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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이 찾아오시는 마음(2) (사 8: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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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한규 목사

< 노트북과 내 머리 속의 지우개 >

최근에 치매와 관련된 영화 2편이 개봉되었습니다. 하나는 ‘노트북’이라는 영화입니다. 요새 눈물나게 만드는 영화를 최루탄 영화라고 하는데, 바로 그런 최루탄 영화입니다.

한 연인이 17살 때 카니발에서 만나 첫 사랑을 하지만 신분 차이로 헤어집니다. 그러다가 7년 만에 다시 만나 결혼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나이가 들면서 아내가 치매에 걸립니다. 그 아내를 위해 할아버지가 몇 번이나 본인이 노트북에 적은 과거의 사랑 일기를 남이 소설을 읽어주는 것처럼 읽어주며 아내의 기억을 되살리려고 합니다.

그러면 할머니는 가끔 그 소설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임을 느끼고 5분 정도 기억을 되찾고 남편과 함께 춤도 추지만 어느새 다시 기억이 사라져 남편을 물리치고 뒷걸음질칩니다. 그래도 그 5분의 순간을 만들려고 남편은 끊임없이 노트북의 일기를 아내에게 들려주고 또 들려줍니다. 결국 둘은 한날한시에 죽음으로, “사랑은 사랑을 간직하는 자에게 기적을 선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영화가 끝납니다.

이 영화는 사랑은 ‘열정과 낭만’이기도 하지만 ‘인내와 추억’임을 깨닫게 하고, 노년도 청춘만큼 아름다운 사랑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또한 치매가 얼마나 사람을 가슴 아프게 하는 병인지 깨닫게 합니다. 그 영화를 보고 나서 제가 아내를 툭 치며 “제발 매운 것 많이 먹지 말고 건강관리 잘 하라!”고 했습니다.

그 노트북을 본 다음 주에 ‘내 머리 속의 지우개’라는 한국 영화를 봤습니다. 이것도 최루탄 영화라고 해서 제가 사모에게 “영화 보러 가자!”고 졸라댔습니다.

주인공 철수는 사랑을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가 수진을 알면서 사랑을 배우게 되고, 결국 결혼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그 행복은 수진의 알츠하이머병으로 깨지게 됩니다. 그러자 철수는 수진의 기억을 되돌리려고 무진 애를 쓰지만 불치병인 치매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사랑하는 아내를 한 요양원으로 보내는 장면으로 영화가 끝납니다. 그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도 제가 아내를 툭 치며 “당신 머리 속에 지우개 생기지 않게 조심하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에게 사랑의 추억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사랑이 죽는 것보다 더욱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했던 기억이 죽는 것입니다. 가슴 아픈 기억이 죽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사랑했던 기억은 오래 살려야 합니다.

요새는 머리의 기억력이 있어도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가슴의 기억력은 점차 없어지는 때입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무엇보다 사랑과 은혜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지우개가 머리 속에 생기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은혜를 많이 생각하면 은혜가 더 주어지고, 상처를 많이 생각하면 상처가 더 주어질 것입니다.

< 주님의 은혜가 있어야 삽니다 >

그렇게 영화를 잘 보고 난 이틀 후에, 갑자기 지난 토요일 저녁 7시에 전도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아요.” 현기증으로 갑자기 쓰러져 방바닥에 부딪쳐 전도사님 머리 속에 지우개가 생긴 것입니다. 얼마 전에 집 이사한 것도 기억해내지 못했고, 일주일 전에 청년들과 스키 타러 건 것도 기억해내지 못했습니다.

머리의 해마가 다치면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저장시키는 회로가 막혀 단기 기억을 저장하지 못하니까 가장 최근 기억부터 잃는다고 합니다. 1시간 후에 다시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아요.” 바로 한 시간 전에 통화한 것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소름이 오싹 끼칠 정도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간절히 전도사님 머리 속에 지우개 없애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마침 주일 설교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곧 하나님이 “염려하지 말라!”는 위로의 음성을 주셨고, 마음속에 지극한 하나님의 평강이 임했습니다.

밤 10시 30분에 전도사님이 다시 네 번째로 전화했습니다. 옆에 있는 어머님한테 “무슨 요일이냐?”고 묻다가 토요일이라고 하니까 주일 걱정이 되어서 조금 전에 전화한 것도 모르고 또 전화를 한 것입니다. 그때 전도사님이 얼마나 불안해했는지 모릅니다. 기억을 잃어버리고 묻고 또 묻고 하니까 본인은 얼마나 답답하고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그때 무엇보다 마음의 안정이 필요한 것 같아서 하나님이 주신 평강을 전하며 전도사님을 안심시켰습니다.

