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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찌하여 패하게 하셨는고 (삼상 4:1b-11, 엡 2:8-10, 눅 15: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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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오동 목사

1.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나중에 솔로몬 왕에 의하여 성전을 건축하기 까지 저들은 성막에서 하나님께 예배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막이나 성전이나 규모에 차이는 있으나 구조는 동일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성전은 크게 성소와 지성소로 나누어집니다. 성소에서는 제사장들이 항상 제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고, 그것도 1년에 한 차례 대속죄일에 들어가서 이스라엘의 죄를 속하게 됩니다. 성소도 그렇지만 특별히 지성소는 하나님 임재를 상징했습니다. 거기에는 중요한 3가지 성물이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만나를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 그리고 십계명 돌판이었습니다.

오늘 사무엘서 본문에서는 이 돌판을 담은 언약 궤에 대하여 여호와의 언약 궤,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 궤, 하나님의 언약 궤, 여호와의 궤, 하나님의 궤 등으로 일컬으면서 오늘 우리가 봉독한 본문에만 해도 6번에 걸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반복해서 나오는 단어나 사건은 그 내용이 매우 심상치 않은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언약 궤에 대한 말이 이렇게 여러 번 거듭해서 나오게 되는 것은 바로 그 언약 궤와 관계된 문제가 심각하게 전개된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이없게도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하다가 하나님의 언약 궤를 그 적군들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일이 얼마나 충격적이었으면 나중에 엘리가 이 소식을 듣고 뒤로 넘어져서 목이 부러져 죽을 정도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엘리 만의 충격이었겠습니까?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한결같은 충격 아니었겠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보면 절대로 하나님을 형상으로 만들어 놓거나 그런 것을 하나님이라고 섬기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금하고 있습니다. 그 전통에 따라 오늘까지도 기독교 신앙에는 어떤 형상을 만들어 놓고 섬기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토록 철저한 이스라엘도 지성소에는 언약 궤를 안치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지성소를 신성시했습니다. “지성소”라고 하는 이름 자체가 성막이나 성전에서, 아니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곳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언약 궤가 안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거기 임재해 계신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하나님이 결코 어떤 규격화 된 궤나, 또는 어떤 장소에 갇혀 계시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고 우리가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래서 “천지에 충만하다”고 했습니다. 무소부재하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명기에 보면 하나님은 “한 장소”를 지정해 주셨습니다. 거기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므로 모든 백성들이 거기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도록 명했습니다. 그 한 장소가 나중에 예루살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디 살든지 적어도 1년에 3차례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예배드리도록 했습니다. 예수께서 12살 때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도 그래서였습니다.

이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한 장소에만 계시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선민 정체성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은 정한 시기에 그 장소에 가서 함께 예배드리지만 또 흩어져 각기 자기 살던 고향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았습니다. 여기 모이는 교회로서의 에클레시아와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디아스포라의 모습이 있습니다.

이런 뜻을 잘 알지 못했던 이스라엘은 나중에 그렇게 하나님의 도시라고만 알았던 예루살렘이 적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고,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성전이 파괴당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저들은 정말 주체할 수 없는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저들은 땅을 치면서 하나님 앞에 묻고 또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한 도시나, 한 성전이나, 한  물건인 법궤에 제한 당하지 않습니다. 그 백성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그 도시도, 그 성전도, 그 법궤도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무슨 신통력을 발휘하는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에 미신 신봉자들과 다른, 우상 숭배자들과 다른,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특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했습니다.

2. 오늘 사무엘서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하다가 블레셋에게 패하여 군인이 4천명 가량이나 전사한 채 본 진영으로 후퇴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에게 패하였다고 하는 것이 저들로서는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방 신보다 더 약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좀 더 노골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해 보자고 했습니다. 그 방안으로 나온 것이 하나님의 궤를 전쟁터에 모시고 가보자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잘 알듯이 이스라엘의 실패는 하나님의 능력이 약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치 삼손이 원수의 손에 의하여 머리가 깎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신 것과도 같았습니다. 나중에 원수들이 그를 체포하여 결박하고 눈을 빼기까지 했으나 그의 역발산의 능력은 이미 그에게서 살아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고스란히 원수들에게 당해야 했습니다. 이 사건이 확대된 것이 나중에 이스라엘이 망하고 성전이 파괴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엘리의 자식들과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타락하여 범죄하므로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있었느냐 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엘리의 가문에 멸망을 선고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외면하셨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들이 법궤를 전쟁터에 모시고 간들 그 법궤가 무슨 신통력을 발휘하겠습니까?

