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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다림의 신앙 (눅 2: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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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서해원 목사

  지난 11월 29일에 ‘김춘수’라는 시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문학을 하는 사람들에게서는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유명한 사람입니다. 1922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난 그는 경기중학교를 중퇴하고 도쿄로 건너가 일본대학 예술학부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사상문제로 퇴학당한 후 귀국하여 통영중학교와 마산고등학교의 교사를 지냈습니다. ‘김춘수’라는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51년 '꽃'이라는 시를 발표하면 서부터였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구절로 유명한 이 작품은 교과서에 수록되면서 더욱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꽃'은 `시인세계'가 최근 실시한 `시인들이 좋아하는 애송시' 설문조사에서 1위에 오른 바 있습니다. 이것을 시작으로 그는 유달리 꽃을 노래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꽃의 시인’이라 불렀고, 이처럼 꽃을 노래하다가 갔기에 언론도 ‘꽃의 시인 하늘 꽃밭으로 떠나다’라고 말했습니다. 남달리 꽃을 사랑하며 노래했던 그가 마지막으로 심혈을 기울였던 작품이 바로 ‘달맞이꽃’이었습니다. 그래서 투병 중에도 만든 그의 마지막 작품이 이제 곧 달맞이꽃이란 이름으로 출판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달맞이꽃’은 밤에 피었다가 아침이 되면 시드는 꽃입니다. 그래서 영어로 ‘Evening primrose’라고 부르고, 한자어로 ‘월견초(月見草)’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꽃은 '달을 맞이하는 꽃'이라는 이름에서 보는 것처럼, 밤에 노란색 꽃망울을 터뜨렸다가 해가 뜨면 붉은 색으로 변하면서 시듭니다. 이 달맞이꽃에 담긴 사연과 이야기가 세계적으로 많이 전해집니다. 그 모든 것을 종합하여 이 꽃의 꽃말을 ‘기다림’으로 정했습니다. 김춘수 시인도 달맞이꽃을 기다림이란 주제로 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노래 가사에도 달맞이꽃을 ‘얼마나 기다리다 꽃이 됐나’로 시작합니다. 꽃에 있어서, ‘기다림’하면 달맞이꽃을 연상합니다. 그래서 이 꽃을 보며 기다림을 생각합니다.

  인생을 가리켜 ‘기다림’이라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얼마나 많은 기다림이 필요한지 모릅니다. 신앙도 기다림입니다.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고, 성령의 열매도 인내가 있습니다. 모두 기다림을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본문은 예수님 시대에 기다림의 신앙을 대표하는 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시므온’이란 사람입니다. 25절에 보면, 성경은 그를 가리켜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그는 오래 동안 기다리며 살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통해 기다림의 신앙을 배웁니다. 그렇다면 그가 평생 기다렸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우선, 메시야입니다. 곧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탄생하신 뒤 8일째 되던 날이 있었던 사건입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은 할례를 받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거기에서 시므온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감격하며 고백하는 것이 본문의 주요내용입니다. 그는 평생 기다렸던 메시야를 만난 것입니다. 그 감격의 기쁨에 눈물을 흘렸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고,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의 이런 고백 속에서 우리는 그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평생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사실 시므온 만이 아닙니다. 36절에 언급된 ‘안나’라는 선지자도 기다렸고, 당시 많은 사람들이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림의 신앙가운데 무엇보다도 우리 마음에 자리잡아야 할 대상이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분을 생각하고, 기다리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예수님을 기다려야 할까요?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바로 2004년도 성탄절을 기다리며 사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2000년 전에 이미 탄생하셨지만, 그 주님이 다시 우리 마음에 오시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천 번, 만 번 베들레헴에 나셔도 우리 마음에 한번 오시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이번 성탄도 그런 면에서 의미가 있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력에 의하면 지금을 ‘대강절’이라고 부릅니다. 출현, 도래의 뜻을 가진 대강절은 예수님이 탄생하기 전 4주간부터 시작되는 절기입니다. 이미 대강절이 시작되었고, 지금 절정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대강절을 보내고 탄생을 기다리면서 여기에 담긴 깊은 의미를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대강절은 시작을 의미합니다. 일반달력은 1월부터 시작되지만, 교회력은 대강절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대강절을 보내고, 탄생을 기다리며 보낸다는 것은 주님을 탄생을 기점으로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다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주님의 탄생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제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각오를 갖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면에서 우리가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이제 그 모든 것을 다 접고 새롭게 출발해야 합니다.

