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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악한 곳에서 선하게 산 사람 오바댜 (왕상 18: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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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유상현 목사

현대는 절대적인 진리와 가치와 선을 부정하고 모두 상대적이라고 믿고 주장합니다. 때문에 진리와 비진리, 선과 악의 구분이 희미해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상대적인 도덕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대적 도덕주의는 진리와 비진리, 선과 악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언을 거부하려는 도전의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깜짝 놀라면서“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느냐?”고 하던 일들이 요즈음에는“그럴 수 있지 않느냐?”는 식으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예전에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던 일들이 요즈음에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매우 관용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진리요, 선이며, 열린 생각이라고 추앙을 받습니다. 이런 일들은 모두 절대 진리에 대한 수용을 거부하는 상대주의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에 좋으면 선일 수도 있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독할 정도로 간교하고, 악한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선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질흙같이 어두운 이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이겠습니까? 어떻게 악하고 어두운 곳에서 믿음의 사람으로서 제 역할을 감당하며 밝게 살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기 전에 먼저“어두운 곳에서 밝게, 악한 곳에서 선하게 산 사람 오바댜”를 만나보기를 원합니다. 

1. 오바댜 그는 누구입니까?

본문에 등장하는 오바댜는 구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한 장밖에 없는 성경의 저자인 오바댜와 동명이인(同名異人)입니다. 오바댜는 성경에서 딱 한번 밖에 소개되지 않음으로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또한 그가 이룬 업적으로도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사람, 아무에게도 감동을 주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람이었기에 성경은 지면을 할애하여 오바댜를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바댜는 그는 누구입니까? 

첫째, 어두운 시대에 살던 사람입니다.

오바댜는 매우 작지만 강렬한 진리의 빛을 발하며 살던 사람입니다. 때문에 그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살았던 당시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택한 선민의 나라입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 수백 여 나라와 민족가운데 선택하시고 부르셔서 언약을 맺으시고,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는 신정국가로 통치하셨습니다.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계 어느 민족보다 뛰어난 민족이 되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두뇌가 발달한 민족이요, 정치, 경제, 문화를 비롯한 모든 영역에서 최고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했다는 사실이 이렇게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단된 이후, 북쪽 이스라엘의 일곱 번째 왕으로 아합이 등장합니다. 아합은 세습에 의해 왕이 되었지만 왕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줏대가 없고, 가볍고 경솔했으며, 리더쉽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내 이세벨은 악녀(惡女) 중에 악녀였습니다. 이세벨은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바알 우상을 섬기는 가정에서 자라 성격이 매우 잔인하고 간사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남자를 어떻게든 꾀어 제 손아귀에 쥐고 흔들려고 하는 아주 못된 근성을 가진 여자였습니다. 때문에 아합 왕은 이세벨의 치마폭에 휘감겨 이스라엘 땅을 온통 바알과 아세라 우상천지로 만들었습니다. 왕의 강압적인 우상숭배 정책에 소수를 제외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우상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하는 국가가 된 것입니다.

성경은 아합 왕이 얼마나 악한 자였는지에 대하여 침묵하지 않고 밝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16장 25절에“오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16장 30절에 보면“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33절에 보면“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으니 저는 그 전의 모든 이스라엘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 앞에 악한 짓을 많이 했는지 하나님께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심판을 하신 것입니다. 3년 반 동안 가뭄으로 온 이스라엘 땅이 초토화되어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합 왕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악한 왕과 악한 왕비가 통치하는 어두운 시대에 살던 사람이 오바댜입니다.

둘째, 악한 곳에서 악한 자의 함께 살던 사람입니다.

본문 3절에“아합이 궁내대신 오바댜를 불렀으니”라고 했습니다.