어떤 묵상자료에 이런 이야기로 설명해 놓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해외여행을 하기 위하여 비행기 표를 알아보니 의외로 비쌌습니다. 그래서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여긴 나머지 진짜 비행기 표와 똑같은 크기의 종이에 진짜 비행기 표에 있는 내용을 세세하게 다 기록하여 비행기 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아주 헐한 값으로 외국 여행을 할 수 있으려니 생각하면서 환한 미소를 띠며 수속 창구에 있는 직원에게 그 표를 내 밀었습니다. 그랬더니 직원이 말하기를 “죄송합니다만 이것으로는 비행기를 타실 수 없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왜 안 되는 겁니까? 여기 출발지와 도착지가 정확하게 적혀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여기 가격도 적혀 있고, 또 항공사 이름까지 적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직원은 여전히 “다 맞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유효하지 못하기 때문에 손님은 이 비행기를 타실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여기 항공사나 공항에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 표가 합당한 조건을 갖춘 항공사에 의하여 발행된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만든 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사시대의 특징에 대하여 알고 있습니다. 사사기 맨 마지막 절에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하나님 부재의 시대였습니다. 사람마다 자기 마음대로 살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도 바로 그 사사시대의 연속선상에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천국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 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쇠를 갖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고,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오직 믿음만이 하나님께서 그 권위로 인정해 주시는 하늘나라 티켓입니다.

오늘 우리가 때로 미신적인 신앙에서 거짓 평안에 속을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는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읽기는 힘들고, 또 말씀을 읽거나 들어도 그대로 산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방법을 한가지 생각해 냈습니다. “밤마다 잠잘 때 성경을 베개삼고 자자. 그러면 그 성경을 통하여 큰복을 받을 것이 아닌가?”. 여기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그냥 몸에 부적같이 성경을 지니고만 다녀도 복을 받을 줄로, 그 성경이 나를 지켜줄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습니다. 이런 것이 기독교의 탈을 쓴 미신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지금도 내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그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더불어 교제하고, 주님 뜻을 따라 살며, 이 땅에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 위하여 헌신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를 지켜 주시는 분이 바로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이십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 오늘 사무엘4:3에 전쟁에 패한 이스라엘 장로들이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패하게 하셨는고”라고 탄식했습니다. 여기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어찌하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전쟁의 패인을 하나님에게로 돌리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패하였는고”라고 묻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전쟁 패인에 대한 올바른 진단이 있어야 실패를 만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약에도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탕자 비유입니다. 그가 돈을 다 탕진하고, 흉년마저 들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그는 “내가 이제 죽게 되었으니 어떻게 할까?”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비로소 제정신이 들었습니다. 그가 아버지를 떠난 것, 허랑방탕한 것, 그래서 자신이 하늘과 아버지께 죽을죄를 지었다고 실토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이 회개였습니다. 그랬을 때 그는 발걸음을 돌이켰습니다. 아버지 집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 죽음에서 살길을 찾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장로들은 그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고, 그 하나님을 한번 시험해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실로에 있는 여호와의 언약 궤를 전쟁터로 가져가서 자신들을 구원하도록 해보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거기 아무도 하나님 앞에 엎드려 눈물 흘리며 회개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돌팔이 의사의 오진처럼 원인을 잘못 알았기 때문에 처방이 잘못 내려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도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문제의 원인에 대한 진단이 잘못 된 것은 아닙니까? 막연히 “하나님의 뜻이라”고만 치부하는 것도 어쩌면 저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는 처사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라고 묻는 사람도 없지 않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비정하게도 우리를 이렇게 궁지로 몰아넣었습니까?

아닙니다. 저 탕자의 자리로 내려가야 합니다.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고 회개해야 합니다. 이것이 제 정신을 찾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했을 때 탕자에게 살길이 열린 것처럼 우리 모두가 “하나님,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할 때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 탓으로 돌렸던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패하고, 법궤도 빼앗기고, 엘리의 자녀들도 그 전쟁에서 죽고, 온 가족이 멸망했습니다.

그러나 “내 탓이요”라고 회개한 탕자는 아버지께 영접 받았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는 그 아들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여 온통 잔치를 배설하였습니다. 아들은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찾았습니다. 회복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이렇개 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나에게, 우리 가정에, 우리 교회에 왜 이렇게 하셨는고?”라고 하지 말고 “내 탓입니다”라고 손들고 하나님께 나아가 그의 회복하시는 은혜와 복을 받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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