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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런 교회 되었으면(고전16:15~18) - 교역자회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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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황영복 목사

아더 밀러의 작품 중에 '세일즈맨의 죽음'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두가지의 질문을 제기합니다. '인간이 성공을 추구할 것이냐? 아니면 인간이 승리를 추구할 것이냐?' 하는 물음입니다. 성공과 승리, 승리와 성공, 얼핏 생각하면 같은 말 같지만 분명히 다릅니다.??이 작품의 주인공인 윌리 노만은 성공적인 세일즈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자살로 끝나고 맙니다. 세상 사람들은 분명히 그를 성공적인 사람으로 평가했는데, 실제로 그의 인생은 결국 패배자에 불과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겉으로는 성공한 것 같지만 실제에 있어서 패배한 인생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고 보면 세상적인 관점으로 본 성공,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현대에 있어서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되는 것은 한 인간을 평가함에 있어서 그가 가진 소유나 그가 배운 지식이나 그가 가지고 있는 기능이나 지위에 의해서 평가되고??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공의 기준도 다분히 그가 가진 소유나 권세에 두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소위 '평민 컴플렉스'에 걸릴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알고보면 조용히 아들 딸 낳고 착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그분들이 성공한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 특히 목회자들만큼이라도 성공을 올바로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성공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이냐? 말입니다.

성경이 말해주는 인간의 가치란 이같은 물질이나 기능이나 지위가 아닌 적어도 성경이 평가하는 기준은 하나님의 형상에 의한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어느 정도 남아 있느냐 또는 어느 정도 회복 되었느냐에 있습니다.??예수 믿는 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사람마다 다르지만 저는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를 사회학적 정의를 빌어 Value Orientation In Christ라고 봅니다. 즉, 그리스도안에서의 가치전환을 의미한다고 보고싶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무엇이 중요한가 하는 문제입니다. 무엇이 중요한가 하는 문제가 예수 믿기 전과 믿은 후로 바뀌었습니다. 믿기 전에는 나도 세상적인 가치관 따라 이것이 소중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보니 그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위해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생각하니 부끄럽기도 하고 한심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사도 바울을 보면 그가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 역시 가문을 자랑했고, 학벌을 자랑했고, 명예를 소중하게 생각했고, 소유를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에는 이전 것은 다 배설물과 같이 여겼다고 빌립보서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생각하는 바가 달라졌고, 판단하는 기준이 달라졌습니다.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졌습니다.??비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그가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가 권하노니'그랬습니다. 간곡하게 권하면서 강조하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보면, 여기에 세사람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다 고린도로 부터 온 사람들입니다. 이름하여 스데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 입니다. 사실 고린도 교회만큼 역사상 문제 많은 교회도 없습니다.

자 보세요, 교회 안에 분쟁이 있습니다.??파벌이 있었습니다. 바울파가 있고, 게바파가있고, 그리스도파가 있는가 하면 아볼로파가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비의 아내를 간음하는 부도덕이 있지요, 우상의 제물문제를 가지고 왈가왈부하지요, 교회 안에 있는 문제를 가지고 세상 법정으로 가지고 가지요, 결혼문제가 있고, 성만찬 문제가 있고, 은사문제로 시끄럽고 복잡합니다. 심지어는 사도바울의 사도권을 시비 걸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도 아닌 바울이 어떻게 사도가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좌우간 복잡한 교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런 저런 문제들로 인하여 바울은 지금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 문제들을 어떻게 수습할 것이냐? 내가 직접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하던 차에 고린도 교회로부터 사람들이 온 것입니다.??그들로 부터 뜻밖의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힘주어 말합니다. 이런 자들에게 복종하고, 이런 자들을 알아주라는 것입니다. 이런 자가 어떤 자들입니까? 어떤 자들에게 복종하라는 것입니까? 어떤 자들을 교회안에서 알아 주라는 것입니까?


저는 본문을 중심으로 "이런자들" 에게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그리고 나가서 우리??남지방회 모든 교회가 이런 교회, 이런 목회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그런 교회와 목회자와 성도가 되기를 소원해 봅니다.


