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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의 옷을 입은 사람들 (롬 1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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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성홍모 목사

  오늘부터 새로운 교회력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제가 목회하며 설교하는 중요한 사역은 모두다 교회력를 따르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 사회와 다르게 교회만의 교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력이란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신 분은 1589년 루터교회의 목사이신 요한 포마리우스(Johann Pomarius)의 한 설교집에서 발견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역사에 있어 교회력은 초대교회부터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은 한 해를 살아가면서 예수님의 일생을 일년의 예배 중에 재현하려고 힘을 기울였습니다.  이것은 오래 전에 지나간 일을 가지고 단순히 기억을 더듬어 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성도들과 함께 영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체험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예수님의 생애 중에 가장 굵직한 사건을 예배 시간 중에 다시 한번 기억하면서 재현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교회력이 성탄절인데, 성탄절기는 성탄절을 준비하는 대림절이 있고, 성탄절 이후에 주현절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탄절기가 끝나면 부활절기 나오는데, 이 부활절을 준비하는 사순절을 지킨 후에 부활절을 맞이합니다.  부활절기 후에는 오순절기가 시작됩니다.  성령강림절이 있고, 오순절기는 대림절이 시작될 때까지 오랫동안 이어집니다.  교회는 간단하게 성탄절과 부활절 그리고 오순절을 지킨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성탄절기는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일정한 기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9월부터 12월까지 성탄절을 준비하면서 보낸다고 하여, "--BER"라는 말이 들어가는 달 September October November December 이렇게 4개월은 성탄 축제를 준비한다고 합니다.  대림절이란 말은 영어로 Advent라고 하는데, 도착한다, 강림한다는 뜻입니다.  대림절은 12월 25일 성탄절의 4주전에 시작됩니다.  동방교회의 영향을 받은 지역에서는 7주간을 지키면서 성탄을 준비하기도 했습니다.  로마 교회는 4주간을 지키다보니 현재 4주간의 대림절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로부터 대림절을 지키면서 사순절과 같이 엄숙하게 지키지는 않았습니다.  차츰 교회들이 사순절의 엄숙함과 같이 대림절도 엄숙하게 지키며 결혼을 금하고 세상 오락을 금하고 참회하면서 지켜오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이 절기는 주님의 오심을 사모하면서 지키다보니 성탄절 트리, 성탄목을 장식하고, 매주일에 촛불을 하나씩 더해가면서 빛을 밝히고 대림절 4번째 주일을 맞이하여야 모든 성탄트리에 불을 밝히게 되었습니다.  성탄트리에는 구약 예언의 말씀과 함께 신약에 성취된 말씀을 기록한 종이별을 걸어두기도 하면서 아름답게 장식하였습니다. 
대림절이 되면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을 맞이할 준비에 마음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대림절에는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단순히 성탄절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러 오신 주님, 이제 영광 중에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며 준비하여야겠습니다. 

  교회는 교회의 절기가 변하는 모습을 색으로 나타내었습니다.  강단, 설교대, 교독대, 예복과 드림천- 스톨에 색의 변화를 주었습니다.  보라색은 위엄과 존엄을 의미합니다.  왕을 위한 색이요,  흰색은 성결과 순결 그리고 기쁨을 의미합니다.  붉은 색은 주님의 흘리신 보혈을 의미합니다.  희생과 수난 그리고 나아가 성령의 불을 상징합니다.  초록색은 성장과 영원성 즉 소망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대림절기는 만왕의 왕이 오시는 엄숙한 계절로 보라색, 성탄절과 주현절까지는 흰색, 주현절 후에 사순절까지는 소망을 나타내는 초록색, 사순절기는 고난과 엄숙함을 나타내는 보라색, 고난주간에는 붉은 색, 부활절기는 흰색, 성령강림절에는 성령의 불을 상징하여 붉은 색, 오순절로부터 대림절이 될 때까지는 오순절기로 보아 천국의 소망을 가지는 초록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력에 대한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 주님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와서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며, 3일만에 살아나시고, 성령을 보내주셔서 오늘의 교회와 구원의 역사를 이뤄가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탄생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성령이 강림하신 세 절기를 중심으로 가는 것이 교회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기독교회가 고심하는 중에 채택하고 물려준 것이 교회력이라는 것을 생각하시고 이러한 절기의 변화를 통하여 주님을 이해하고, 주님을 만나고 깊은 영적 체험을 가져야겠습니다.

  대림절이란 절기는 육신을 입고 베들레헴에 아기 예수님으로 오시는 주님과 이제 영광 중에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계절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아주 심각한 말씀을 들려주시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면서 어떤 분이 "복음의 자명종"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을 보았습니다.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라고 하십니다.

