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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강력한 절제 (갈 5: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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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서해원 목사 (대광교회)

  세상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즐기는 것 중에 대표적인 것이 스포츠,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스포츠는 남녀노소를 떠나 모두가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미 올림픽을 세계인의 축제라 불렀고, 월드컵의 열기가 대단한 것을 압니다. 미국은 스포츠를 떠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미식축구를 비롯해서 야구, 농구가 해마다 정기적으로 순환이 되어 자기가 좋아하는 팀을 열광적으로 응원하는 것을 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놀란 것은 보통 미식축구가 1월 마지막주일 저녁에 하는데, 어느 교회는 아예 예배를 없애고 축구를 보는 날로 정한 것입니다. 아무리 운동이 좋아도 이건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도 대단합니다. 이미 월드컵을 통해 그 사실이 입증이 되었습니다.

  가만히 보면, 운동의 핵심은 호흡조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운동이 대부분 그렇습니다. 호흡조절이 필수라는 것입니다. 모든 운동의 기본이라고 하는 마라톤은 물론이고, 수영, 골프, 역도, 축구, 야구, 모두가 어떻게 호흡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수들에게 호흡조절이 훈련의 기본입니다. 모든 운동의 훈련이 여기에 집중되어 있고, 이것을 중심으로 선수들이 연습을 합니다. 호흡조절이 정말 중요합니다.

  믿음의 훈련도, 삶의 성숙도, 신앙의 열매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의 삶을 위한 가장 필수적인 연습은 바로 영적 호흡조절에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큼 자기를 조절하느냐, 바로 이것이 성공과 실패의 열쇠입니다.
성령의 마지막 열매인 절제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절제는 곧 조절을 말합니다. 운동선수가 호흡을 조절하듯, 우리가 모든 삶의 조절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조절할 것이 무엇일까요? 본문은 그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그것을 마음에 담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감정의 조절입니다. 24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정’이 바로 정욕, 열정, 감정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부름을 받고 믿음으로 사는 삶의 길은 바로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고, 나의 감정을 조절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절제의 열매를 맺는 길입니다.

  감정은 인격의 3요소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감정은 지식, 의지와 함께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될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감정이 있기에 우리가 울고, 웃습니다. 감정이 있기에 우리가 말하고 표현하며 삽니다. 감정이 있기에 우리가 받아드리고 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감정의 아름다움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도 세상에서 감정의 흐름을 따라 사셨습니다. 주님도 때로는 슬픔에 눈물을 흘리셨고, 분노도 발하셨습니다.

  문제는 바로 그 감정이 기복이 없이 일정하게, 정상적으로 가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감정이 폭발하는 것입니다. 정상호흡이 아니라 호흡이 거칠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을 조절하는 힘이 신앙이요, 우리가 절제의 열매를 맺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가장 큰 실패의 대표적인 모델이 ‘모세’입니다. 모세는 감정을 조절하는데 실패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온유함으로 백성들을 지도했던 모세가 한순간에 감정의 폭발로 큰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이 패역한 너희들아’ 하면서 안될 말이 나왔고, 하지 말아야 행동이 나온 것입니다. 이것으로 모세의 생애에 커다란 변화가 왔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압니다.
감정이라는 것이 순간적인 것이기에 조절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릅니다. 살인자들의 대부분은 바로 이 감정조절의 실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특별하게 자기의지로 죽이겠다는 것을 빼놓고, 모두 감정조절의 실패에서 사람이 분노를 발하고, 집어던지고, 칼을 들이대고,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정조절을 잘해서 성공한 예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모델이 ‘사도요한’입니다. 처음 그가 주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을 때의 별명이 ‘보아너게’였습니다. 이 말은 ‘우뢰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이 별명에서 보는 것처럼, 요한은 급하고, 거칠고,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쉽게 분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날 사마리아로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는데, 그 성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자 요한은 그 도시를 불바다로 만들어야겠다고 말한 사람입니다. 이처럼 거칠고 감정조절이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변한 지 아십니까? 신약성경에서 ‘사랑’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게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요한1,2,3서는 모두 요한이 기록한 성경입니다. 이 모든 성경의 주제가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로 시작되는 요한복음 3장 16절은 요한이 기록한 말씀입니다. 그는 사랑을 빼놓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사도로 변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기질이 변한 것이 아닙니다. 조절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감정을 조절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감정을 조절하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이것이 절제의 열매를 맺는 길입니다. 이런 성령의 사람으로 성숙하게 변해 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욕심의 조절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정’만이 아니라 ‘욕심’까지도 포함됩니다. 그래서 ‘정과 욕심’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욕심을 조절하고, 다스리는 것이 절제입니다. 감정만큼 중요한 요소가 욕심이라고 믿습니다. 욕심을 다스려야 하고, 이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왜 성경이 욕심을 다스리라고 할까요? 왜 하나님은 욕심을 부리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욕심이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한이 없습니다. 통제하지 않으면 위험한 것입니다.