오바댜의 신분이 무엇입니까? 아합 왕의 궁내 대신입니다. 궁내대신이란 쉽게 말해서 비서실장입니다. 아합 왕의 궁전을 담당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청와대 비서실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바댜는 아합 왕의 궁내 대신으로서 아합 왕의 충성스런 신하였습니다. 우상숭배에 찌들어 있는 사악한 왕 밑에서 궁내 대신으로서 신임을 받고 있었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이 바알 신전에서 무릎을 꿇고 절하는 현장에서 우상숭배에 몸을 더럽히지 않고 자신을 지킬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성경은 명확하게 대답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오바댜를 비난하기를 극악무도한 아합 왕과 이세벨이 사는 왕궁에서 어떻게 함께 살 수 있느냐고 합니다. 악의 소굴에서 나오지 않고 타협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세벨의 간악한 영향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순수한 신앙을 지킬 수 없었을 것이라고 전제하고 오바댜의 신앙을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환경이든 하나님의 인도로 주어진 곳이라면 그곳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바로의 궁에서 총리대신을 했고(창41:41), 다니엘은 느부갓네살과 벨사살 왕의 자문역과 다리오 왕 밑에서 총리를 했으며(단2:48, 6:3),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왕이 거하는 수산궁에서 술관원을 했으며(느1:11), 모르드개는 아하수에로 왕궁의 최고 실권자였으며(에2:19,10:3), 에스더는 아하수에로왕의 왕후(에2:17)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이방신을 섬기는 왕을 모시고 있었지만 악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했습니다. 오바댜 역시 바알의 오염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며 아합 궁에 유일한 방부제로서 엉겅퀴 속에서 피어나는 한 그루의 청순한 백합화처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셋째,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크게 경외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3절에“이 오바댜는 크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2절에 보면 오바댜 자신을 일컬어“종은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바댜는 하나님을 섬기되 적당히 섬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크게 섬기고 경외하며 사랑했던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바댜”란 이름의 뜻이‘여호와의 종’,‘여호와를 경배하는 자’입니다. 오바댜는 이름의 뜻대로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여호와의 종으로써 크게 여호와를 경배하며, 경외하며 살았습니다.

여기서“크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란 말은 ① 하나님을 크게 기쁘시게 하는 자, ② 하나님께 크게 순종하는 자, ③ 하나님만 크게 두려워하는 자,  ④ 하나님께 크게 소망을 갖는 자라는 뜻입니다.

옳습니다. 오바댜는 어두운 시대에 악한 곳에서 악한 자와 함께 살면서도 ① 큰 믿음, ② 큰 순종, ③ 큰 회개, ④ 큰 소망으로 살던 사람입니다.   

넷째, 자신의 특권을 하나님을 위해 선용한 사람입니다.

본문 4절에“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일백 인을 가져 오십 인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었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 13절에 보면 오바댜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하여 엘리야 선지자에게 밝히기를“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에 내가 여호와의 선지자 중에 일백 인을 오십 인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로 먹인 일이 내 주께 들리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오바댜는 궁내 대신이었으므로 상당한 재력과 세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높은 지위와 재력을 선용하여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이세벨의 박해를 받을 때에 100명을 굴에 숨겨두고 보살폈습니다. 만약 이 일이 아합 왕과 이세벨에게 발각되면 신분은 물론 이거니와 생명까지도 보장 받을 수 없는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더와 같이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행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은 하나님 앞에 기억 될 선한 행위입니다.

오바댜는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선용해야 할 하나님의 것임을 분명히 안 것입니다. 때문에 오바댜는 악한 곳에서 선한 일을 하며 산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바댜는 유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바댜는 3년 만에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엘리야 선지자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엘리야 선지자가“가서 네 주에게 고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는 부탁을 하자 무서워 벌벌 떨면서 말합니다. “하지만 내가 당신을 떠난 즉시 여호와의 성령께서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을 이끌어 가신다면 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가 왕에게 당신이 여기에 있다고 말한 후에 그가 와서 보고 당신을 찾지 못하면 그는 분명히 나를 죽일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오바댜의 연약입니다.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믿었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믿지 못하고 하나님보다 아합 왕의 칼날을 더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오바댜는 분명 유약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둡고 악한 시대에 악한 곳에서 악한 자와 함께 살면서도 빛을 발하며 선한 일을 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바댜처럼 악한 세상에 살고 있는 이 시대에 하나님을 크게 경외하는 경건한 사람들이 배워야 할 삶의 교훈이 무엇일까요?

2. 오바댜의 삶을 통하여 배워야 할 삶의 교훈입니다.

첫째, 구조적인 악에서 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바댜가 살던 시대의 아합 궁전에는 구조적으로 선한 것이 하나도 없는 악한 세상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는 사람은 도망가야 합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등을 돌린 채 멀리 떠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경건을 지키기 위한 우리들의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예수를 바로 믿는 사람, 또 신앙생활을 잘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권면합니다.

악한 곳에 몸을 담고 있으면 피하든지, 아니면 그 악과 싸워서 순교를 하든지 둘 중의 하나여야 한다고 흔히 말합니다. 그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바댜는 어떻게 했습니까? 피하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확고한 믿음과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과 열정이 궁정에서의 그의 지위와 명예를 포기하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 자리에 있어야 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사명이요, 소명이라고 확신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바댜에게 그런 내면의 음성을 주시고, 명령을 주신 것입니다.

