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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길이 참으라 (약 5: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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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영태 목사 (2004. 12. 12)

어느 선교단체에서 선교사를 뽑는 시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 시험시간이 이상하게도 새벽 4시 정각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새벽에 시험을 치르기 위하여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데 시험장의 문은 굳게 잠겨져 있습니다. 조금 후에 열리겠지 했는데 30분 뒤에도 한시간이지난 뒤에도 열리지를 않습니다. 사람들이 뭐 이런게 있어 웅성대다가 하나둘 자리를 떴습니다. 많은 사람이 가고 남은 사람이 그리 많지를 않습니다. 아침 8시가 되니  한사람이 나옵니다.

문을 여는가보다 했는데 웬걸 문도 열지 않고 고개만 내밀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얼마입니까?', '해는 어느 편에서 뜹니까?',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하더니 '예. 이제 시험이 끝났습니다. 돌아가셔도 좋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황당해서 성질을 내고 불평하면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한 사람에게 합격 통지서가 날아들었습니다. 내용이 이런 것입니다.

선교사 시험에 합격한 것을 축하드립니다. 당신은 먼저 시간을 지키기 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4시 정각에 온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인내의 시험에도 합격하셨습니다. 4시부터 8시까지 잘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있었습니다. 또 혈기가 있나 없나 보는 시험에도 합격하였습니다. 그것은 평범한 질문에도 화내지 않고 온유하게 대답하셨고 돌아가는 모습도 찬송을 부르며 갔습니다. 우리는 당신과 일하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시간 지키는 것, 인내, 온유는 선교사의 3대 조건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찾으시나? 인내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여러분 성경의 많은 인물들은 어데서 합격점을 받느냐 하면 인내에서 합격점을 받습니다. 요즈음 금요 심야 기도회 때마다 배우는 아브라함의 믿음도 인내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오래 오래 참았습니다. 아들이삭을 얻기까지 25년을 기다렸습니다. 노아는 어떻습니까?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겠다고 방주를 지으라 명령을 받은 후 120년을 기다렸습니다. 그뿐입니까? 모세는 가나안 약속의 땅을 가는데 40년이나 걸렸습니다. 믿음은 어데서 진위가 확인되느냐 하면 인내에서 판정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본문에도 참으라는 말씀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는 참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이 여러 차례 반복되어 나옵니다. 7-8절에서 세 번나오지요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10절에서도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11절에서도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인내, 참는다는 것 아닌가요. 성도는 참는 것을 잘해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참아야 합니까? 우리는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약속이 없습니다. 약속이 없기에 소망도 없습니다. 무엇을 기다리겠습니까? 기다릴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삶이 허망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약속이 있습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허망하지 않습니다.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기다립니까?

7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주의 강림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이 약속입니다. 요14장에 보면 주님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시고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나있는 곳으로 인도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바로우리를 주의나라에 인도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기독교의 신앙은 종말론적인 신앙이요 부활의 신앙입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을 나의 마지막 삶처럼 그렇게 살아야 하고 주님을 맞을 마음으로 살아야 하고 마지막 마무리를 짖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닙니다. 영원한 나라가 있습니다. 그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히 살 것을 믿는 것이 부활의 신앙입니다. 고로 기독교에는 죽음이 없습니다. 우리가 숨이 떨어지는 것은 죽는 것이 아니라 천국으로 삶의 거처를 옮겨 가는 것입니다. 

숨이 떨어 졌다고 죽은 것입니까? 내가 있는데 육체만 없어졌다고 죽은 것입니까? 나라고 하는 존재가 육체뿐입니까? 그것은 아니지요. 우리가 육체뿐이라면 짐승이나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은 육체만 잇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다. 영혼이 있습니다. 그럼으로 육체가 무너졌다 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자리를 옮겨 간 것 뿐 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죽은 것이라 하지 않고 잠잔다고 합니다. 잠을 자는 자가 깨어 일어 날것입니다. 주님이 모든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을 깨워서 주님의 나라로 인도 할 것입니다.

