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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산상수훈강해③] 소금으로 빛으로(2) (마 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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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하준 목사

지난주에 이어 마태복음 5:13~16 본문을 가지고 ‘소금과 빛’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지난주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나누었고 오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또한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을 나눌 것입니다.

빛의 종류

우리 말 신약성경에 보면 모두 똑같은 ‘빛’이라는 말로 번역되었지만 본디 헬라어 성경에 보면 ‘빛’이라는 낱말이 상당히 여러 가지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가 ‘포스’라는 낱말인데 이것은 ‘빛 또는 광채’를 뜻하며 햇빛, 불빛 등을 일컬을 때 사용합니다. 나아가 이 ‘포스’는 비유적으로 ‘생명의 빛’, ‘진리의 빛’을 뜻하고 ‘선행’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포스’는 또한 어둠이 아닌 하나님 편에 속한 것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어둠의 자녀’가 아닌 ‘빛의 자녀’들이라는 말이 나올 때 늘 이 ‘포스’를 쓰는 것입니다. 더욱이 가장 중요한 것은 이 ‘포스’가 예수?자신(특히 요한, 요 1:4, 8:12 등)이나 그가 주시는 구원을 뜻할 때 사용된다는 것입니다(벧전 2:9).

두 번째가 ‘뤼크노스’로서 이는 등불을 의미합니다. 저도 옛날 학교 다닐 때 배운 것이 기억나는데 빛의 밝기를 뜻하는 ‘조도’(照度)의 단위를 룩스 혹은 럭스(lux)라고 부릅니다. 바로 이 룩스가 이 헬라어 ‘뤼크노스’에서 나온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5:15에서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여기서 ‘등불’이 바로 ‘뤼크노스’입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비치는 역할을 바로 이 등불에 비유하신 것이지요.

세 번째는 ‘람파스’인데 이는 ‘횃불, 등불’ 등을 가리킵니다. 당연히 이 ‘람파스’에서 영어단어 lamp가 나왔지요. 이는 등불을 뜻하는 ‘뤼크노스’와 달리 소나무로 만든 ‘횃불’이나 기름에 심지를 꽂아 놓은 등불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열 처녀가 들고 있던 등불과, 예수님을 잡으러 올 때 군병들이 들고 온 횃불이 ‘람파스’입니다. 오늘 본문 15절 뒷부분에 ‘비취느니라’라는 말을 하실 때는 ‘람파스’라는 명사에서 나온 ‘람포’라는 동사를 사용합니다. 이외에도 ‘펭고스’와 ‘포스텔’이라는 낱말이 신약성경에 두 번씩 나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

제가 이렇게 설교 시작부터 장황하게 ‘빛’이라는 낱말에 대해 설명하는 데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인 14~16절에서 ‘빛’에 관계된 낱말이 여러 번 나오는데 이 낱말들이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14절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할 때와 16절에서 ‘너희 빛을’ 하실 때는 ‘포스’라는 낱말을 사용합니다. 앞서 ‘포스’가 뭐라고 했습니까? 보통 빛이 아니라 생명의 빛, 구원의 빛, 진리의 빛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어 세상을 비친다는 것은 이 세상에 생명과 구원과 진리를 밝히 보여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 앞서 이 ‘포스’는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 자신을 뜻한다고도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12에서 예수님이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실 때도 ‘포스’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참된 빛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에서 생명의 빛, 구원의 빛, 진리의 빛을 비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세상의 빛은 오직 예수님 한 분인데 어떻게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이것을 알려면 밤하늘의 달의 쳐다보면 됩니다. 여러분도 밤하늘에 달이 환하게 빛나는 이치를 아시지요? 달 자체는 빛을 내지 않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달에 가면 환한 빛이 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1969년 아폴로 11호 우주선이 달나라에 가보니 빛은커녕 어두운 암흑천지였습니다. 그러면 달은 어떻게 그런 환한 빛을 내는 것입니까? 다름 아니라 달이 마치 거울처럼 태양의 빛을 반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지요. 출애굽기 34장에서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사십일 동안 여호와 하나님을 만난 후 산에서 내려오니 그 얼굴에서 광채가 환하게 나서 그 얼굴을 수건으로 가려야 했다고 나오는데 이와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 자신은 비록 어둡고 추하고 빛을 낼 수 없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광채를 반사하면 우리도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빛을 반사하여 우리도 ‘세상의 빛’이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난다고 하셨습니까? 14절을 다시 봅니다.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이 비치시는 빛은 생명의 빛이요 구원의 빛인 동시에 진리의 빛입니다. 빛은 어두운 곳을 비치고 어둠 속에 묻혀있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나게 하는 역할을 하듯 세상의 빛은 진리의 빛으로서 모든 것을 드러나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와 죄 모두를 말입니다. 창세기 29장에 보면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하는데 거기서 라반의 둘째 딸 라헬을 만나 한눈에 반합니다. 그래서 이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 칠년을 수일 같이 여기며(29:20) 열심히 일하는데 그만 삼촌 라반에게 속고 맙니다. 라반이 첫날밤에 라헬 대신 언니 레아를 신방에 들여보낸 것이지요. 다음날 아침 눈을 떠보니 옆에 누워있는 여자는 라헬이 아니라 레아였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왜 그토록 똑똑한 야곱이 레아와 라헬도 구분 못한 것일까요? 그 당시에 신부는 신방에 들어갈 때 얼굴을 천으로 가리고 들어가게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면사포를 벗기면 얼굴이 드러나지 않습니까? 왜 몰라봤을까요? 너무 쉬운 질문입니다. 불을 껐기 때문이지요. 어두우니까 지금 이 여자가 라헬인지 레아인지도 못 알아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어두우면, 빛이 없으면 라헬인지 레아인지도 구분이 안 가고,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도 구분이 안 되고, 진리인지 죄악인지도 구분이 안 됩니다. 하지만 생명의 빛이요 진리의 빛이신 예수님이 빛을 발하시고, 또 우리가 그 예수님의 빛을 반사하여 빛을 발하면 그 진리의 빛 때문에 모든 것이 환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런 역할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진리가 드러나고 죄가 드러나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죄를 짓는지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해야 하고, 자기가 어둠의 자녀임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에게 참된 빛의 세계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너희가 사는 세상에는 결코 참 생명, 참 진리가 없음을 알라고, 참된 생명과 진리는 오직 이 빛의 세계에만 있음을 깨닫도록 해야 합니다.

