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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청지기의 삶 (렘 8:4~7, 계 2:8 ~ 11, 마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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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박종화 목사 (경동교회)

구약의 말씀: 예레미야 8:4 ~ 7
  "너는 그들에게 전하여라.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누구나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지 않겠느냐? 누구나 떠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겠느냐? 그런데도 예루살렘 백성은, 왜 늘 떠나가기만 하고, 거짓된 것에 사로잡혀서 돌아오기를 거절하느냐? 내가 귀를 기울이고 들어 보았으나, 그들은 진실한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이런 일을 하다니!' 하고 자책은 하면서도 자신의 악행을 뉘우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자기들의 그릇된 길로 갔다. 마치 전쟁터로 달려가는 군마들처럼 떠나갔다. 하늘을 나는 학도 제 철을 알고, 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도 저마다 돌아올 때를 지키는데, 내 백성은 주의 법규를 알지 못한다.

서신서의 말씀: 요한계시록 2:8 ~ 11
"서머나 교회의 천사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분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네가 당한 환난과 궁핍을 알고 있다. 그런데 사실 너는 부요하다. 또 자칭 유대 사람이라는 자들에게서 네가 비방을 당하고 있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유대 사람이 아니라 사탄의 무리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보아라, 악마가 너희를 시험하여 넘어뜨리려고,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감옥에다 집어 넣으려고 한다. 너희는 열흘 동안 환난을 당할 것이다. 죽도록 충성하여라. 그러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너에게 주겠다.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이기는 사람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복음서의 말씀: 마태복음서 16:1 ~ 8
  예수께서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있는데, 그는 청지기를 하나 두었다. 이 청지기가 재산을 낭비한다고 하는 고발이 들어와서, 주인이 그를 불러 놓고 말하였다. '자네를 두고 말하는 것이 들리는데, 어찌된 일인가? 자네가 맡아 보던 청지기 일을 정리하게. 이제부터 자네는 청지기 일을 볼 수 없네.' 그러자 그 청지기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청지기 직분을 빼앗으려 하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옳지, 좋은 수가 있다. 내가 청지기의 자리에서 떨려 날 때에, 나를 자기네 집으로 맞이해 줄 사람들을 미리 마련해야 하겠다.' 그래서 그는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다가, 첫째 사람에게 '당신이 내 주인에게 진 빚이 얼마요?' 하고 물었다. 그 사람이 '기름 백 말이오' 하고 대답하니, 청지기는 그에게 '자, 이것이 당신의 빚문서요. 어서 앉아서, 쉰 말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당신의 빚은 얼마요?' 하고 물었다. 그 사람 '밀 백 섬이오' 하고 대답하니, 청지기가 그에게 '자, 이것이 당신의 빚문서요. 받아서, 여든 섬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인은 그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였다. 그것은 그가 슬기롭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아들들이 자기네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아들보다 더 슬기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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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창조절 마지막 주일이고 다음주일부터는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예수께서 오신 12월 25일을 기다리는 네 개의 주일이 있는데, 다음 주일이 그 첫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은 교회절기상 창조절의 마지막 주일리라는 말은 교회력으로 따지면 오늘이 한해의 마지막 날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이 교회력상으로 새로운 한해의 출발이 됩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이제 교회력으로는 마지막 주일인 오늘,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무엇일까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청지기로 세우셨으니, 남은 시간을 충직한 청지기로서 살아가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 역사에서 기억할 만한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때는 1895년, 지금부터 딱 110년 전의 일입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이 해는 94년부터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돌아갔고, 청일전쟁의 여파로 국토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크게 어려움을 당한 그때입니다. 청일전쟁에서는 청나라가 지고 일본이 이겼습니다. 나라는 궁핍에 휩싸였고, 청나라와 일본이 우리 한반도에서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파괴와 굶주림과 질병으로 고생했습니다. 전쟁 뒤에는 얼마나 많은 질병이 창궐합니까? 6․25전쟁 뒤에도 문둥병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1895년에도 마찬가지였다고 교회사가들은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중요한 역사 기록 하나가 있습니다. 우리 경동교회가 위치한 이 광희동에 관련된 일입니다. 뒤편으로 올라가면 광희문이 있는데, 여러분들 다 아시죠? 이 광희문이 1895년 당시에 4대문 안의 사람들에게 뭐라고 회자되었냐 하면, 시구문이라고 했습니다. 시신을 뜻하는 시(屍)자에다가 입 구(口)자를 써가지고 시구문(屍口門))이라고 했으니, 시신이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입니다.