1. 이런 자들은 섬기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15절을 보시면, "성도 섬기기로 작정을 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런 통계가 있습니다. 오래 믿은 사람일수록 거의가 봉사를 잘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는 몰라도 그저 흘러만 넘길 말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스데바나의 집은 달랐습니다. 저들은 예수님을 믿은 그 때부터 성도를 섬기기로 하였는데 아예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 작정을 하였다고 했으며 그러한 모습은 모든 성도들에게 진심으로 알려졌고, 심지어 바울에게 까지 알려졌습니다.

성도 섬기기로 했다는 본문 15절의 말씀에서 바울이 보다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기 때문에 스데바나의 가족이 어떤 방법으로 봉사를 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의 문화적인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주로 병든 자나 가난한 자를 돕는 일과 자기 집을 집회 장소로 내어놓은 것으로 봅니다(Godet).

"또한 작정한 줄을(e[taxan eJautouv") 너희가 아는 지라" 라는 후반 부 귀절에서 작정했다는 의미는 스스로를 준비시켰다 라는 뜻으로서 스데바나의 가정이 자발적이고도 헌신적으로 섬김의 봉사를 하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섬김을 받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섬기기로, 써비스 하기로, 디아코니아 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자고로 교회가 교회다와 지려면 이런 자들이 많아야 합니다. 스데바나 처럼 성도를 섬기기로 작정하며, 봉사에 투신하며, 섬기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합니다. 오늘 교회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섬기려는 사람은 없고, 섬김을 받겠다는 사람들 때문에 문제입니다. 네가 높으냐? 내가 높으냐? 하는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가정 사역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이제 본격적인 결혼시즌이 되었습니다마는 보세요, 결혼 후 1년이 어떤 때입니까? 아마 모르긴 해도 일생중 가장 행복한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 구약성경 신명기에 보면, 결혼 후 1년 동안은 전쟁중이라 해도 군대에 내보내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집에서 아내를 줄겁게 하며 보내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의 신세대 부부들은 결혼 후 1년이 가장 힘든 때라고 합니다. 가장 끔직하고 불행한 때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것 같습니까? 주도권 싸움때문입니다. 주도권 쟁탈전이 벌어집니다. 잡히느냐 아니면 잡느냐하는 문제를 가지고 신경전을 벌입니다. 엄청난 싸움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1년을 다 보내고 나니 이제는 아이가 생기지요? 그 다음엔 운명이니 팔자려니 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기에는 승자는 없고, 패자만 존재할 따름입니다. 그 좀 섬기기로 작정을 하면 얼마나 행복한 것입니까? 환상같은 결혼생활 1년을 보낼수 있건만 그 아까운 세월 싸우면서 다 보낸 것입니다. 이 무슨 짓들입니까? 얘?

지금 우리가 타고 다니는 기차나 비행기에는 좌석구분이 분명합니다. 미국서부 개척 시대에 타고 다니던 역마차에도 좌석 구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궁금하시지요? 그 구분은 이렇습니다.

1등석 표를 산 사람은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마차에 그대로 앉아 있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역마차가 가다가 고장이 나서 고치려고 할 때에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이 일등석 손님의 특권입니다.

  2등석 표를 산 사람은 마차가 고장이 났다 하면 일단은 내려야 합니다. 일단 내려서 구경을 하더라도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2등석입니다.

그러나 3등석 표를 가진 사람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마차가 고장이 났다 하면 손발 걷어 붙이고 마부와 함께 수리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3등석입니다.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고 하니? 교회 안에도 가만히 보면 1,2,3등 신자가 있더라구요? 항상 대접만 받으려는 신자가 있는가 하면, 어디 잘들 해봐라 하면서 뒷전에서 팔장끼고 구경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일이건 궂은 일이건 가리지 않고 손발 걷어 붙이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코 싸이드에서 빙빙 돌지 않습니다. 교회 안 깊숙히 들어와서 열심히 일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이제 놀라운 사실은 천국에서는 이세상의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 이땅에서 처럼 1,2,3등 순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천국문 가까이에 이르러서 주님이 명령하십니다. 뒤로 돌아 앞으로 오라고 말입니다. 누가 제일 먼저 들어가며, 누가 가장 먼저 주님을 뵈올수 있으며, 누가 가장 큰 영광을 받겠습니까? 소위 3등신자들입니다. 남보다 더 많이 땀 흘린 사람들입니다. 남보다 더 많이 섬김의 삶을 산 사람들입니다.

