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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병이어의 가르침 (마 14: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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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양인 목사

사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그야말로 기적의 연속이었습니다. 수많은 병자들이 주님께 나아와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명령 하시니 사람들에게 붙었던 귀신들이 쫓겨나갔습니다. “잔잔하라 고요하라” 주님의 한 말씀에 갈릴리 바다의 풍랑이 잔잔케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죽은 사람들을 살리신 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처럼 떡 다섯 개로 수많은 사람을 먹이신 기적도 행하셨습니다. 특별히 본문에 나오는 기적을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이 사건은 사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복음서를 서로 비교해 보면 그 내용을 더 자세게 알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장소에 대하여 마태와 마가는 단지 빈들이라고 했으나, 누가는 벳세다라고 했고, 요한은 디베랴 건너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출처에 대해서 공관복음에는 제자들이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 했으나, 요한은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고 했습니다. 이 같은 기록상의 차이점은 우리로 하여금 이 사건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도와줍니다. 이 시간 저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주는 교훈을 살펴봄으로써 성도님들과 더불어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의 긍휼하심을 잘 보여줍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백성들을 어떤 심정으로 대하셨는지 말해 줍니다. 마태는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고 하였고, 마가는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고 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이것이 인생들을 대하시는 주님의 심정입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저만 생각하기에 급급해서 다른 사람들을 배려할 겨를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서로를 동료로 생각하기보다 경쟁상대로 여깁니다. 우리 사회를 보십시오. 생존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 모릅니다. 심지어는 어린아이들마저 끝없는 생존경쟁에 내몰린 상태입니다. 사람들을 경쟁의 상대로 보는 한 불쌍한 마음을 갖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경쟁상대로 보신 적이 없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베푸는 편을 택하셨습니다. 그 당시 유대는 로마의 식민지로서 백성들은 로마 당국의 착취에 시달렸습니다.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 종교가들 역시 백성들을 위하기는커녕 백성들의 등에 무거운 짐을 지우는 데 급급했습니다. 이리하여 백성들은 어느 곳에서도 위안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백성들을 진심으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는 백성들의 영적 실상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종교를 이용해서 권익을 누리는 데만 관심이 있었지, 백성들의 영적인 갈급함을 해결하는 데는 무관심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백성들을 올바로 인도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지도자는 삯꾼입니다.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 정치 지도자도 삯꾼이고, 그런 종교 지도자도 삯꾼입니다. 무릇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지도자가 될 자격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벳세다 들판에 모인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선한 목자의 심정입니다. 사자나 호랑이나 곰과 같은 맹수는 혼자서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지만, 양들은 사정이 다릅니다. 양은 자기를 방어할 능력이 없으므로 목자가 없으면 비참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목자가 없는 양들은 이리나 사자에게 잡혀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양들에게 양식도 필요하고, 마실 물도 필요하고, 거처할 우리도 필요하지만, 그러한 것들보다 더욱 필요한 것은 양들을 사랑으로 보살펴 줄 목자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대로, 목자 중에는 삯꾼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감언이설로 민중을 속여서 착취하는 지도자들이 많습니다.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그런 자들은 삯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전혀 다른 분이십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0)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13)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14)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자기 목숨을 아낌없이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주님께서는 구속하신 우리에게 날마다 필요한 영의 양식을 내려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날마다 체험함으로 영혼의 만족을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오병이어의 기적은 우리의 가진 것을 주님께 드릴 때 큰 은혜가 임함을 가르쳐 줍니다.

벳세다 들판에 모인 사람들은 남자 어른만 오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여자들과 아이들을 셈에 넣으면 적어도 2만 명은 되었을 것입니다. 저녁이 되었으나 그들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나아와 예수님께 말하기를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하셨습니다. 이 같이 말씀하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제 생각으로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대부분이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주님께서는 가난한 그들의 사정을 동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난처하기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고 하셨을 때, 빌립은 대답하기를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고 했습니다. 이백 데나리온은 한 사람의 노동자가 이백 일 동안 일한 품삯을 모은 액수에 해당합니다. 결코 적은 돈이 아닙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가령 그만한 돈이 있다고 합시다. 갑자기 어디 가서 그 많은 사람들이 먹을 빵을 구해 올 수 있단 말입니까? 참으로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마침 안드레가 한 아이를 데리고 주님께 와서 말하기를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었더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위대한 기적이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우리가 명심할 것은 주님께서는 들판에 널려있는 돌덩이를 가지고 떡덩이가 되게 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대신, 한 어린이가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시고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먹은 빵은 밀이나 보릿가루를 반죽해서 얇게 펴서 불로 달군 돌판 위에 구운 것입니다. 모양도 없고 맛도 별로 없는 매우 단순하게 만든 빵이었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 역시 한 뼘이나 될까 말까한 작은 물고기였습니다. 그 빵과 물고기는 어린아이의 한 끼 식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 적은 것을 주님께 바쳤더니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주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주시니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열왕기하 4장에는 또 하나의 기적 사건이 나옵니다. 하루는 선지자 엘리사에게 선지 생도였던 사람의 아내가 찾아와서 호소했습니다. 그 여인은 얼마나 다급했던지 엘리사를 보자 부르짖었습니다. “당신의 종인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그가 하나님을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입니다. 이제 채주가 이르러 나의 두 아이를 데려가 종으로 삼으려 합니다.”

