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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어나 걸으라 (행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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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강인식 목사

  이 세상에는 육체적으로 혼자 설수 없는 수많은 불구자들이 있읍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더 많은 수의 정신적, 영적 불구자들이 있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저와 여러분들도 이런 유의 불구자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손이 있으면서도 남을 구제할 줄 모르고,
  발이 있으면서도 기도하러 나오지 못하고,
  머리가 있으면서도 깊이 생각할 줄 모르고,
  입이 있으면서도 전도하거나 찬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를 향해 주님은 일어나 걸으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행 3장에 있는 말씀을 중심으로 함께 우리 자신을 진단해 보면서 앉은뱅이 신자가 아니라 자기 발로 뛰어 일어나 걸으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런 신자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행 2:43절에 보면 사도들로 인해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고  하였읍니다.
  따라서 본문에 기록된 이적은 사도들이 행한 최초의 이적이라고 할수 있읍니다.
  그러면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첫째로 미문과 그 앞에 있는 앉은뱅이를 비교해 줍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 가면 몇개의 문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황금문이라고 불리우는 그 문을 그 당시에는 미문이라고 불렀읍니다. 

  당시 성전에는 열개의 문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을 아름다울 美자 미문이라고 불렀읍니다.  유대인들의 관습에 의하면 거지들이 동냥을 할 때에는 반드시 성전문 앞에서 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은 서로 뗄수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기때문에 성전문 앞에서 구걸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두개의 상반되는 장면을 대조하고 주목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외적으로는 가장 아름다운 미문안에,
  내적으로는 가장 비참한 앉은뱅이 거지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바로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외적으로는 아름답고 화려하지만 그 안에는 더럽고 비참한 꼴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미문은 금과 은으로 장식되어 있는 글자 그대로 아름다운 문입니다.
  ▣ 그러나 그 앞에 앉아있는 거지는 너무도 비참한 존재였습니다.
    스스로 설수 없는, 남의 힘으로만이 살 수 있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 무엇보다도 그는 불구자였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통을 많이 받았겠습니까?
  ▣ 또그는 거지였습니다.
    먹을게 없어서 구걸을 해야하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가난뱅이였습니다.
  ▣ 또 그는 성전에도 들어갈 수 없는 소외된 사람이었고 친구의
    도움없이는 한걸음도 움직일 수 없는 그런 비참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이처럼 외적으로는 화려하지만,
그러나 안으로는 이렇게 비참한 사람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행복한데 내적으로는 불행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말입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원죄가 인간을 이토록 비참하게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비극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을 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아무리 문화가 발달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잘 먹어도 내적으로는 역시 비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이런 비참한 모습을 먼저 발견해야 합니다.
  밖에있는 모습만 보고 안에있는 비참한 모습은 보지 못한다면 그 비극은 영원히 해결할수가 없읍니다.

  2. 거지 앉은뱅이의 요구를 살펴보겠습니다.
  3절에 보니까 "구걸하거늘"이라고 하였읍니다.
물론 거지로서 먹을 것을 요구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의식주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스스로 설 수 있는 온전한 몸, 즉 자활능력입니다. 

  그런데 그는 우선 먹는 문제가 더 시급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은 먹는 문제 때문에 꿈과 이상을 상실한 현대인의 모습과 너무도 흡사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동물인 인간에게만 서서 다닐 수 있도록 했을까요? 
  그것은  위를 보고 살라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위의 문제, 하나님과 나와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골 3:1절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것을 찾으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모든것을 더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중요한 것은 보다 근본적인 것에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바로 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가지느냐 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면 다른 것은 자연히 해결됩니다.
  즉 종적인 관계가 회복되면 횡적인 관계는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3. 두 사도가 어떻게 이적을 베풀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두 사도는 먼저 하나님께 대한 경건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번씩 기도를 했읍니다.
아침 9시, 낮 12시, 오후 3시 이렇게 세번을 가지는 데 보통 세시간씩 가집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당시 관습에 따라 성전을 향하여 갔다는 것은 바로 저들의 신앙심을 잘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경건의 힘 없이는 이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2) 또한 앉은뱅이를 주목하여 보았다고 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의 본질이 있읍니다.
기독교는 가난한 사람, 불구자, 고아와  과부들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권력있는 사람, 돈있는 사람, 지식있는 사람들을 주목해 보면서, 아부하고 따라가지만,