“전도사님! 사람이 기억을 잃으면 최근의 것부터 잃어버린다고 하니까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머리 부은 것 가라앉으면 서서히 기억이 돌아올 겁니다.”
“목사님! 정말 그럴까요?”
“반드시 그럴 거예요. 하나님이 도와주실 겁니다. 염려하지 마세요. 이게 다 장가를 가지 않아서 생긴 일이니까 빨리 장가부터 가세요.”

전도사님은 장가 얘기만 하면 좋아하잖아요? 제가 장가 얘기를 하니까 전도사님이 또 좋아했습니다. 물론 그 얘기를 한 기억도 또 잃어버릴 수도 있지만 그때만큼은 전화상으로 함께 신나게 웃었습니다.

그날 밤, 하나님께서 전도사님의 머리를 만져주시고 주먹만한 혹을 급속히 가라앉게 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하루 만에 다시 기억을 되찾게 하셨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몇 개월, 몇 년씩 기억을 잃는데 하루 만에 다시 기억을 찾게 되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죽었다 살아난 느낌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한번 쓰러지면 죽을 수도 있고, 기억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도 건강관리를 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셔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열심히 땀을 흘리고 돈도 벌어야 하지만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갑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돈도 얼마나 허무하게 사라지는지 모릅니다. 전도사님이 이번에 4일 동안 입원하고 130만원이 사라졌습니다. 넉넉지 않은 사역자 생활에 얼마나 큰 타격입니까?

만약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없고, 기도가 없으면 힘들고 어려울 때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적당히 어려우면 아직도 우리 혼자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아주 어려우면 주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 분이고, 소중한 분인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가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은 믿을 수 없습니다. 내 젊음도 믿을 수 없고 내 가족도 믿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나쁜 것이 문제라기보다 사람이 약한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순식간에 변하고, 얼마나 순식간에 불행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남들에게 닭살을 돋게 할 정도로 애정을 과시하던 닭살부부가 순식간에 도끼눈을 하고 잡아먹으려는 경우를 얼마나 많이 봅니까? 그처럼 사람은 변해도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과 애정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부족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 주님이 찾아오시는 마음 >

오늘은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대강절 셋째 주일입니다. 오늘도 지난주에 이어 주님이 찾아오시는 마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가 있어도 주님이 우리 삶에 찾아오시면 그때부터 문제는 해결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된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은 지극히 어려웠지만 이사야 8장 8절에 나오는 임마누엘의 예언이 주어지면서 그 임마누엘 예언을 기점으로 9-15절까지의 이사야의 우울한 어조가 승리의 어조로 완전히 변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어떤 마음에 찾아오실까요?

1. 말씀에 열린 마음

본문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나의 제자 중에 봉함하라.”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양피지에 적어 두루마리로 싸서 소수의 제자만이 듣게 하라는 말입니다. 즉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말씀이 막히는 것처럼 큰 불행은 없습니다. 신앙생활에서 말씀이 지겹게 느껴지면 곧 상처와 불행이 임할 것이고, 말씀이 즐겁게 느껴지면 곧 은혜와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말씀을 지겹게 생각하면 무엇보다 본문 19절 말씀대로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를 찾으라는 유혹이 옵니다. 이 구절에서 ‘지절거리면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란 ‘그럴듯한 말로 사람을 유혹하는 영매’를 말합니다. 그리고 마술사는 원어로는 ‘야데오님’이라는 말로 점쟁이를 뜻합니다.

말씀을 지겹게 생각하면 어느새 신비한 모습을 한 무속신앙이 찾아와 유혹합니다. 그때 무속신앙을 좇으면 어떻게 됩니까? 본문 20절 하반부에서 22절까지 말씀을 보면 그런 사람들은 아침빛을 보지 못하고(20절), 헤매며 곤고하며 주릴 것이고, 환난과 흑암과 고통 중에 처할 것이라고 말합니다(21-22절). 무슨 말입니까? 다시 말씀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말씀 중심적인 삶은 신앙생활에서 가장 힘든 삶입니다. 평생 재미있는 소설책 한 권도 읽지 않은 사람에게 성경을 읽으라고 하니 얼마나 고역입니까? 때로는 주일에 예배 중에 가만히 앉아 말씀을 듣는 것이 따분하게 느껴지고, 때로는 그 말씀이 나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긁고 마음을 찌릅니다. 그처럼 말씀이 칼이 되어 나의 영혼과 자존심을 찌르면 다음부터는 그런 말씀을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생각하면 말씀이 나를 찔렀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에 반응했다는 말이고, 그 말씀이 내게 한 말로 들려졌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말씀 앞에 찔림을 받기 위해 성경을 보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무슨 말씀이든 “이것은 나를 두고 한 말씀이구나, 내게 주신 말씀이구나”하고 듣는 마음이 은혜 받는 마음입니다. 가끔 설교가 끝난 후에 “제게 주신 말씀이네요.”라고 하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그 말은 예배를 잘 드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을 통해 마음의 찔림을 받고 그 다음에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당시 지도자들은 이를 갈고 귀까지 막았습니다. 그처럼 귀를 막고, 남의 얘기는 듣지 않고 내 얘기만 하려고 하니까 싸움만 생깁니다. 오늘날 가장 큰 문제는 듣는 귀가 없는 것입니다. 귀를 막으면 주님의 축복도 막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초대 교회 교인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의 회개하라는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려 회개하고, 그날 삼천 명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실 때 마음을 열고 그 말씀을 기쁘게 받고 실천하면 그때부터 말씀은 나의 영혼을 치료하고, 나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과 축복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말씀은 민들레 홀씨와 같습니다. 민들레 홀씨는 아주 척박한 환경에서도 기필코 싹을 틔웁니다. 그처럼 말씀은 어떤 척박한 환경에서도 역사를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붙잡고 사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희망의 싹이 나고 열매가 맺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말씀 중심으로 삶을 재편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예배에 더 참석해서 말씀을 더 듣고, 조금이라도 성경을 더 보려고 해보십시오. 그리고 한번 말씀대로 살려고 해보십시오. 그러면 신기하게 문제가 풀리고, 축복의 문이 열리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 겸손하게 헌신하는 마음