어느 날  할머니를 따라서 저녁 마실을 간 때가 잇습니다. 어른들이 밤늦게까지 말씀 하시는데 어린 저로서는 이해도 안 되고 재미도 하나도 없어서 하품만 나오는데 주인 할머니가 베게를 주면서 한편에 재우라고 저희할머니한테 말씀 하시더군요. 그래서 남의 집이지만 졸려서 잤어요.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우리 안방 이예요. 분명히 남의 집에서 잤는데  어떻게 된 일이지요. 잠든 나를 할머님이 안아서 집으로 데리고 온 거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상에서 잠을 자면 주님이 천국으로 안아 올려 우리가 눈을 들 때는 천국에서일어 날줄로 믿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성경은 그럼으로 합니다. 그럼으로 에는 많은 내용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여도. 괴로운 일이 있어도, 핍박을 받는 일이 있어도. 세상살이가 힘들고 어려워도, 길이 참으라. 그냥 죽지 못해 참는 것이 아니라 소망 가운데 적극적으로 참는 것입니다. 일하면서 참는 것입니다. 그날을 준비 하면서 참는 것입니다. 인상을 쓰고 참는 것이 아닙니다. 웃으면서 참는 것입니다. 즐거움으로 참는 것입니다. 그 비유를 농부의 인내에 비교해 놓았습니다.

농부가 열매를 얻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면서 기다립니까? 농부의 수고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그 수고를 하면서 우는 사람 보았습니까? 소망 가운데 수고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미소가 있습니다. 저도 어려서 농사를 지어 보았지만 아무런 소망 없이 일을 그렇게 하라면 할 사람이 없습니다. 요즈음은 기계로 다 농사를 짓지요. 그런다고 해서 손이 안 가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손을 댈 때는 대야지요.

우리가 먹는 쌀 한 톨을 얻으려면 겨울부터 준비를 해야지요. 그래서 논에 물을 채웠다 뺐다 해서 땅 심을 키워야지요. 이른 봄이 되면 못자리판을 만드는데 흙을 부드럽게 이겨서 못자리판을 만들고 거기에 벼씨를 뿌리는데 장화가 어디 있어요. 맨 발이지요 얼마나 발이 시린지. 이때부터 시작해서 수십 번도 손이 더 가지요. 모내기 해야지요. 김매야지요. 초벌매고나면 금방 풀이 또 자라고 벼가 자라서 두레를 할 때쯤이면 벼 잎이 눈을 찔러서 사람들의 눈이 뻘게 가지고 다니지요. 약 쳐야지요. 비료주어야지요. 거머리는 왜 그렇게 많은지 장단지마다 전부 핏자국이 있어요. 그래도 웃음이 있어요. 가을 벼를 베고 무거운 등짐을 하면서 얼마나 행복합니까? 이렇게 참으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에 족히 비교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기다리는 자의 태도입니다. 그 태도가 원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9절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 

원망하지 말고 기다리는 것은 감사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잘 되는 일도 감사 잘 안되는 일도 감사입니다. 칭찬하는 사람에게도 감사, 욕하는 사람에게도 감사입니다. 다윗이 그랬지요,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도망가는데 시므이란 자가 나와 저주를 하고 심지어 돌까지 던지잖아요. 그때 군대장관 아비새가 이죽은 개가 어찌 내주 왕을 저주 하는가 칼을 빼들고 저를 베게하소서 할 때 그것을 말리면서 그가 저주하는 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하는 일이니 가만 두거라 하고 그 다음 삼하 16: 12절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하고”...

감사의 믿음입니다. 이 고통 후에 하나님이 나를 도울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참는 것입니다. 다윗은 누구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남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보세요.  믿음을 가지고 원망하지 않고 참을 줄 아는 다윗은 다시왕권을 되찾습니다. 그러나 시므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윗은 다용서 했어요. 다윗이 왕권을 회복하고 돌아 올 때 살려 달라고 하지요. 다윗이 용서하고 거처까지 마련해 줍니다. 그러나 왕상 2장에 가면 솔로몬시대 브나야 한테 죽임을 당합니다. 원망하지마세요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감사의 믿음을 가진 자에게 희망이 찾아올 줄로 믿습니다.

그다음 주시는 말씀은 격려의 말씀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선지자들도 고난을 받고 참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본을 삼으라는 거예요 아브라함도, 모세도 요셉도 다윗도 다인내하며 참았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참은 결과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축복입니다. 그대표적인임물중 하나가 욥이지요.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원망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참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 결과가 축복입니다. 자녀와 물질과 장수의복을 받았습니다.

무엇을 얻기를 원하십니까? 길이 참으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인내 하는 자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오늘도인내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서도 복을 받고 주님 오시는날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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