 제자인 것입니다. 예배도 더불어 드림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를 드릴 때에도 또 사회 생활을 할 때에도,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남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조심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이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남에게 인정받고 대접받고 싶으면 먼저 남을 생각하고 인정해 주라는 말씀이 아닙니까? 남을 존중해 주고 존경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웃을 의식하고 사는 사람이 해야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제자의 우선 생활은 영적인 생활을 우선해야 하고, 자기 갱신을 먼저 해야 하고, 가치관 정립을 먼저 하고, 기도하는 생활을 먼저하고, 더불어의 삶을 우선해야 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