왜 사람들이 무속신앙을 찾습니까? 특별한 존재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영적 교만이 그 내면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제일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신앙심을 자랑하고 과시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믿고 앞세우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신앙을 자랑하는 삶과는 본질적으로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신앙을 과시하는 순간, 그 사람은 가장 신앙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반대로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부족한 신앙을 죄송해하는 사람이 가장 신앙심이 좋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축복은 그런 사람에게 임하게 됩니다.

요새는 개성 시대이기 때문에 잘난 척도 좀 하고 살 필요가 있지만 너무 지나치면 안 되고, 특히 신앙적인 자랑은 지극히 주의해야 합니다. 옛날에 어떤 부흥회에 갔는데 어떤 부흥사는 “옜다! 성령 받아라! 1층! 성령 받아라! 이제 2층! 성령 받아라!”고 하면 성령님을 물건처럼 나눠줬습니다. 그런 모습이 영적으로 권위 있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영적인 깊이가 있고 성령 충만할수록 사람에게 나타나는 모습은 무엇보다 겸손한 모습입니다.

요새 영성훈련을 한다는 곳이 많습니다. 좋은 영성훈련 프로그램도 많지만 가끔 이단들이 하는 영성훈련을 보면 무속적인 신앙을 가지는 것을 영성훈련이라고 미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훈련을 받으면 입신을 잘하고, 성령의 9가지 은사를 다 받을 수 있고, 미래를 보는 예언과 투시의 능력이 생기고, 사람의 마음을 읽는 투심이 생겨 사람을 척 보면 그의 영성을 진단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일급 성도로 여기는데 그런 모습이 영성일까요?

영성이 무엇입니까? 영성(靈性)이란 쉽게 말하면 자기를 ‘영(zero)'으로 만드는 성품입니다. 자기를 영으로 만들수록 영성은 높아지고, 자기가 충만할수록 영적 만성질병에 빠져서 참 고치기 힘듭니다. 그 병은 인간이 죽는 순간에는 다 고쳐집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죽기 전에 자기를 잘 죽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잘 죽이면 고통도 그만큼 죽고 자기가 펄펄 살아 있으면 고통도 그만큼 커집니다. 우리가 인생을 잘 살려면 먼저 잘 죽을 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란 주님께 우리를 바치는 것입니다. 그때 말로만 바치거나 생각으로만 바치면 안 됩니다. 호주머니를 비우는 실제적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는 “호주머니의 회개가 없는 회개는 참 회개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자기 안의 매머니즘(mammonism,배금주의)을 죽이지 못하면 자기를 죽이는 것이 아니고 그런 상황에서는 결코 영성이 깊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보다 깊은 신앙을 위해 선교와 구제에 힘써야 합니다.

제가 요새 아침마다 한 단체에서 운영하는 새벽편지를 이메일로 받고 있습니다. 이틀 전에는 이런 편지가 배달되었습니다. “OOO 새벽편지 가족님! 저희 팀이 가족님의 성탄절 선물을 받고 싶어요! 주일만 빼고 1년 열두 달 한번도 쉼 없이 글, 음악, 삽화, 웹디자인... 저희는 단 하루도 쉬지 못합니다. 이렇게 수고하는 저희! 정말 선물 받고 싶습니다. 선물 주시는 힘으로 내년도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그 편지를 받고 수많은 사람들이 후원에 참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실 저의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팀은 그보다 훨씬 더한 수고를 합니다. 남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좋은 글과 설교, 좋은 음악, 좋은 이미지를 조합해서 홈페이지 사역을 하고 메일 보내는 사역을 하지만 저의 홈페이지 사역은 남의 것을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저희 팀이 몇 배의 수고를 들여야 합니다. 글의 분량도 방대합니다. 심지어는 저의 설교나 글뿐만 아니라 심슨의 성결론이나 라이리 조직신학도 저희가 직접 번역해서 정리하고 발췌하고 교정까지 합니다. 그 일을 위해 밤을 새운 적이 한두 번도 아닙니다.