등경 위의 등불

두 번째로 15절 첫 부분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할 때 ‘등불’은 ‘뤼크노스’라는 낱말을 사용합니다. 앞서 ‘뤼크노스’는 단순히 어두움을 밝히는 등불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두운 집안을 비치는 등불처럼 어두운 세상을 비치는 빛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15절에 이 등불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특별히 이 등불이 어느 위치에 있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어디에 두면 안 되고 어디에 두어야 한다고 했습니까?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은 타고 다니는 말이 아니고 곡식의 양을 재는 말(斗)입니다. 지금은 주로 리터법을 쓰지만 예전에는 주로 한 말 두 말, 한 되 두 되 하는 도량형을 쓰지 않았습니까? 저도 어렸을 때 쌀가게 가서 나무로 된 됫박에 쌀을 되어서 사오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나라에서 ‘말’은 10되에 해당하며 20리터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온 헬라어 ‘말’은 우리나라 말보다 훨씬 작아서 약 8.75리터에 해당하는 양입니다. 그런데 왜 등불을 말 아래 둔다는 것일까요? ‘말 아래 둔다는 것’은 혹자는 나무로 만든 말 용기로 덮어둔다는 말인데 흔히 등불을 끌 때 이 말로 덮어둔 것입니다. 등불은 말로 덮어두면 빛을 발할 수 없고 결국 꺼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등불은 말 아래 두지 말고 반드시 ‘등경’ 위에 두어야 합니다. 등경이란 벽의 툭 튀어나온 부분으로서 여기에 등불을 올려놓는 곳입니다. 보통 평범한 이스라엘의 가정은 이 등경이 하나뿐인데 이 등불을 그냥 방바닥이나 상 위에 두지 않고 높은 등불 받침대에 올려놓으면 빛이 퍼지면서 온 집안을 환하게 비치게 됩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등경이 빛을 멀리 비치게 하는 반면, 말은 빛을 비치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등불을 말 아래 둔다는 것은 빛을 차단하는 것을 뜻합니다. 빛은 결코 차단되어서는 안 됩니다. 등경처럼 높은 장소, 개방된 장소에 놓여져야만 빛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게 됩니다. 따라서 성도들과 교회는 반드시 닫혀있지(폐쇄성) 말고 열려 있어야 합니다(개방성). 교회의 문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어야 하며, 성도들의 마음은 반드시 오픈(open)되어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누가 들여다보아도 다 보이도록 투명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과거 중국집이나 식당의 주방은 다 막혀 있었습니다. 그 속에 들어가 조리를 하면 도대체 무슨 재료를 어떻게 쓰는지 얼마나 불결한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반드시 식당의 주방을 개방하도록 했습니다. 그때부터 재료나 요리방법, 위생에 조금이라도 더 신경을 쓰게 된 것입니다. 개방이 되어 환히 들여다보이면 불편합니다. 그만큼 힘이 듭니다. 하지만 그만큼 조심하게 되고 그만큼 노력하게 됩니다. 교회가 개방되고 투명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또한 빛은 높을수록 더 넓은 곳을 비추게 됩니다. 성도들과 교회의 이상은 세상과 달리 높고 숭고해야 합니다. 그리고 높이 있으면 사람들에게 잘 보입니다. 노출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제대로 바르게 행하면 사람들에게 더 칭찬을 받게 되고, 잘 못 하면 더 비난과 손가락질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왜 교회만 가지고 못살게 구느냐며 불평하는 분도 있고 교회 다니는 것이 무슨 죄라고 자꾸 수군거리냐는 사람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불평할 일이 아닙니다. 교회가 비난을 받고 성도가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높은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감추어지기 원한다면 말 아래 덮어두는 것처럼 불교처럼 산속으로 들어가 버리면 될 것입니다.

