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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 1: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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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이봉 목사

□ 말씀이 육신이 되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한복음 1:14-18)

오늘 우리는 강림절 둘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 <말씀>이란 헬라 사람들에게는 익히 알고 있는 의미의 단어이었습니다. 즉 <로고스>란 말을 우리 말로는 <말씀>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헬라 사람들에게 <로고스>란 우주의 가장 <기본 원리> 내지 우주 전체를 통괄하는 이법(理法)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무엇인가는 모르지만, 이 우주만물에는 가장 근본적인 법칙과 합리적인 법칙이 있다고 헬라철학자들은 생각했었습니다.
바로 그 우주의 근본되는 <로고스>가 육신을 입고 우리에게 나타났다고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설명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존재하였는데,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존재 하였고,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었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만물이 이 말씀으로 지음을 받았고,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도 지은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는데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말씀이 이제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나타났다'고 하였습니다.

1. 그리스도의 나심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이 무엇인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직접 인간 역사에 개입하였다는 의미입니다.
<말씀>으로서의 하나님이 말씀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인간 구원을 위하여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최대의 신비로운 일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과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인간이 신이 되어보려는 노력들은 있었습니다.
역사의 독재자들이 가끔 나타나 자신이 신이라고 하였습니다.
애굽의 바로가 그랬고, 로마의 황제들이 그러했고, 일본의 천황이 그러했었습니다.
그러나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기독교의 유일한 사건입니다.         
성육신의 사건은 만들어낸 신화(神話)가 아니라, 역사적 사건(事件)이었습니다. 베들레헴 말 구유에 오신 주님은 바로 하나님 당신 자신이 인간 역사의 속으로 들어온 사건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나가고 있습니다. 즉 인간역사(人間歷史)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救贖史)가 드러났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인간 역사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한 나라의 흥망성쇠(興亡盛衰)나, 개인의 사생화복(死(生禍福)을 주관한다는 의미입니다.

만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관념(觀念)의 신(神)일 뿐입니다. 소위 철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요구에서 만들어낸 존재일 뿐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것은 인류 역사의 대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오시기 전과 주님 오신 후로 세속사는 구분하고 있습니다.

2.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은혜(恩惠)와 진리(眞理)입니다.

즉 이 말은 인간 편에서는 너무나 큰 은혜이고 참된 진리로 나타났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세속사(世俗史)는 거짓으로 꾸며진 왜곡된 역사입니다.
힘의 논리성으로 위장된 역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즘도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이 일어나는 것 아닙니까?
세속사는 힘이 정의로 나타나는 역사입니다.
로마의 평화는 힘으로 얻은 평화일 뿐, 진리로 얻어진 참된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이 세상의 역사는 힘의 논리로 이어져갑니다.
정권이 바뀔 때 마다 줄줄이 부정직한 일로 감옥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속사는 거짓과 위선과 폭력으로 얼룩진 역사입니다.

이런 역사 속에 참된 해방과 구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모든 법을 완성한 사랑으로 나타났고 모든 불의와 부정에서 참된 진리로 나타난 것이 그리스도의 나심입니다.

3.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나심은 인류에게 기쁜 소식입니다.

로마의 창검의 세력이 하늘을 찌를 당시, 로마 황제의 전국의 호구 조사의 명령을 거역할 길 없어 요셉과 마리아도 호적하려고 고향으로 내려가던 길이었습니다. 부정직한 힘의 정권이 지배하던 세상 속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나타나시었습니다.

그는 예언자들의 예언처럼 사관에 들일 형편이 못되어 마구간에서 탄생하였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 가장 가난한 자리, 가장 힘없는 자리에서 탄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 세상에서 제일 힘 없는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처럼 소경, 앉은뱅이, 문둥병자, 귀머거리, 죽은 자들, 그리고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왜 성탄을 기뻐해야 하겠습니까?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소경, 앉은뱅이, 문둥이, 귀머거리, 죽은자들, 그리고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마11:5)

그런데 오늘의 성탄은 그런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아니라, 부자들과 권세자들과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의 화려한 축제로 변해버렸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오늘의 전도된 성탄의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성탄의 본래 의미를 되찾는 회개와 개혁이 우리에게 뒤따라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참된 성탄을 준비하며 맞는 성도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4. 그러면 성탄의 본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로, 내게 있는 것으로 약한 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야 하겠습니다.

내게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물질이 있으면 물질로 나보다 약한 자들에게 눈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내게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게 있는 것이 지식이라면 그 지식으로 인한 봉사를 나보다 약한 사람들에게 눈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내게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게 있는 것이 남이 갖지 못한 재능이라면, 그것을 통하여 약한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하겠습니다.

내게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게 남보다 큰 평수의 아파트나 집을 가지고 있다면 나보다 좁고 열악한 환경에서 사는 그런 사람들에게 눈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내게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게 은과 금은 없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하였던 베드로와 요한처럼 내게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아직도 믿지 않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의 단편에 어느 임금이 '3가지의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하려고 하는데, 아무도 만족시키지 않자 자신의 스승을 찾아 갔습니다.
'가장 적절한 때는 언제인가?
가장 필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 물었습니다. 스승은 대답하지 않고 스스로 깨닫게 하였습니다.
마침내 임금은, 가장 중요한 때는 이미 지나간 과거도 아니고, 나의 권한 밖에 있는 미래도 아니며 내가 지배할 수 있는 현재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며, 가장 중요한 일은 댓가 없이 사랑을 베푸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늘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인 반면, 가장 불행한 사람은 항상 남을 부러워하며 만족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랑이 있고, 사랑을 말하며, 요구하며, 노래합니다. 그러나 바다 한 가운데서 많은 물이 있어도 정작 마실 물은 없는 것처럼 참 사랑이 없기에 이 사회는 병들어가고 도덕적 타락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은 관념적이나,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아가페 사랑 즉 나를 희생하고, 조건 없는, 타산적이지 않고, 변함없이, 주는 사랑을 말합니다.

사랑스럽지 못한 사람,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 사랑 받기를 거절하는 사람을 사랑하기가 힘듭니다. 또한 자신이 손해 볼 까봐, 사랑하였다가 상처받을까봐서도 사랑을 안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속성을 알고도 사랑을 한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사랑받을 만한 자격도 없는 우리, 즉 죄인된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주신 댓가없는 사랑을 주셨습니다.
'내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성탄을 바로 맞이하는 우리 온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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