전쟁 이후에 질병과 궁핍 때문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데, 죽은 시신들을 다 장례를 치를 수가 없어서, 사대문 안에 사람들의 시신을 광희문 밖에다 버렸답니다. 얼마나 많은 시신이 그 문으로 나갔는지, 어느 날 하루는 통계에 의하면 사대문 안에서, 그러니까 한양에서 나온 170구의 시신을 시구문, 다시 말해 광희문 밖에 버렸답니다. 이 기록은 한국에 최초의 선교사로 왔던 언더우드 목사님이 선교부에 보고한 문서에 남겨진 것입니다.
이분의 기록을 보면 시신들을 무차별로 그냥 갖다 버렸는데, 너무나 안타까워서 당시 몇 명 안 되는 선교사들과 교인들을 동원하여 시구문에 와서 시신들을 잘 수습하여서 장례식을 치러주었습니다. 그렇게 장례식 치를 때 교인들은 다 완장을 찼는데, 완장에는 십자가 표시를 했다고 합니다. 시신들 중 일부는 각기 선산에 묻히기도 하고, 일부는 광희문에 묻히기도 했습니다. 한양에 살던 사람들이 너무 감동했고, 그 후로 십자가는 장례 표시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동학혁명이 좌절로 끝나고 난 다음에 한국역사에 보면 사람들이 많이 기독교로 개종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광희문 사건이 있고 난 뒤에 당시 한양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의 수가 급증했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장례식 때문이었습니다. 감동한 사람들이 많은 헌금을 내었고, 이 헌금의 일부를 가지고 새문안교회를 세웠습니다. 새문안교회 건립자금 일부가 광희문 장례식에서 나온 돈이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교회사를 읽으면서 110년 전에 있었던, 우리 경동교회 주변 지역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교회사학자가 제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경동교회가 장충동에 세워져 있는 뜻 중에 하나는, 110년 전에는 고통 가운데 죽어간 많은 영혼들에게 장례식을 치러주었지만, 지금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인생으로 거듭나서 살도록 만들기 위해, 십자가를 달고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나서라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분은 그런 뜻으로 경동이 세워진 줄 알고 그 뜻을 실현하시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교회사를 연구하는 분의 부탁입니다.
오늘 요한계시록의 말씀에도 보면,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을 핍박하고 능욕하고 어렵게 하겠지만, 참고 견디며 최선을 다하라. 그러면 이후에 생명의 월계관, 생명의 면류관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사실 교회는 어디에 세워져 있든지 간에, 십자가의 표지를 달고서, 이미 우리를 떠나간 사람들에게 영원한 평안을 비는 장례식을 치러주어야 하고, 우리 곁에 살아 있는 사람들한테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진실하게 살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시구문 때로부터 11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꼭 광희문, 장충동이 아니더라도,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고 삶으로 보여주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의 존립가치가 있고, 신자의 존립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인의 존재이유입니다. 이걸 가리켜서 예수께서는 청지기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성서 헬라어에 보면 ‘오이코미아’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경제’ 또는 ‘경륜’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 말에서 파생된 단어로 ‘오이코노모스’라는 것이 있습니다. 경제를 다루는 사람, 경영을 하는 사람, 위탁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경제인입니다. 경영인입니다. 이것이 우리말 성서에는 청지기로 표현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청지기라고 하십니다. ‘오이코노모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누굴 위한, 무엇을 경영하기 위한 오이코노모스입니까?
오늘 누가복음 말씀은 솔직히 말하면, 이해하기가 몹시 어렵기도 하고 또 뭔가 모순 되는 듯해 보이는 그런 비유 중에 하나입니다. 부자 한 분이 계셨는데 굉장한 부자였습니다. 그분이 재산을 관리할 청지기 한 사람을 구해왔습니다. 그런데 청지기로 고용된 사람은 농사짓는 사람들한테 토지를 임대하고서 그 대가로 가을에 소출의 일부를 거두어들이는데, 그것을 중간에서 착복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사업자금을 빌려주고서는 너무 많은 이자를 요구하고서 일부를 자기 주머니에 따로 챙겼습니다. 부정입니다. 이 사실을 안 주인이 이 청지기를 해고하려고 합니다.