사람 앞에 비치는 빛

개방되어 있다는 것, 노출되어 있다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불편합니다. 신경 쓰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훤히 개방되고, 높이 노출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우리의 빛을 세상에 비칠 수 없습니다. 그래서 16절에 주님은 자꾸 우리 모습을 개방하고 노출시켜서 우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취게 하여 사람들이 우리를 보도록 하라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우리가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사람들이 여지없이 손가락질을 퍼부어 댈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여주면 사람들은 칭찬을 할 것이고 인정을 할 것입니다. “과연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다르다”고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칭찬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행동 하나, 말 한 마디에도 신경을 쓰고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포항 시내에서 운전을 할 때 참 조심합니다. 포항이 좁은 도시고 이래 뵈도 제 얼굴이 꽤 알려져 있어서 자칫 운전하다 시비라도 붙으면 어느 교회 집사님을 만나게 될지 모르지 않습니까? 실제로 제가 아는 목사님이 어느 시골 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운전을 하고 가다가 시비가 붙어 대판 싸움을 했다고 합니다. 모르긴 해도 삿대질에 육두문자도 썼겠지요? 그런데 부흥회를 시작하고 가만히 보니 맨 앞자리에 방금 싸우던 그 사람이 떡하니 앉아 있더랍니다. 물론 부흥회 내내 두 사람은 서로 얼굴도 못 쳐다보고 행여 얼굴 마주칠까봐 전전긍긍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제가 지금 나중에 부흥회 가서 만날지 모르니 운전하다 싸우지 말라는 뜻 아닙니다. 소극적으로 내 죄악이 안 드러나고 내 실수가 탄로 나지 않도록 숨기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려면 차라리 등불을 말 아래 두면 될 것입니다. 숨기면 되고 죄도 안 들키도록 몰래 지으면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높은 곳에 놓여 있는 등불입니다. 그러므로 숨기는 식의 소극적인 자세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자세와 생활을 바꾸어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우리의 언어와 행실을 바꾸어 빛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착한 행실이란 결코 공로주의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가장 무서운 적은 공로주의입니다. 공로를 쌓고 착한 일 해서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결코 우리의 착한 행실로 인해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착한 행실로 우리가 영광 받는다고 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의 착한 행실로 인해 우리가 칭찬 받는다면 그것은 공로주의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착한 행실을 통해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리기 때문에 공로주의가 아닙니다. 우리가 착한 행실로 칭찬을 받게 되면 우리는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요 다만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눅 17:10). 다 하나님이 시켜서 한 일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이것이 참된 빛의 자세입니다. 빛은 자신이 살고서는 빛날 수 없습니다. 내가 타버려야 합니다. 소금이 녹아져야 짠맛을 내듯이 빛은 태워져야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착한 행실을 통해 오히려 나는 죽어지고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짠맛을 잃은 소금과 감추인 등불은 똑같이 무용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적극적으로 녹아지고 태워져서 짠맛을 내고 빛을 발하지 못하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면 밖에 버리어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사람들에게 무시와 비난을 받게 됩니다. “무슨 소금이 저래? 무슨 빛이 저 모양이야?” 하고 말입니다. 소금은 어디에 갖다 놓아도 짠맛을 내야 합니다. 빛도 어디에 갖다 놓아도 빛을 내어야 합니다. 그렇게 못하면 ‘소금’이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는데 소금이 아니요, ‘빛’이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는데 실제는 빛이 아닌 존재가 됩니다. 본질을 잃어버린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성도는 성도인데 성도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3:1에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하신 말씀처럼 겉으로는 그리스도인이요, 교적 상으로는 효자교회 성도지만 실제로는 죽은 자요, 생명을 잃은 자, 가치를 잃은 그리스도인이 되어 버림 받고 무시당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등불과 같다고 했습니다. 촛불이나 등불은 스스로 불을 붙일 수 없습니다. 누군가 불을 붙여주어야만 합니다. 이 불을 붙여주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은혜의 불을 붙어야 합니다. 능력의 불이 불어야 합니다. 또 등불은 기름 없이는 빛을 내지 못합니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지 못해 신랑을 맞이하지 못합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우리도 늘 기름을 예비해야만 빛을 내고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기름은 은혜이며 기도입니다. 우리 안에 다른 것(돈?)은 몰라도 기름만은 떨어지지 않아야 착한 행실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달과 같다고 했습니다. 달도 종류가 많습니다. 보름달처럼 꽉 차서 세상을 환히 비출 수도 있지만 작게 쪼그라든 초승달이나 심지어 거의 빛을 잃은 그믐달도 있습니다. 은혜 충만, 능력 충만하면 보름달이지만 능력과 은혜를 다 잃으면 그믐달이 됩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또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보름달입니까? 초승달입니까? 그믐달입니까? 아니면 아예 빛이 다 꺼져버린 재와 같은 존재입니까? 다시 한번 예수님을 통해 불이 붙게 되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일어나 빛을 발하는 여러분들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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