그 사역을 지난 4년 반 동안 했습니다. 그렇게 사역을 해도 제대로 성탄절 선물 한번 받지 못했습니다. OOO 새벽편지 팀처럼 사역자들에게 월급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도 묵묵히 사역을 감당해준 우리 사역 팀들과 봉사자들에게 정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에 요삼일육선교회 산하 미션퍼블릭 팀과 사랑매거진 팀에서 내년 선교예산을 상당히 많이 세웠습니다. 후원금이 적게 들어와서 그 예산만큼 선교하지 못하면 오히려 우리 사역 팀원들이 호주머니를 털어서 선교하자고 했습니다. 그처럼 자기를 바치고 자기 것을 바치며 선교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보면 항상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하나님께서도 감동하실 줄 믿습니다.

최고의 영성은 자기 및 자기의 소중한 것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기꺼이 바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자기를 바쳤다고 하면서 선교사들을 돕자고 하면 강풍에 문이 “쾅!” 하고 닫히듯이 마음 문을 닫고, 누군가 조금만 ‘자아’를 건드리면 펄펄 뜁니다. 그것은 자기를 바친 것이 아니라 바친 척 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주님 안에서 힘써 ‘제로’로 잘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사는 길, 진짜 축복받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3. 기다리는 마음

본문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제 야곱 집에 대하여 낯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 선지자가 말씀을 적은 두루마리를 싸는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이 착잡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며 하나님을 바라보겠다는 말합니다.

이사야는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내일의 비전을 가졌습니다. 그는 어렵지만 당당하게 살았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당당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수군거립니다. “뭘 믿고 저렇게 큰소리를 쳐!” 우리는 큰소리만 치는 허풍선이가 되서는 안 되지만 힘들 때에는 하나님 믿고 큰소리도 칠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 18절 말씀을 보면 이사야는 비전을 가지면서 특별히 두 자녀를 통한 하나님의 비전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우리 자녀들과 3대, 4대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후대를 통해 하나님의 비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비전을 가지고 넉넉한 마음으로 주님의 은혜를 기다리며 최선을 다할 때 오히려 그 비전의 성취가 더 빨리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조급한 마음으로 점쟁이, 무속인, 사주팔자를 보는 사람을 찾으면 인생의 고통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

1989년 10월 21일, 브란트 서독 수상이 기자회견을 할 때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수상님! 언제 동서독의 장벽이 언제쯤 무너지겠습니까?” 브란트 수상이 대답했습니다. “한 십 년쯤 기다리면 되겠지요.” 그 말이 끝나고 정확히 10일 만에 동서독의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그처럼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며 최선을 다할 때 오히려 문제 해결의 때가 더욱 신속하게 찾아올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대개 씨앗을 뿌리기보다는 열매를 수확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다리는 데 인색합니다. 그래서 많은 것을 성취해도 사람의 질은 더 떨어지고 있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의 삶이 불안해 보입니까? 무엇보다 뜸 들이는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과속으로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진정한 의미는 축복은 주어지기 힘듭니다.

이제 주님을 더욱 사모하고 주님의 은혜를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기다림의 대상이 주님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그렇게 기다리면서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품게 되고 주님처럼 변하게 될 것입니다.

여성들은 임신할 때 그가 생각하는 사람과 닮은 아이를 낳는다고 합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거의 미워하는 사람을 닮은 아이가 태어납니다. 그때 주님을 생각하면 주님 닮은 아이가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날마다 주님을 생각하면 우리 자신이 주님 닮은 사람으로 변하고, 주님이 가지신 모든 축복과 권세도 우리 것이 될 것입니다.

토마스 하디의 소설 중에 '환상의 여인'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한 여인이 시를 읽다가 그 시를 쓴 사람을 사모하게 됩니다. 한번도 만난 적이 없고, 아무 특별한 관계도 없지만 계속 시인을 사모하다 보니까 나중에 그 시인을 빼닮은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의 오해를 받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사모하면 반드시 주님 닮은 모습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 자녀 중에 주님의 뜻을 크게 이룰 자녀들이 생길 것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대상’이 ‘우리의 미래’를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계속 생각하고, 계속 기다리면 우리의 앞날은 주님의 기쁨과 평안과 권세와 축복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이제 주님만 생각하고, 바라보고, 기다림으로 앞날에 주님의 축복이 넘치는 복된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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