  또 우리가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은 ‘탄생’만이 아니라 ‘재림’입니다. 이것은 아직까지 실현되지 않는 일입니다. 오늘까지 우리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기다림의 신앙은 바로 재림신앙입니다. 초대교회를 살던 사람들의 믿음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렸습니다. 고통가운데서 기다렸습니다. 그것이 그들 시대에 이루어지지 않았고, 오늘도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을 그저 하늘만 바라보고 지내는 것이 아닙니다. 기다리면서 할 일이 있다고 주님은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25장에 나옵니다. 주님은 24장에서 재림을 언급하시면서 25장으로 넘어와 3가지의 비유를 통해 할 일을 알려주셨습니다. 첫 번째 비유가 열 처녀의 비유, 두 번째가 달란트의 비유, 그리고 세 번째가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열처녀의 비유를 통해 주님은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 맡은 일에 ‘충성하라’고 하셨습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 ‘섬기고 봉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사는 자의 삶입니다. 깨어 있어야 하고, 충성하고, 섬기고 봉사해야 합니다. 이렇게 살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주님이 오실 때 맞이하고, 혹 우리 시대에 오지 않더라도 이렇게 살다가 우리가 천국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다림의 신앙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며 삽니다. 탄생을 기다리며 이제 새롭게 시작하기를 다짐해야 합니다. 재림을 기다리며 깨어 있고, 충실해야 합니다. 이런 기다림의 신앙을 이루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위로입니다. 본문 25절에 시므온을 소개할 때, 그를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말합니다. 여기 ‘위로’라고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는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개인의 삶은 물론이고, 이스라엘 공동체에 임하는 위로를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큰 위로를 받은 것입니다. 위로가 임하자 한순간에 그 동안 힘들고 어려웠던 삶이 눈 녹듯 녹아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 주체할 수 없는 감격의 눈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마음껏 감사하며 기도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나님은 특히 환란과 어려움의 때에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우리가 사는 시대 더욱 위로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우리 가운데 위로가 넘쳐야 합니다. 믿는 자로서 부름 받은 사람이라면 더욱 위로가 있어야 합니다. 남편을 위로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내를 위로해 주십시오. 자녀를 위로하고 격려해 주시고, 사랑하는 부모에게 힘을 주십시오. 참 살기가 힘든 세상입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리운 때입니다. 용기와 힘을 주십시오.

  사람만큼 민감한 존재가 없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 어떤 생물체보다 사람이 가장 예민합니다. 그래서 상처도 잘 받고, 잘 깨지기가 쉽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우리는 말 한마디에도 온 세상을 다 얻고, 말 한마디에 큰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인간이 너무도 민감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갖는 나쁜 습성 중에 하나가 좋은 것은 말하지 않고 나쁜 것만 지적하는 습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혹 아이들에게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런 모습이 없습니까? 아무리 아홉 가지를 잘해도 칭찬을 듣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한 가지 잘못하면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혹 이것이 나의 모습은 아닙니까? 사실 잘못한 것은 자신이 가장 잘 압니다. 인간이 예민하기 때문입니다. 지적하지 않아도 깨닫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위로입니다. 위로가 있는 가정, 격려가 있는 사회, 위로가 풍성한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이것을 사명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려움의 때에 더욱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큰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가는 우리들도 서로를 향하여 위로가 있어야 합니다. 많이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 가시를 바랍니다.

  셋째는 회복입니다. 시므온의 신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회복이었습니다. 본문은 그런 관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이 탄생하신 이후 사람들의 감사와 고백들을 자세히 보십시오. 모두 주제가 회복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기다리면서 가장 크게 생각했던 것이 바로 회복이었습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회복될 나라를 꿈꾸었고, 회복될 자신의 장래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모든 회복이 이루어진 것을 감사하며 29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그는 회복을 믿었고, 보았습니다. 주님이 오심으로 임할 모든 회복을 알았습니다. 그의 고백처럼 예수님의 오심으로 모든 것이 회복되었습니다. 죄에서 회복되었고, 죽음에서 회복되었습니다. 어려움에서 회복되었고, 고통에서, 두려움과 염려에서 회복이 되었습니다. 시므온은 자신과 공동체에 임하는 회복을 보며 감사했습니다. 그토록 기다렸던 회복이 주님을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기다림의 신앙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은혜로 보여지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다면 바로 회복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의 원인도 중요하고, 근거도 밝히지만, 성경은 거기서 머물지 않습니다. 회복을 보여주려고 기록된 것입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경은 회복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계시록은 완전한 회복으로 끝을 맺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이 큰 줄기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회복’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인물이 ‘욥’입니다. 욥의 이야기를 자세히 보면, 처음에 그가 당한 시련으로 시작합니다. 고통과 아픔이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주려는 듯한 느낌을 받지만 사실 성경의 중요한 의도는 시련이 아니라 회복에 있다는 것입니다. 욥기의 결론은 모든 것의 완벽한 회복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것이 욥기를 기록한 성경의 의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날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회복입니다. 하나님은 회복시키는 분이시기에 우리는 회복을 생각해야 하고, 회복을 소망해야 하고, 회복을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부터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말 중에 ‘최악의 시나리오’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말이 모든 분야에서 사용됩니다. 전쟁에서, 경제상황에서, 운동에서, 정치세계에서, 그리고 인간관계에서, 사람들은 최악의 시나리오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리고 이 주제로 책도 만들어졌고 이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살면서 종종 자신의 삶에 대한 최악의 시나리오를 자주 쓰는 것을 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상해 놓으면, 더 이상 내려 갈 것이 없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위안이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 최악은 아니다,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다는 괜찮네’ 하면서 스스로를 위안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어쩌면 ‘최악의 시나리오’가 아니라 ‘최악의 현실’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치가 그렇고, 사회도 그렇습니다. 경제는 물론이고, 세계가 그렇습니다. 이젠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밑바닥을 친 것입니다. 모두들 힘들다고 합니다. 죽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회복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회복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께 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밑바닥을 치면 이제 올라갈 일만 남은 것입니다. 영광의 회복을 바라보며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이 기다림의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회복을 기다리시기를 바랍니다. 건강의 회복이 임할 줄로 바랍니다. 사업과 직장의 회복이 임할 것을 확신합니다. 인간관계의 회복이 임할 것을 믿습니다. 모든 것의 회복이 임할 것을 믿고,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시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이 시는 다윗이 고통 중에서 불렀던 노래입니다. 다윗의 신앙은 기다림입니다. 그는 참고 기다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기다림이 신앙입니다. 탄생과 재림을 기다리고, 위로를 기다리고, 회복을 기다리면서 힘있게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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