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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으로 나타내시니라 (삼상 3:19-4:1a, 고전 3:5-9, 마 13: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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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오동 목사

1. 기독교와 우리 신앙의 본질에 대하여 우리 주님께서 비유로 들려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겨자씨 비유입니다. “겨자씨”란 가장 작은 것을 말할 때 거론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져오는 엄청난 결과를 말합니다. 욥기에서 우리가 흔히 개업하는 가정에서 잘 사용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고 하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아직 나이 어린 처녀 마리아를 통하여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갈릴리 나사렛,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노골적으로 무시당하던 그 나사렛에서 가난한 목수 요셉의 가정에서 성장했습니다. 그의 나이 30이 되기까지 거의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그가 공적으로 사역을 시작했을 때 그 주변에 몰려든 12사람의 제자를 중심한 추종자들 역시 당시 사회에서는 전혀 유명한 인물들이 아니었습니다. 당국자들 눈에는 한갓 “나사렛 이단”의 무리에 불과했습니다. 잠시 소란을 피우기는 해도 세월이 흐르면 곧 사그라질 것이라고 생각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는 적중해 나갔습니다. 12제자 중에 한 사람은 탈락하고 말았지만 나중에 오순절 때까지 모여서 기도한 사람들의 수는 120명, 처음 제자들의 10배였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여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가입한 사람은 무려 3천명, 그리고 곧 이어 5천명으로 불어났습니다. 지금같이 대형교회라는 것을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그 당시로서는 정말 천문학적인 숫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수적으로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확장되어 나갔습니다.

마리아의 다락방에서 성령 강림으로 시작한 그리스도의 교회는 1세기가 다 지나가기 전에 소아시아 전역에 확산되었으며, 3세기가 되어서는 당시 세계 제국이었던 로마가 마침내 그리스도교를 공인하고 국교로 받아들이게까지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상전 벽해의 변화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에 보면 겨자씨는 씨 중에 가장 작은 것이지만 그것이 자라면 나중에는 나무보다 더 커져서 새들이 깃들이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 중요한 말씀은 “자란다”고 하는 단어입니다. 생명 있는 겨자씨는 일단 땅에 뿌려지면 싹이 나고 자라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가장 작은 씨가 나무보다 더 커져서 새들이 깃들이게 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믿음을 말씀하실 때 “너희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 해도 산을 옮긴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에는 생명이 있단 말입니다. 그 생명은 자란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 상상을 초월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겨자씨와 같고, 그리스도 교회가 겨자씨와 같다고 할 때 그 이루어지는 결과가 엄청나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입니다.

오늘 사무엘서 본문19절에 “사무엘이 자라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2:26에도 있습니다. 사무엘은 어릴 때 성전에서 자라났습니다. 이것이 사무엘이 사무엘 된 가장 중요한 요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씨뿌리는 비유를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거기서 중요한 것은 씨앗이 어디에 떨어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길가나 돌짝 밭이나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앗은 그 토양 때문에 자라지 못했고 열매맺지 못했습니다. 단지 옥토에 떨어진 씨앗만이 싹이 나고 자라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하였습니다. 그 옥토가 바로 믿음이요 교회입니다. 여기에 상상을 초월하는 열매가 있습니다.

사무엘이 성전에서 자랐기 때문에 마침내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가 된 것처럼 주의 집은 항상 우리 삶의 센터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무엘처럼 우리 자녀들로 하여금 믿음 안에서, 성전 즉 하나님의 집에서 자라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 본문에 “사무엘이 자랐다”고 하는 말씀은 단지 육체적인 성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사무엘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 사역의 영향력과 열매가 눈에 보이게 성장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엘리의 자녀들이 갈수록 퇴락 해 간 것과 정 반대로 사무엘이 자랐다는 이 말씀 속에 이스라엘의 소망이 있습니다. 

내 신앙이 성장하는 것, 우리 가정의 신앙이 발전해 나가는 것, 마침내 우리 서부교회가 성장해 나가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일이요 동시에 이 땅을 위하여서도 소망을 주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시대, 그 지역의 교회가 어떠냐 하는 것이 그 사회의 흥망을 좌우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특권이요 동시에 사명인줄 믿습니다.