이를 안 청지기는 “내가 이제 청지기란 귀한 직에 있다가 해고될 것이니 어떻게 하겠는가. 가서 땅을 파고 농사를 짓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러운 일이구나.” 생각하고서는, 꾀를 하나 냈습니다. 사업자금을 빌려준 사람, 토지를 임대해준 사람들을 불러다가 그들에게 인심을 쓰고는 해고당한 뒤에 그들에게 빌붙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하나씩 불렀습니다.
사업자금으로 기름 100말을 빌려간 사람을 불렀습니다. 기름 100말이면 한 말에 10데나리온으로 쳐서 1,000데나리온, 요즘으로 치면 일천 날 동안에 일당에 해당합니다. 3년 반 정도나 4년 정도에 월급에 해당되는 액수가 기름 100말 값입니다. 그 사람과 500말만 빌려간 것으로 계약서를 고칩니다. 사문서 위조입니다.
밀 100석을 빌려간 사람을 불러서, 당시에 밀은 기름보다 두 배 반이나 비쌌는데, 80석만 빌려갔다고 쓰게 하고 20석을 탕감해 줍니다. 기름 100말 중에 50말을 탕감해 주었으니 그 돈이 약 오백 일분 임금이 되고, 밀 20석을 줄여 주었으니 그 돈이 오백 일분 임금이 됩니다. 인심 쓸 테니까 나중에 그 만큼 잘해달라는 뜻입니다.
이 비유 이야기를 하시면서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불의한 청지기가 차라리 잘했다.” 어떻게 부정행위 한 사람을 예수께서는 칭찬하십니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유대사람들에게 한 말입니다. “이 세상의 아들들, 어둠의 자식들이, 당신들이 말하는 빛의 아들들 보다 훨씬 더 좋은 일을 했다.”
그건 무슨 뜻입니까? 고대 팔레스타인의 풍속을 보면 이해할 수 있는 측면도 있습니다. 당시에 부자라는 것은 돈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회적 존경과 영향력이 있어야 했습니다. 부자에게는 사회적 존경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불의한 청지기를 해고하면, 물론 청지기는 감옥에 가겠지만, 불합리한 빚 문서도 문제가 되고 주인의 체면은 엉망이 됩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아랫사람들을 대했기에 저런 일이 벌어지나 하게 될 것이니, 청지기가 망할 뿐만 아니라, 주인의 체면도 엉망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까 이 주인은 청지기가 잘못은 했지만, 뒤처리를 잘해서 자기 체면이라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이 사람을 칭찬했을 거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뜻은 그런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비유를 말씀하실 때 결코 허공에 대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항상 일정한 사람들을 앞에 놓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는 유대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 중에는 율법을 내세우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도 잘 지키고 덕을 베풀기도 하지만, 예수께 위선자라는 욕을 들을 정도로 자기의 공을 내세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아주 반대되는 사람들, 반대되는 그룹이 하나 있었습니다. 성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들을 가리켜서 ‘에세네파’라고 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시장에 또 거리에 나가고 세상에 나가서 남들에게 보이게 자선을 베풀었지만, 에세네파는 그와는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은 다 썩었다고 생각하고서, 자기들끼리의 구별된 삶을 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해바다 근처에 공동체를 건설했습니다. 이 공동체에 들어온 사람은 재산을 다 팔아서 무조건 바치고―이런 거 우리나라에도 있죠? 세계에도 많고요―서약을 해야 했습니다. 누구든지 우리 공동체의 회원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빛의 자녀들을 사랑하고 어둠의 자식들은 미워해야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모든 사고파는 거래도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바깥세상에서 거래되는 채소도 고기도 음료도 일체 사서 먹으면 안 되었습니다. 세상은 부정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세속의 인간관계도 냉정히 단절해야 했습니다. 재산을 다 헌납했으므로 사유재산은 아예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세상과 단절하고 자기들끼리 신앙의 순결함을 지키는 공동체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 공동체를 에세네 공동체라고 부릅니다. 이 공동체가 사해 근처 쿰란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쿰란공동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부류가 큰 세력으로 등장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런 사람들과 대립을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재산과 권력을, 모든 능력과 복을 누가 담을 둘러친 당신들끼리만 누리라고 했느냐? 하나님의 뜻은 다르다. 당신들끼리만 선하고 밖은 다 악하고, 그래서 미워하고 저주하라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당신들보다는 더러운 어둠의 세상에 있는 이 청지기가 오히려 하나님 보시기에 더 좋은 일을 했다.”