  현대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 중에 ‘테네시 윌리암스’라는 유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연극하면 이 사람의 작품을 먼저 떠올릴 만큼 이름이 알려진 사람입니다. 1947년 12월 3일, 한해가 저물어 가는 요즘과 같은 시기에 뉴욕의 한 극장에서 이 사람의 작품이 공연이 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5년 후, 그의 작품에 영화로도 만들어져 아카데미상을 석권하기도 했습니다. 그 연극의 제목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입니다. 제목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주인공의 끊임없는 욕망이 끝이 어디인가를 날카롭게 지적해 주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주인공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미국 남부 뉴올리언즈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신경증세의 기질과 창부적 성격을 지닌 그녀는 과거의 전통과 교양으로 욕망을 억누르며 외롭게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거기에서 동생 남편에게 겁탈 당하면서 억제했던 욕망을 분출시킵니다. 하지만 결국 미쳐서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맙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은 누구나 욕망의 전차를 타고 싶어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능적 속성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욕망은 절제만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통제하지 못하여 결국 욕망의 끝이 비극일 수밖에 없음을 이 작품을 통해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를 가지면 둘을 갖고 싶고, 둘이 있으면 셋을 생각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만족할 줄 모르고, 자족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끊임없이 채워야 하고,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뭔가 조절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에도 욕심을 부려 좋게된 예가 없습니다. 아간의 욕심이 이스라엘의 큰 실패를 경험하게 했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아합 왕의 욕심이 착하고 선한 사람 나봇을 죽이는 살인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가룟유다의 욕심이 스승을 배반하는 파렴치한 결과를 낳게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욕심으로 모두가 망한 사람입니다. 욕심은 반드시 좋지 않은 결과를 만듭니다. 반드시 죄를 만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느니라”

  욕심을 조절해야 합니다. 욕망을 철저히 통제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늘 자족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지금 나의 삶에 감사와 만족과 수용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서부터 욕망은 통제됩니다. 욕망의 조절을 통해, 절제의 열매를 맺으면서 주님을 기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육체의 조절입니다. 본문은 신앙에 있어서 대비되는 두 영역을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의 일이 있고, 다른 하나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서로 대비시키면서 23절의 끝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여기 이 말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말은 곧, 대비되는 두 영역을 철저한 통제와 절제를 통해 다스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열매도, 육체의 일도 금지할 법이 없습니다. 오직 자기자신의 통제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잘 조절하는 힘에서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고, 어느 때는 육체의 일을 멀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반드시 맺어야 하는 긍정적인 삶의 모습이라면, 육체의 일은 날마다 신앙인이 버려야 할 옛사람의 모습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알겠는데 그렇다면 육체의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19절부터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여기 적어도 15가지가 적혀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9가지인데, 이것 맺는 것보다 우리가 버리고 또 버려야 할 것이 더 많다는 결론입니다. 이것들을 조절하는 것이 절제입니다. 이것을 통제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여기에 언급된 것을 자신의 삶에 비추어 보십시오. 우리가 예수 믿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면서도 끊임없이 우리의 발목을 잡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이 전혀 없어야 신앙인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에게도 끊임없이 이런 것이 얼마든지 자리 잡을 수 있고,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넘어 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나를 생각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가 아니라 교회 밖에서, 예배를 드릴 때가 아니라 예배가 끝난 뒤에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일입니다.

  우리가 이런 육체의 일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방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통제하고, 다스려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이런 육체의 일을 멀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인 절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절제만이 가능합니다. 자기를 다스리는 영적 조절이 없이는 이길 방법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어떤 것에 대하여 현저하게 대비되는 두 영역을 비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육체와 영혼을 비교하고, 하늘과 땅을 비교합니다. 안과 밖을 비교하고, 성령과 사탄을 비교합니다. 이 두 가지를 비교하는 이유는 선택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가 없다는 것이 본질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세상도 사랑하고 하나님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세상과는 멀어지게 되고,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는 법입니다. 이 두 영역에서의 결단과 헌신을 촉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성경은 대비시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체의 일을 성령의 열매와 대비시키는 이유는 우리가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열매를 맺으면서 음행과 더러운 것을 행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화평의 열매를 맺으면서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을 이룰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충성의 열매를 맺으면서 술취함과 방탕함으로 자신을 팽개쳐 버릴 수가 없는 법입니다. 오직 조절의 힘만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절제가 중요하고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가운데 절제가 마지막으로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것의 취하는 것과 버리는 것은 오직 절제로서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제는 강력한 것입니다. 절제는 강력해야 합니다. 철저해야 합니다. 영적 긴장의 끈을 풀지 말아야 합니다.
내 삶은 취할 것도 있지만 버릴 것도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취하면서 육체의 일을 버려야 합니다. 버리고 취하면서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신앙의 본질은 승리에 있습니다. 우리는 승리해야 합니다. 이겨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승리하기를 원한다면 바울의 권면처럼 절제해야 합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절제의 삶으로 결단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생각했습니다. 하나하나 정말 귀한 것들입니다. 자연의 순리가 열매를 요구하듯, 신앙의 순리도 열매를 요구합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그리고 절제입니다. 나의 부족한 열매는 무엇인지 돌아보고, 남은 생애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주께로 가까이 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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