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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추시는 예수님 (요 7: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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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장영일 목사

1)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2)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3)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5)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8)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9)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10)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시니라. 11)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12) 예수께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혹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하게 한다 하나 13)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를 말하는 자가 없더라.

시작하면서

성탄의 사건에 그리스도의 성품들이 깊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곧 '감추임'입니다. 탄생의 소식을 왕들과 많은 사람들에게 감추셨습니다. 몇 되지 않는 동방박사들과 밤중에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만 알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나사렛의 시절은 거의 감추인 시절이었습니다. 서른이 되어 요단 강에 나타나시기 전까지는 거의 예수님을 아는 자가 없었습니다. 탄생하시어 30년 동안도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로써 세상의 구세주이신데 당신을 나타내시지 않았습니다. 공생애 가운데서도 예수님은 필요한 경우외에는 스스로를 나타내시지 않고 자신을 감추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런 모습이 매우 확실하게 보여지고 있습니다.  이 '감추임'의 의미를 세 가지로 나누어 보겠습니다.

1. 첫 번째는 겸손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갈릴리 지역에서만 사역하시는 예수님에게 찾아가서 항의를 하였습니다. 본문 3, 4절입니다.

"3)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당시 갈릴리와 유대는 요즘 우리나라로 보면 지방과 수도권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지방에 머물며 작은 고을들만 다니시는 예수님이 답답해 보인 것 같습니다. 지방에서 아무리 유명해도 수도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수도권에 가보면 매우 분명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수도권에서 일해야 소위 전국구가 됩니다. 요즘 우리나라 지방 대학 출신들이 취업 시험에 합격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와 같이 어렵다고 합니다. 같은 성적이면, 아니 낮은 성적이라도 회사가 수도권 출신을 택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도 그랬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이런 부분에서 매우 민감했고, 그런 시류를 지혜롭게 타야 한다고 예수님께 간청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5절에 보면 "그(예수님)의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오류"(잘못된 믿음)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자기의 척도에 맞지 않으면 믿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본은 신뢰이며 수용인데 잘못된 믿음은 자기 중심입니다. 내 생각하고 같으면 옳고, '은혜스럽다'하고, 최고의 사람이라고 부추기고, 그래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의 생각엔 '자기 형인 예수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면 시시하게 시골에 머물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있는 유대로 올라가서 그들에게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고 자기를 나타내야 하지, 그렇지 못하고 지방 고을이나 다니며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머물면 어찌 하나님의 아들이라 믿을 수 있느냐?'는 반론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가지 다른 모양의 오류도 경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형제의 생각과는 거꾸로 '수도권에서 큰 교회에 목회하는 사람, 장로들, 심지어 성도들 모두다 엉터리다. 참 예수의 제자는 두메산골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하고, 어려운 교회를 찾아 섬기며 봉사하는 그런 종들이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독선을 경계해야 합니다.

여러분! 겸손이란 외모에 있지 않습니다. 그 중심에 있습니다. 그 중심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자기를 버리고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자가 진정한 겸손한 자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형제들조차도 인정하지 않고 믿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자기를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2. 둘째는 기다림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분명 참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빛은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어야 한다면, 예수님도 그 형제의 요구대로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그래서 유대로 올라가서 수도권의 인물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결국 그랬습니다. 그러나 나타내어야 할 때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본문 6절부터 9절까지 봅시다.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 . . 8)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9)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형제들과 예수님의 차이는 조급함과 기다림입니다. 우리는 명분이 분명하고 이유가 확실하다 해도 행동의 때를 잘못 선택하면 큰 과오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능력은 사실 대동소이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도 성공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는 바로 시간의 선택이란 얘기가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기회를 잡는 자와 놓치는 자의 차이입니다. 기회가 오지 않았는데 조급하게 서두르다가 모든 일을 그러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면 기회가 지나도록 모르고 늦장을 부리다가 모든 것을 놓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시간을 선택하는 기술이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이 선택이 곧 믿음이기도합니다. 믿음으로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전적 신뢰하는 자는 기다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 기다림이 사람들에게 너무 더디다고 조급증이 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함부로 일어나지 마십시오.

구약의 사울 왕이 그 실패자의 대표입니다. 전쟁터에서 사무엘이 속히 오지 않자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제사를 왕이 집전하다가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습니다. 그 징벌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곧 사울에게서 하나님의 영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왕권의 박탈로 이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때조차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랐습니다.

3. 셋째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본문 11절 이하 말씀을 봅니다.

"11)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12) 예수께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혹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하게 한다 하나"

예수님은 그 형제들에게는 처음에 명절에 유대로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셨지만 결국 유대인의 규례를 따라 몰래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모인 무리들이 수군거리기를 '예수는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자도 있고, '그렇지 않다' 하는 자들도 있어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옛적이나 지금이나 세상은 비슷한 것이 많은데 그 중의 하나가 사람들의 수군거림입니다. 그 수군거림은 좋다 싫다가 있기 때문입니다. 일에 대한 취미나 취향이 각기 다를 뿐 아니라 사람에 대한 기호도 각기 다릅니다. '믿음의 큰 인물'은 이 수군거림에 빠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좋다하는 말에 빠져 일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싫다하는 말 때문에 일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랬습니다. 이 수군거림을 들으며 당신의 갈 길을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만 의존했습니다. 물론 우리는 사람들의 여론을 중시해야 합니다. 여론을 무시하고 독불장군처럼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민심이 천심이란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수군거림의 여론은 따르지 않아야 합니다.

사울 왕의 실패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다윗과 자기를 비교하면서 수군거리기를 "사울은 천 천이요 다윗은 만 만이라"고 하는 소리에 빠져서 결국 옹졸한 왕이 되어 패배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마음을 빼앗기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합니다.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대림절 셋째 주간에 들어가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행동 양식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감추실 줄 아는 분이었습니다. 이것은 곧 겸손과 기다림 그리고 하나님만 전적 의지한 행동 양식이었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를 살펴서 예수님을 닮는 훈련의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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