  1.  우리의 구원의 아침이 가까워지기 때문에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시기라는 말씀을 하시고, 때라는 말로 다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는 어떤 시기입니까?  자다가 깰 때가 벌써 지난 시간이요,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워진 시간입니다.  구원의 아침이 가까워지기 때문에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시기라는 말은 "카이로스"라고 하여 연대기적으로 흐르는 일반적인 시간인  "코로노스"가 아니라, 계절과 같이 어떤 특성의 개념을 가진 시간입니다.  본문에서는 정관사가 붙어 있어 "그 시기"라고 해야 합니다.  카이로스란 하나님이 예정하시는 시간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재림의 시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시기와 때를 분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사람은 동물과 다르게 지성을 가지고 있으며, 사람만이 영성을 가지고 있어서, 시기를 분별할 줄 알고 때에 알맞은 행동으로 미리미리 대응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때와 시기를 분별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사회에 가장 인기 있는 책 중에 [아침형 인간]이란 책이 있었습니다.  작년에 베스트셀러였습니다.  이 책은 본래 긴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생을 두 배로 사는 아침형 인간]이라고 했습니다.  저자인 일본 나가사끼 출신의 의사 [사이쇼 히로시]는 아침형 인간을 이렇게 말합니다.  아침형 인간은 자연의 리듬과 함께 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인류는 지난 수백만 년 동안 해가 지면 자고 해가 뜨면 일어나는 자연순응형 삶을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아침형 인간이란 인류가 태고적부터 지녀온 유전자 정보이며, 생체리듬에 일치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아침형 인간이란 하루를 지배하는 사람입니다.  아침형 인간은 자기의 인생을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아침형 인간은 인생의 목표를 성취해내는 사람입니다.  아침형 인간은 진정으로 건강하며 행복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저는 아침형이 아니라, 새벽형 인간입니다.

  이원설박사는 한국의 석학이라고 할 수 있는 분입니다.  이 분의 많은 책 중에 [아침을 준비하는 자는 늘 깨어 있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가 여러 지상을 통하여 발표한 주옥같은 글 54편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이원설 박사의 글을 읽다보면 역사를 통찰하는 바른 지혜를 얻게 하고 있습니다.  그는 오늘의 시대를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동의하면서 "나는 무엇을 위하여 살 것인가를 반드시 물어 보라"고 말합니다.  이박사는 "내면의 나(자기)와 진지한 대화를 시작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불안한 우리나라, 나가서 오늘의 세계의 모든 문제를 풀어나가는 첫 발걸음이라고 합니다. 

  롬12:1-2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엡5:14-17에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잠을 적당히 잔다는 것처럼 소중한 휴식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잠이라는 것도 다 좋은 의미로만 쓰인 것은 아닙니다.  사람에게 적당한 잠이란 유익을 주고, 필요한 것이지만, 게으른 사람을 말할 때에 잠이 많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주변의 환경에 예민하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진 것도 역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잠이라는 것도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가 다 포함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오신 주님을 영접하고, 아직 오시지 않은 주님을 사모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종말론을 연구하는 이들이 말하는 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시간은 종말적인 시간에 속하여 있습니다.  이미 2천년 전에 육신을 입고 오신 주님, 초림의 주님을 영접하여 구원받았습니다.  이제는 영광 중에 다시 오시는 주님을 사모하는데, 우리 주님은 천군 천사를 거느리고 앞서간 성도들을 다 데리고 영광 중에 다시 오십니다.  초림의 주님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마지막 시간들 즉 종말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주님을 모시고, 주님을 기다리면서 산다고 하는 종말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받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면서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종말적인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주님의 재림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도 주님의 재림을 굳게 믿고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 인간의 죄에 대한 종지부를 찍기 위하여 다시 오셔야 한다고 고백합니다.  죄에 대하여 한번 마침표를 찍고 싶습니다.  더 이상 죄와 상관이 없는 삶을 살아보고 싶습니다.  인간의 고통, 질병, 사고, 질투와 시기 이런 인간의 난제들에 대하여 마침표를 찍어 주실 분이기에 고대합니다. 

  역사적인 종말,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재림이 우리 시대에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고, 주님의 재림이 지연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것은 수많은 사람이 멸망당하지 말고, 구원받기를 위하여 하나님이 길이길이 참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종말은 머지 않아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윗이 고백하기를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뿐이니라"(삼상20:3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죽음과 한 발자국 떨어져 있습니다. 

  목사님들의 모임에서 당신이 시무하는 교회의 권사님을 소개하는데, 이 분은 항상 정장을 하고 사신다고 합니다.  새벽에 나와 기도하셔도 언제나 곱게 차려입은 정장을 하고 나오시는 것입니다.  어디에 나들이 가도 깨끗한 옷으로 정장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분의 말은 언제 주님을 만날지 모르기 때문에 정장하고 산다고 합니다.  흐트러지지 않는 삶이 좋아 보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을 확정하고, 나는 이것을 위하여 살아간다는 것을 붙잡아야 합니다. 주님 앞에 서시는 날이 곧 다가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의 잠자는 영혼을 깨우십시오.  진리의 말씀, 구원의 도리, 십자가의 구원을 확실한 내 것으로 붙잡아야 합니다. 