요셉도, 다니엘도 자신들이 처한 환경이 구조적으로 악한 환경인데도 불구하고 도망가지 않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사람으로서 자기 위치를 고수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몸담고 있는 주변 환경을 봅시다. 얼마나 구조적으로 악합니까? 도덕적인 악이 온갖 형태로 온상을 이루고 있는 곳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선한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세상에 살면서 악한 세상을 향해 책망하시다가 결국 미움을 받고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처럼 그런 식으로 살 수 없습니다. 대신 오바댜를 통해 배워야 합니다. 구조적인 악은 피하거나 도망가지 말고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을 지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 할 것 없이 부정과 부패에 정복당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에 비전과 뜻이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안에서 우리의 존재 책임을 다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바댜가 주는 교훈인 것입니다.

20세기 위대한 신학자인 존 스토트(John R. W. Stott)가 우리에게 유익한 한 마디 말을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 그리스도인은 불신자와 근본적으로 달라야 하지만, 그렇다고 세상 밖에 있으면 안 됩니다. 반드시 불신 사회 속으로 우리는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불신 사회에 영향력을 미쳐야 합니다. 그렇다고 불신 사회에 들어가서 그들과 똑같이 동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해야 됩니다.”

우리는 구조적으로 악한 세상을 등지면 안 됩니다.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또한 그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기 위한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오바댜처럼, 요셉처럼, 다니엘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둘째, 도전적인 악에는 대범하고 단호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여기서 도전적인 악이란 신앙을 뿌리 채 흔들어 놓는 악입니다. 신앙 양심을 더럽히려고 공공연히 도전하는 악입니다.

오바댜도 그와 같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왕후 이세벨이 모든 백성들로 바알 우상에게 절하라고 할 때 이에 반항하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바로 선지자들이었습니다. 대략 수천 명에 이르는 선지자들이 결집해서 왕과 왕후의 정책에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그러자 피에 목말라 하던 이세벨이 군대를 동원해서 선지자들을 몰살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끔찍한 상황을 오바댜가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은 궁내 대신으로 있기에 하나님을 섬긴다 해도 칼을 피할 순 있었지만, 선지자의 신분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같이 다 끌려가서 순교할 수 밖에 없는 아주 위급한 상황을 그가 지켜보게 된 것입니다. 이럴 때 오바댜의 양심은 틀림없이 갈등했을 것입니다.‘내가 안전하다고 해서 뒷짐 지고 구경만 하고 있어야 되겠는가? 나 혼자 경건하면 되겠는가? 이럴 때 나는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이런 갈등 끝에 그는‘가만히 있어선 안되겠다. 행동을 해야 되겠다.’고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는 혼자 경건해야 될 때와 행동해야 될 때가 언제인지를 가릴 줄 아는 영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있어야 될 때와 분명히“아니요”라고 말해야 될 때가 언제인지를 알았습니다. 의의 편에 서야 될 때가 언제인지를 분명히 분별했습니다.

오바댜는 이세벨의 눈을 피해 100명의 선지자를 50명씩 두 군데에 숨겼습니다. 그리고 매일 먹을 것을 공급했습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생명 걸고 하는 일입니다. 모든 것을 잃을 각오로 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오바댜는 그렇게 해서 그 선지자들을 살렸습니다.

우리도 악한 세상에 살다 보면 우리의 신앙 양심을 건드리는 악의 도전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 도전 앞에 우리가 잘못 행동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 자체를 포기해 버릴 위험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거짓말이나 폭음을 강요당할 때, 뇌물로 회유를 당할 때, 탈법을 획책하도록 유인 당할 때, 비양심적으로 거래하도록 유혹할 때, 더러운 장사를 해서 떼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바댜처럼 처신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용기를 가지고 담대하게 맞서야 합니다. 오바댜가 선지자들을 숨겨둔 것처럼,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고 감옥에 들어갔던 것처럼, 다니엘이 사자 굴로 들어가는 위험을 감수하고 마지막까지 담대하게 대응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도전적인 악 앞에서 도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미지근한 태도로 반응하면 우리의 양심은 더러워지고, 신앙은 뿌리째 뽑힐 것입니다.

우리 주님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예수님이 이긴 이김으로 우리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오바댜가 자기를 지킬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지킬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강 밑에 흐르는 맑은 물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오바댜입니다. 그는 평신도입니다. 그는 평신도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비상한 환난의 때를 깨어 주시할 줄 알았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은총의 분량을 체험했습니다. 크게 여호와를 믿음으로 살아야 될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사명의식이 철두철미한 자입니다. 직무한계를 바로 깨달은 자입니다. 자신의 신분과 위치와 존재가치를 바로 알고 악한 곳에서 선하게 산 사람입니다.

종말의 때, 환란의 때, 마귀가 활동하는 때는 성도가 성도 되는 시대요,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종이 되는 시대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되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는 악한 곳에서 선을 행하며 사는 오바댜 같은 성도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오늘의 오바댜가 되시기를 주님의 축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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