2. 그런데 여기 사무엘이 자라나게 되는 동인(動因)이 무엇입니까? 19절 중간에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라고 했습니다. 19절의 말씀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는 사무엘이 자라갈수록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다고 하는 뜻입니다. 처음에 사무엘의 성장은 단지 육체적인 것을 말합니다. 성전에 맡겨진 이후로도 그는 잘 자라났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처럼 지혜가 자라고 키가 자라면서 하나님을 점점 더 알아가게 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했습니다. 어렸을 때 그는 그냥 육체가 자랐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의 영성도 자랐습니다. 그럴수록 그는 임마누엘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도 물리적인 성장만 있을 수도 있습니다. 신앙 연수만 늘어가는 것입니다. 혹 10년을 믿었을 수도 있습니다. 더 많게는 20년 또는 그 이상을 믿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그냥 육체적으로 키만 자라듯 하는 물리적 성장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는 체험, 주님과의 교제하는 체험을 통하여 우리 영성이 자라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질적 성장입니다. 이것이 사무엘이 자라갈수록 여호와께서 함께 계셨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2) 그런데 다른 번역들을 보면 “여호와께서 사무엘과 함께 계시니 사무엘이 자랐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사무엘의 존재는 물론 성장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은혜롭고 복된 말씀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하는 임마누엘의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 약속을 주셔서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야곱에게 이 약속을 주셔서 그는 차자(次子)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이 약속을 주셔서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이라고 하는 전무후무한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마침내 우리 주님은 임마누엘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하리라”고 임마누엘의 약속을 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파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임마누엘의 약속이 오늘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주신 것이라고 하는 이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 임마누엘의 약속이 오늘 우리 서부 교회를 향하여 주신 것이라는 이 놀라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결과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그것이 곧 나의 형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교회와 함께 하시면 그것이 바로 우리 교회의 부흥이요 발전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비록 세상에서는 연약하기 짝이 없는 것 같으나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의 임마누엘 약속을 받고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그러면 사무엘이 이와 같이 성장하게된 비결은 무엇입니까?

물론 한마디로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은 이제까지 말씀드린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그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1) 21절에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시되”라고 했습니다. 실로는 하나님의 궤를 모신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은 거기서 사무엘을 만나주셨습니다. 옛날에 욥이 고난을 당할 때 3친구들의 그 훌륭한 이론 때문에 많이 시달렸습니다. 3친구는 그 배운 훌륭한 학문을 토대로 온갖 신학적인 이론으로 동원하여 욥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이런 모든 안개 같은 이론을 배격하시고 마치 떠오르는 태양같이 하나님이 직접 욥을 만나주셨습니다. 하나님과의 이 만남을 통하여 욥은 비로소 모든 것을 새롭게 체득하게 되었으며 자기를 만나주신 하나님을 통하여 잃었던 모든 것을 회복하고도 남았습니다. 그때 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까지는 내가 하나님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더니 이제는 내가 눈으로 친히 하나님을 뵙고 재를 무릅쓰고 회개하나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까지 귀로 듣기만 하던 이론적인 신앙생활을 탈피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욥과 같이 그 앞에 엎드려 내려 주시는 새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2) 21절 마지막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그 말씀을 통하여 다가오십니다. 그러나 우리 귀가 막혀서 그 말씀을 듣지 못합니다. 우리가 세속에 빠져서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니까 내 마음대로 처신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불행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회개하고 나서야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이사야가 가장 위대한 선지자가 되는 출발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 듣지 못하는 사람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단지 육체의 불구를 고쳐주는 것이 주님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적 행동이었습니다. 도무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우리 영적 귀를 고쳐주시기 원하시는 것이 주님의 궁극적인 목표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답답한 현실을 한탄하면서 외친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구나”. 그리고 예수님도 당시 유대인들에게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보시고 똑같은 한탄을 사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여러분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수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씀 앞에 겸손하게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을 순종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 신앙은 자라나게 됩니다.

4. 이렇게 자라나게 된 사무엘을 통하여 나타난 열매는 무엇입니까? 성장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1)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말의 성취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엘리 집에 대한 말씀을 증거 했는데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것은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증거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던 시대에 이와 같이 능력있는 말씀의 종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소생을 의미합니다. 말씀에 충실한 마르틴 루터를 통하여 죽어가던 교회가 살아나게 된 것과도 같습니다. 이런 말씀의 역사가 교회를 통하여 주의 종들을 통하여 이 땅에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기도의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2)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보증인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4:1의 말씀대로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고 했는데 이제는 백성들이 사무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된 것을 말합니다. 이리하여 새 역사의 문은 서서히 열려졌습니다.

오늘 우리 서부교회와 성도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 땅에도 이런 생명과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도록 여러분을 주님께 헌신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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