목회자분들이 잘아시는 테레사 수녀는 한평생 불쌍한 사람들과 보냈습니다. 어느날 기자가 물었습니다. '수녀님 주위에는 수녀님 보다 잘살고, 높은 벼슬가지고 호의호식하며 살고, 대접 받으며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이 부럽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 그때에 테레사 수녀가 무엇이라고 대답했는지 아십니까? 한 어린 아이의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허리를 굽히고 사는 사람은 위를 쳐다 볼 시간이 없습니다".

그녀는 죽어서도 존경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만약에 인간을 복제한다면 누구를 복제하고 싶으냐에 대해서 제 1위가 테레사 수녀였습니다. 죽어서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녀가 높은 존경과 사랑을 받는 것은??미모나 그가 가진 재산 때문이 아닙니다. 한 평생을 섬김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나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이요,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우리의 스승되시는 예수님은 어떠한 삶을 사셨습니까? 그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서 그 자리를 내어 놓으시고, 이땅에 오셔서 섬김의 삶을 살다 가신 분입니다.

막 10:45에 보면, "인자의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섬김을 받으시려 함이 아닌 도리어 섬기시려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섬김의 최고 절정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는데 있습니다. 당시의 문화적 배경으로 선생이 제자의 발을 씻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친히 몸으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 믿는 사람들이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 가겠다는 제자들입니까? 섬김을 받으려는 사람은 늘 원망과 불평이 쉬지 않는 법입니다. 섬김의 삶을 사셨던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요 12: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그러므로 저는 항상 다짐해 봅니다. 고린도 교회로부터 온 세사람 모양 나도 섬기는 목회를 지향 하겠노라고 말입니다. 우리 남지방회는 이미 소문이 나있는 그대로 서로 서로 섬기는 교회, 섬기는 성직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2. 이런 자들은 함께 일하며, 함께 수고하는 자들입니다.

16절에 보시면,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자에게 복종하라"고 했고, 17절에서는 "저희가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새번역에서는 '함께'라는 말씀이 세번 나옵니다.??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귀하게 여긴 것입니다.

빌 2:2에 보면,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말고...."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한 마음으로 일하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도 그렇고, 빌립보 교회도 그렇고, 독불장군식이었거든요. 거기서 분열이라는 결과가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즘 혼자서 돌불장군식 모양 일하는 것 인정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비하인드 맨이 필요한 때입니다. 뒤에서 조용히 협력하며,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사람들이 아쉬운 때입니다.

저는 신앙잡지에서??한 어머니의 간증에 많은 감동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그녀에게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날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자기가 연극에 뽑혔다면서 그렇게 좋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중요한 역활을 맡았는가 보다 싶어서 물었더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극 중에서 인기있는 가수 역할을 하는 주인공이 여러 관객들에게 박수를 받는데 그 가수에게 박수를 보내는 역할이었습니다. 엑스트라 뽑힌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 아들은 배역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냥 기뻐만 하더랍니다.??그의 이런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면서 그녀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하나님앞에 회개했다는 내용입니다.