  2.  우리는 낮에 살며, 할 일이 많기에 깨어나야 합니다.

  12-13절입니다.  "밤이 깊이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섬기다가, 주의 일에 열심하다가 주님을 맞이하여야 합니다.  그냥 육신의 잠, 세상 향락의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중에 주님을 맞이할 수는 없습니다.  목사는 설교 준비하다가, 우리 교우님들은 전도하다가 주님을 맞이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목사가 되어 가지고 몰래 어느 술집에 가서 진탕 퍼마시다가 심장마비가 되어 주님을 앞에 서면 그 꼴이 무엇입니까? 그러면 장로님과 집사님, 그리스도인의 정도를 걸어가셔야 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집사가 음주사고를 치고 비는 모습, 한심합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는 사람들은 할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될 일들이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위배되는 것은 다 죄가 되는 것입니다. 

  지난주간에 음주운전으로 교통사고를 낸 사람과 경찰서에 가면서 "목사님, 목사님, 살려주세요"라고 세상에 그렇게 매달리는 사람 처음 보았습니다. 

  이 세상에는 빛의 일이 있고, 어둠의 일들이 있습니다.  여기 본문에는 빛의 일들은 단정히 행하는 일을 말하지만, 어둠의 일들은 많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방탕한 것, 술 취하는 것, 음란한 것, 호색, 다툼, 시기,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것 이런 것은 어둠의 일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어둠의 일을 벗어버리고, 낮에와 같이 빛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방탕의 반대가 절제라면 절제의 사람으로, 음란과 호색의 반대가 정조라고 하면 정조를 지키고, 다툼의 반대가 평화라고 하면 평화의 사람으로 시기와 분냄의 반대가 사랑과 관용과 이해라고 하면 사랑과 관용과 이해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빛이 들어오면 어둠이 물러갑니다.    어둠을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빛이 들어오게 하면 어둠은 언제 있었느냐는 듯이 물러갑니다.  우리들이 빛된 삶을 살아가는 것은 갑옷과 같아서 우리를 지켜주고 있습니다.  적극적을 선을 행하고 추구하는 것이 어둠을 이기는 길입니다.

  3.  마지막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님의 구속하심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예수님의 사람이요,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획득한 사람들입니다.  예전에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 신분이 달라졌습니다.  왕은 왕이 입을 옷이 따로 있었고, 귀족은 귀족의 옷을 입어야 하고, 평민은 평민을 나타내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  군인은 군인 옷, 군복을 입었고, 판사는 법의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죄인은 죄수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옷은 그 사람을 말합니다.  옷은 그 사람을 결정합니다.  옷이 그 사람입니다.  어떤 옷을 입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살아야 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옷을 말씀하면서 14절의 말씀을 유의하여야 합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입어야 정욕을 절제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새번역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표준새번역개정판을 새번역이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정욕이라는 것은 일생 채워지지 않습니다.  나는 이것으로 나의 정욕을 다 채웠다고 하실 것입니까?  차마 설교하는 시간에 육신의 정욕에 대하여 자세한 말씀을 드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육신의 정욕에 대하여 누구나 해방된 사람이 없고, 자신 있다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육신의 정욕을 피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고전6:18에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딤후2:22에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요일2:17에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정욕을 피하고, 음행도 피하여야 합니다.  그런 것들은 다 지나갈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리에 거해야 합니다.

  제자훈련을 하면서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의 구원"에 대하여 공부하였고, "작은 예수가 되라"는 책을 공부하였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아무도 흔들 수 없는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잠시 평안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이요, 반드시 구원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늘 나라에서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 자신을 흔들어 깨워야 합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흔들어놓아야 영혼의 적조현상을 막을 수 있고, 물리칠 수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한 사람을 만나 "예수 믿고 천당가세요"라고 하였더니 그의 집이 너무나 좋은 집에 사는지, "천당이 우리 집보다 더 좋아요?"라고 하더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집이 지금은 좋을지 모르나, 조금 있으면 다 낡아지고 후패해지고 보잘것없어 보입니다.  예전에 잘 지은 집이라고 큰 소리쳐보았지만, 지금에 보니 낡고 보잘것없어 보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재림에 대한 기대가 약한 것은 아직도 이 땅에 소망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지금 소유한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이제 더 잘 먹으면 소망이 있습니까?  더 좋은 집에 살면 소망이 있어 보입니까?  우리가 안락하게 지내는 데, 얼마나 더 안락하게 지내야 만족할 것입니까?  이 땅의 것들은 우리에게 더 이상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오셔야 세계는 달라집니다.  죄악의 사슬을 풀어버리고, 미움의 고리도 끊어버리고, 진정한 자유와 만족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 주님 안에 거하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말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하는 작은 예수로 살아가시며 이제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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