  그러나 기독교는 반대로 가난한 사람, 불구자, 고아와 과부들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가난은 나라도 어찌할수 없다는 말대로 근본적으로 저들을 부자가 되도록 도울 수는 없습니다.
  또 병자들을 다 치유할 수도 없습니다.
고아와 과부들을 다 구제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교회는, 이런 사람들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가 이런 불쌍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버리는 순간, 이미 하나님의 손에서 떠났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불쌍한 사람들을 항상 주목해보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이 죽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이 살기  위해서 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 주변을 보면 민주화의 문제가 심각합니다. 또 남북간의 문제도 심각합니다. 노사간의 문제도 심각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불행하게도 이런 문제를 해결할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주목해 보기는 해야 합니다.
관심을 가지고 위해서 기도는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해결할 힘은 없어도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해결할 능력을 주시든지 아니면 직접 해결해 주시든지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관심을 가지고 보는 것입니다.
사랑의 눈을 가지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눈을 감고 있습니다.
사실 당시 사도들은 성전으로 기도하기 위해서 가는 도중이었기 때문에 굉장히 바쁜 시간이었습니다. 
  여리고로 가는 사람이 강도를 만났을 때 제사장과 레위인이 바쁘다는 이유로 그냥 지나갔듯이 사도들도 그냥 지나갈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그렇습니다.
흔히 바쁘다는 핑계로 발뺌을 하기가 일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바빠도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못본체하지 말고 주목해 보야야 합니다.

  우리가 해결할 힘은 없어도 볼 수는 있습니다.
관심을 가질수는 있습니다.
  이것마저 없으면 우리는 이미 영적으로 죽은 존재와 같습니다.
  성도의 생명은 영적 감각이 있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3) 두 사도는 보다 근본적인 것을 앉은뱅이 거지에게 주었습니다.
  "은과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령했읍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남을 구제할 만한 충분한 돈은 없습니다.
병자들을 고칠만한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세상의 그 어느것 보다도 귀합니다.  능력이 있읍니다.

  이제 우리는 이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만 하면 됩니다.  일어나 걸으라고 명령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면 됩니다.
그러면 발과 발목이 힘을 얻습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적은 예수님 당시에만 있다고 생각지 마세요.
물론 그렇게 흔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도 기적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기 때문에 기적이 필요할 때는 언제고 일어납니다.
  병으로 신음하시는 분들 있읍니까?  믿고 구하세요.  일어나 걸으라는 말씀에 의지하여 믿고 일어나세요.
  그러면 놀라운 이적이 일어남을  체험할 것입니다.

  4. 끝으로 어떻게 병자가 나음을 입었는지, 또 그후의 앉은뱅이의 결과는      어떠 했는지를 살펴 보겠읍니다.
  무엇보다도 앉은뱅이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갈한자에게 물을 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갈급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다음은 믿음입니다.
분명히 이 앉은뱅이는 믿었읍니다.
본문에는 앉은뱅이가 믿었는지 안믿었는지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7절에 오른 손을 잡아일으킬 때에 그가 거기에 응한 것을 보면 앉은뱅이는 분명히 믿은 것을 볼수있읍니다.
  중요한 것은 믿는 것입니다.
  루스드라의 바울처럼(행 14:9) "고침을 받을만한 믿음을 가졌던"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적은 지금도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 이적은 신앙의 아들입니다.  믿어야 이적이 일어납니다.  의심나면 안일어납니다.

많은 분들이 왜 지금은 예수님 당시처럼 이적이 안일어 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생각입니다.
우리에게 지금 그런 능력을 주시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사실 그 당시의 대부분의 이적은 오늘날 의사들을 통하여 일반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특별 은총뿐 아니라 일반 은총을 통해서도 역사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특별 은총뿐 아니라 일반 은총을 통해서도 역사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시대시대 마다 주시는 하나님의 은사를 가지고 일해야지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할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앉은뱅이 거지는 나음을 입은후에 무엇을 하였습니까?

  첫째로 그는 뛰어 서서 걸었다고 했습니다.
나음을 입은 것이 너무도 기뻐서 어른이라는 체면도버리고 뛴 것입니다.

  다음으로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미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끝으로 11절을 보면
  그는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가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저만 구원받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자기만 은혜받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남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첫째는 위를 보아야 하고, 다음은 밖을 보아야 우리는 삽니다.

  이제 설교를 맺을려고 합니다.
지금도 우리 가운데는 앉은뱅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제 우리는 일어나 걸으라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일어나야 합니다.

  남에게만 의존하는 데서 일어나야 합니다.
줄줄 모르는 손 마른자의병을 고쳐야 합니다.
  이제 일어납시다.
다 같이 앉은뱅이의 신앙에서 일어나 우리도 뛰고 찬양하고 증거하는 산 신앙의 소유자가 다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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