그러고 보면,??어린아이게게서 배워야 할 어른이 어디 그 어머니뿐이겠습니까? 저마다 스타만 되려고 하면 죽도밥도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 보세요, 훌륭한 연극이 이루어지려면 주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조연도 필요하고, 무대에는 얼굴 한번 나타나지 않고 무대 뒤에 숨어서 음향이며, 조명이며, 음악, 소도구들을 맡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개막수까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훌륭한 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박수를 칠줄 아는 사람이 박수 받을 자격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함께 일할줄 아는 사람이 영광을 얻을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어느 재벌가의 말을 책에서 읽은 일이 있습니다. 좀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가끔 일본으로 사람들을 보내서 신기술을 배워오게 하는 일이 있다면서요? 맨 처음 몇명, 그 다음에 몇명, 그 다음에 몇명해서 좌우간 3차에 걸쳐서 보냈답니다. 그러니까 세번째에 가서는 일본 사람이 묻더랍니다. '그 왜 사람들을 자꾸 보내느냐고, 먼저 와서 교육받은 사람들은 다 어디 갔느냐구..'. '다른 회사로 가버렸습니다'했더니 심각한 말을 하더랍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 사람이 못사는 이유입니다". 자기네 나라 같으면 어디가서 기술을 배워 온다든가 아니면 새로운 방법을 배워 오면 모아 놓고 가르친 답니다. 공개적으로...??그래서 거기에서 더 좋은 아이디어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일본을 세워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기술을 배워오면 절대로 안 내놓습니다. 이것이 한국과 일본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 한때 베스트 셀러가 됐던 책 가운데 이런 책이 있습니다. "한국이 죽어도 일본을 따라잡지 못하는 18가지 이유" 제목도 길어요. 제목 부터가 기분은 나쁩니다. 그러나 읽어 보십시오. 많은 공감을 느낄 것입니다.

오늘의 문제는 팀웍의 문제입니다. 더불어 사는 세계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본문에서 힘주어 강조하는 것도 이 문제입니다. 합력하여 일하라는 것이요, 부족한 것은 서로 보충하면서 조화를 이루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진정한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개성들이 너무 강했습니다. 그 강한 개성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저마다 자기 잘났다는 것 때문에 파가 생기게 되고, 결국은 분열을 가져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슴 아픈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목회자들이 오히려 뒷짐집고 구경하는 일이 많답니다. 남지방회에 저도 싸이드에서 빙빙 겉도지 않기를 원합니다.

제가 23년 전에 개척해서 있었던 남지방회 소속으로 있다가 강서지방회로 나뉘어 졌다가 여러목사님들의 도움으로 친정에 다시 오게되었는데 여러 목사님들을 만나고 난 다음 참으로 모두가 다함께 일어나서 합력하여 도와주시고 은혜롭게 협력하며, 일하시며 목회를 하시는 것을 보고 은혜가 되고 귀한 사랑을 주시는 마음들을 체험하고, 더욱 감사를 느낍니다. 이자리에서 선배 목사님, 동역자 모든 목사님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남지방회가 앞으로도 더욱 협력하여 다함께 기쁨을 누렸으면 합니다.


?3. 이런 자들은??남의 마음을 시원케 해주는 사람들입니다.

18절에 보면, "저희가 나와 너희의 마음을 시원케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이런 자들을 알아주라"고 했습니다. 여기 '시원케 했다'는 말은 헬라어로 '아네파우산(ajnevpausan)'입니다. 영어로는 Refresh입니다. 이것을 표준번역에서는 '생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로, 새번역에서는 '즐겁게 해주었다'로, 공동번역에서는 '걱정을 덜어주었다'로, 현대어에서는 '용기를 주었다'로 각각 번역을 했습니다. 육체적인 쉼이나 회복보다는 영적인 기력을 회복하고 새로운 힘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다 아름다운 번역들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고개숙인 가장, 고개숙인 남자들이 많은 세상이고 보면 누군가가 이런 시대적인 사명을 감당해야만 합니다. 사회 전반 분위기가 나 아닌 남을 생각한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마음들이 점점 강팍해져 가고 있습니다. 요즘 짜증스러운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 보십시오. 얼굴들이 정상이 아닙니다. 모두가 싸우려고 덤벼들 것 같은 인상들입니다. 무서운 얼굴들입니다. 싸울 건덕지가 없어서 그렇지 사소한 일 가지고 시비를 거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말따툼 끝에 사람을 죽이는 세상입니다. 누군가가 중간에 나서서 화해의 사명을 감당해야만 합니다. 저는 이것이 목회자와 교회의 사명이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근심과 걱정을 덜어주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케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주님의 마음에 영원히 기억되고??모든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을 것이며, 이러한 성도들이 많이 모여 있을 때 그 교회는 행복한 믿음의 공동체, 교회천국이 될 것을 믿습니다.