이 말씀은 세상의 나쁜 사람들을 칭찬한 것이라기보다는, 자기들만의 구원을 위해서 성스러운 영역을 설정하고 세상과 담을 쌓는 사람들한테 문을 박차고 나가기를 촉구하신 것입니다. “담벼락을 허물고 세상에 나아가서 구원의 역사를 펼쳐라.” 하나님이 그렇게 거룩한 담을 치고 그 안에서 지내기를 원하셨다면, 하나님은 결코 이 땅에 몸을 입고 오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는 왜 필요합니까? 하나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께서 세상과 완전히 담쌓고, 시체와 같이 썩은 세상을 시구문(屍口門) 밖에 내다 버리려 하셨다면 크리스마스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체와 같은 세상을 인간들을 끌어안고 구원을 이루시기로 작정하시고, 땅 위에 임하시기로 결단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이것은 하늘과 땅의 벽을 허무신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크리스마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불의한 방법으로라도 벽을 허무는 것이, 소위 숭고한 곳에 모여서 세상과 단절하고 사는 것보다 오히려 낫다는 말씀입니다. 차라리 자기를 위해서이기는 하지만 세상과 담을 헌 이 청지기가 문을 닫은 당신들보다는 훨씬 더 복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성서 이야기의 끝부분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래서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맞아들이게 하라.” 여기서 “불의한 재물”이라는 말은 쿰란에 살던 에세네 공동체의 용어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재물은 다 불의한 재물이고, 자기 공동체 바깥의 것은 전부 불의하고 썩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말을 빌려서 차라리 그 재물을 가지고 좋은 일 하면서 하나님 말씀 전하는 것이, 세상과 등지고 혼자 사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두 가지입니다. 세상을 구원한답시고 인간들이 만든 신앙적 잣대를 가지고 자신은 혼탁한 세상 가운데서도 옳다고 스스로를 내세우는 위선자들인 바리새파 사람들도 옳지 않고, 그렇다고 세상을 등지고 자기들끼리만 살면서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단절된 생활, 이것도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벽을 깨고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탄의 복음이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는 벽을 깨고 나가서 세상을 구원하는 역사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이요 봉사요 선교입니다. “세상으로 나가자. 복음을 가지고 가자.”
에세네파와 바리새파의 이야기는 이천 년 전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도 비슷한 모습들이 있습니다. 우리만 옳다, 세상은 썩었다고들 외치며 상대를, 세상을 외면합니다. 그렇다면 썩은 건 누가 구원합니까? 오늘 예수께서는 그 썩은 곳에 들어가서 구원의 역사를 베푸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고귀한 것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의 소유주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이 주신 물질의 관리자요 경영자인 청지기들입니다. 우리에게 준 모든 것은 우리의 소유가 아닙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 것입니다. 물질만 아니라, 지식도, 재산도, 권력도, 도덕도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맡아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해야 하는 청지기입니다.
바리새파나 에세네파의 잘못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자기들만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세상 사람들과 나누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질적, 영적, 지적인 모든 복의 관리를 완전히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부터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최고의 경영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요즘 말로 CEO, 그렇습니다. 최고 경영자입니다.
아니, 뭐라고 해도 좋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임을 기억하고, 그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지혜를 최대한 짜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십시오. 바르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지혜, 인간의 의지, 자율성,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 조심하십시오. 하나님의 것을 탐내지는 마십시오.
창세기의 기사는 이런 점을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모든 나무의 과실을 먹게 하시고 심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먹게 하셨지만, 선악과만은 먹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상징입니다. 주인인 하나님을 밀어내고 내가 주인이 되는 것은 안 됩니다. 그러면 파멸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CEO로 세우셨으니 소신껏 관활하고 즐겁게 사십시오. 그러나 영원한 주인은 하나님이란 것만 기억하십시오. 선악과는 하나님의 것, 생명나무는 여러분들의 것입니다.
이렇게 알고 우리 크리스마스를 맞이합니다. 하나님의 CEO가 된 여러분, 오늘부터 경영하는 이 일에 충성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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