이에 엘리사가 저에게 이르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고하라”고 했습니다. “집에 한 병 기름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엘리사가 말하기를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라 빈 그릇을 빌되 조금 빌지 말고 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고 했습니다. 여인이 물러가서 선지자가 시킨 대로 이웃에 다니며 그릇을 많이 빌려왔습니다. 문을 걸어 잠그고, 그 두 아들과 함께 그릇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랬더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기름병에서 계속해서 기름이 나왔던 것입니다. 기름 담을 그릇이 없자, 그제야 기름이 그쳤습니다. 그 여인이 선지자에게 나아가서 고하니 저가 말하기를 “너는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하나님께서는 과부의 한 병 기름을 가지고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린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골리앗이 다윗을 보고 저절로 쓰러져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갖고 나간 작은 물맷돌을 통해서 역사하셨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청소년들이 신앙생활을 성실하게 하는 것을 볼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잠언 9장 10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요 명철한 사람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이제 청소년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면서 동시에 공부도 열심히 하라는 것입니다. 공부하되, 자신의 성공출세를 위해서 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한 어린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께 바쳤듯이, 여러분의 지혜와 재능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바친다는 각오로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주님께서 여러분의 머리 위에 축사하셔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게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그 아이는 자기가 가진 많은 것 가운데 일부를 드린 것이 아니라, 전부를 드렸습니다. 만일 그 아이가 “이 떡은 내 것이니까 나 혼자 먹어야지” 그랬더라면 그 날 저녁 혼자서 한 끼를 때운 것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주님의 손에 올려놓았더니 수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행복은 나 혼자 차지할 때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이웃과 더불어 나눌 때 누릴 수 있습니다. 잠언 11장 24절로 25절에 “24)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25)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을 주님께 바치는 삶을 힘써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만일 여러분이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만 살아간다면 여러분 자신과 가족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신을 주님께 드린다면 여러분 자신은 물론이고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데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심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행하신 것은 무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한 끼 배불리 먹이시려는 데도 목적이 있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귀신들을 쫓아내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저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고쳐주신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단순히 기적이라고 하지 않고 표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표적이란, 표시로서의 기적을 의미합니다. 무슨 표시일까요? 그것은 메시야의 표시를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의사들이 있었습니다. 현대 의술에 비하면 수준이 형편없었으나 그들이 병자를 고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의사들이 고치지 못하는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예를 들면, 중풍병자, 혈루병자, 소경, 귀머거리, 벙어리, 문둥병자, 손 마른 병자, 앉은뱅이, 귀신 들린 자 등입니다.

이사야서 35장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인데, 거기 보면 “5)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6)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이 예언은 메시야가 오시면 소경, 귀머거리, 저는 자, 벙어리와 같은 불치의 병자를 고치심으로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나타내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때 메시야가 행하시는 기적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메시야의 표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 역시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메시야의 표적입니다. 그러면 오병이어의 표적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일깨워주시려고 하신 내용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생명의 떡으로 오셨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공관복음서는 침묵하고 있지만, 요한복음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그 이튿날에 있었던 일에 관해서도 말해 줍니다. 그 날 저녁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말하기를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죄인들의 구주로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무리가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으로 삼으려는 것을 아시고 혼자 산으로 떠나가셨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정치적인 개혁가로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는, 그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정치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와 다른 견해를 가졌다고 배타하면 안 됩니다. 민주국가에서는 선거 제도가 있어서 국민 각자가 자기의 정치관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정치적인 견해를 표출하는 것은 자제해야 합니다.

정치적인 견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가 한 형제라는 사실입니다. 만일 정치적인 견해 때문에 주 안에서 형제 된 사이가 갈라진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정치 개혁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 구원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기적의 떡을 얻어먹은 이튿날,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던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자 반가워하며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인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의 의중을 아시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저희가 묻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다시 묻기를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보내신 자라면 그 사실을 믿게 하는 표적을 보여 주십시오. 어제 당신이 우리에게 떡을 배불리 먹여 주긴 했지만,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매일같이 그것도 40년 동안 만나를 먹었습니다. 그것에 비하면 당신이 행한 이적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뜻이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만나보다 더 놀라운 생명의 떡을 준다고 하자 그들은 한 목소리로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을 믿고 여러 가지 기적을 체험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기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생명의 주님으로 알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생명의 떡이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밥을 먹어야 살 수 있듯이, 우리의 영적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밥을 먹지 않으면 우리의 육신이 죽을 수밖에 없듯이, 우리의 영적 생명도 양식이 필요한데, 예수님 자신이 곧 우리의 영의 양식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만찬을 나눌 것입니다. 우리가 성만찬에 참예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성찬의 떡과 포도주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십자가 고난을 앞두시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나누시는 자리에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셨습니다.

성찬식을 행하면서 먹는 떡 조각은 주님의 몸을 상징하고, 포도주는 주님의 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성찬식은 곧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을 상징합니다.

사람들이 양식과 물을 마시고 살아가듯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님이 영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영생을 얻을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영생을 누리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이와 같은 진리를 알고 성찬을 대하심으로 대속의 은혜를 더욱 깊이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현대인들은 양식이 없어서 기근이 아니고 마실 물이 없어서 기갈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영양을 섭취해서 성인병을 걱정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의 영적 실상은 어떻습니까? 현대인들은 마치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물질적인 번영을 자랑하지만 영적으로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기독교인들 가운데도 주님 앞에 나와서 떡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현세적인 축복을 받기 위해 주님을 믿는다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오해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님들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하심과, 주님께 우리 자신을 바칠 때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됨과, 주님께서 우리의 생명의 떡이 되심을 깊이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매일의 삶속에서 영육 간에 오병이어의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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