목회자는 어쩌면 물질로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케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남을 섬기는 그 사랑과 배려가 사람을 시원케 하는 것임을 잊을 때가 있습니다.


목회하면서, 또한 살다보면 물질 문제보다도 어려운 것이 인간관계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교회안에서 시험드는 것도 알고보면, 인간 관계 속에서 오는 시험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많은 사람들과 접하면서 살다보면 대체로 몇가지의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① 남을 피곤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용기를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② 만나는것??자체가 좀 괴로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만나면 반갑고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③ 가능하면 일생 안만났으면 좋겠다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④ 하루라도 안보면 못견딜 정도로 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타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바울이 특별히 마음을 시원케 하는 오네시보로에 대해

딤후 1:16 절에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라고 말합니다.

오네시보로는 감옥에 갇힌 바울을 자주 찾아 위로하고 마음을 평안케 해 주었던 것입니다.

주정남이가 노래한 가사모양,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정말입니다. 나는 이 가운데 어떤 사람이며, 어떤 유형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저는 바라기는 남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답답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음을 시원케 해 주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T.V 선전에 나오는 대로 산소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말이란 것도 그렇습니다. 말을 할 때마다 '이 말을 하므로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그런 여유만 있어도 말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경우는 적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무심코 내뱉는 말로 인하여 상처를 주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이런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웃기만 해도 50%의 구제는 한 셈이다' 돈가지고 구제한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요즘같은 세상에서는 웃기만 해도 큰 구제를 하는 것이랍니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엘 갔더랍니다. 예수님이 천국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일일이 심사하고 계시더랍니다. 마태복음 25장, 성경에 있는 그대로 하더랍니다.

'너는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돌아 보았으니 들어가라'
'너는 내가 배고플때 먹을 것을 주었으니 들어가라'
' 헐벗었을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니 들어가라' 이렇게 한사람 한사람 체크 하시더랍니다.

이 사람,??아무리 생각해도 자기는 별로 한일이 없습니다.??그래서 두려운 마음 가지고 뒷편에 서 있는데 주님이 보시고 부르시더랍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너는 먹을 것을 준일도 없고, 그렇다고 마실것도, 입을 것도 준일이 없지마는 내가 고아로 있을 때에 딱한번 나를 찾아와서 웃기게 해 주었으니 너도 들어가라'하시더랍니다.

물론 구원의 교리와는 거리가 있지만 이 말은 남을 웃기게 하는 일도 하나님은 귀하게 보신다는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시인 이해인씨는 이렇게 읖고 있습니다. "살아 있을때 한번이라도 더 한마디의 기도를 하게 하소서. 살아 있을때 한번이라도 더 한마디의 찬미를 바치게 하소서. 살아 있을때 한번이라도 더 이웃에게 따뜻한 격려의 말과 웃음을 주게 하소서.". 이 얼마나 깨끗한 시입니까?

사도 바울의 마음이 지금 어떠 했을 것 같습니까?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면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세운 교회가 사분오열되고, 부도덕하고, 시끄럽고, 심지어 자신의 사도권을 의심합니다. 한마디로 죽을 맛입니다. 그런데 뜻밖의 이런 사람들이 바울에게 오므로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대신하여 일하는 결과가 되었고, 이들을 만나서 아름다운 소식을 접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바울의 마음을 시원케 해주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다시 용기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그의 로마 선교여행을 계획하게 됩니다.??????????

잠 25:13절에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우리 남지방회 소속된 모든 교회와 목회자 모든 분들이 이런 사명을 감당했으면 합니다. 21세기의 건강한 교회상을 정립해 가는 그런 소문난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교회는 소문만 잘나도 성장한다고 합니다. 그런 아름다운 소문을 풍기는 교회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건강해서 가정들이 건강하고, 가정이 건강해서 사회가 건강해 지는 복을 누렸으면 합니다.??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에게 오셔서 섬김의 은사, 동사동역의 은사, 남을 위로하는 긍휼의 은사를 풍성히 내려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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