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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처럼! (삿 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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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유상현 목사

창세기25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두라를 후처(後妻)로 취하여 낳은 자녀가 시므란, 욕산, 므단, 미디안, 이스박, 수아 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후처의 소생 미디안의 후손들이 훗날 이스라엘의 괴롭히는 미디안 족속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16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갈을 취하여 낳은 아들이 이스마엘인데 그 후손이 오늘날의 아랍인들입니다.

그 당시 중동지방의 관행은 일부다처가 허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후처로 취한 여자들에게서 낳은 미디안이나 이스마엘은 훗날 이스라엘의 원수가 되어 그들을 괴롭히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모두 아브라함의 잘못된 선택이 가져온 결과인 것입니다.

미디안은 싸움에 능한 자들로 광야를 주름잡던 부족이었습니다.

본문은 기드온이 300명 용사로 미디안과 싸워 승리했다는 승전기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기드온의 활동에 관한 기사는 사사기 6장부터 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사사기 6장에서 8장까지의 내용을 중심으로 하여“기드온과 300명의 용사처럼”이란 제목으로 설교하기 원합니다.

1. 기드온이 누구입니까?

1) 기드온은 민족을 위기에서 구원하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사사기 6장 3-4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땅에 씨를 뿌리고 난 뒤 미디안과 아말렉, 그리고 동방사람들이 쳐들어와 진을 치고 소산을 짓밟고 식물을 약탈하는가 하면 양와 소와 나귀등 가축도 모조리 약탈해 갔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을 막지 못하는 이유는 5절에 보면 그들의 수가 메뚜기 떼와 같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메뚜기는 황충이를 의미합니다. 수천만 마리가 떼를 지어 날아옵니다. 크기는 우리나라 메뚜기의 1.5배 내지 2배가량이 됩니다. 황충이 떼는 푸른 빛 나는 모든 식물을 모조리 갉아 먹고 지나가기 때문에 한번만 지나가면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립니다.

그들을 메뚜기 떼로 비유한 것은 그들의 숫자와 잔혹성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6절에 보면“이스라엘은 미디안을 인하여 미약함이 심한지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위기는 적군은 숫자적으로 많고, 신체적으로도 크고, 강하며 잔인하여 그들로서는 싸워 이길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정치는 표류하고, 정치 지도자들은 당리당략과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져 있고, 경제는 끝없이 추락하고, 사회는 진보와 보수로 갈리어 지고, 도덕은 땅에 떨어지고, 민심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드온 시대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민족을 위기에서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기드온입니다.

2) 기드온은 농부였습니다.

사사기 6장 11절에 보면 기드온이“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이 닥치는 대로 착취해 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눈을 피해 포도밭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직업정치인도 아니었고 정규군인도 아니었습니다. 땅에 씨뿌리고 거두어 타작하는 단순한 농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갑자기 민족을 구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지도자는 하나님의 소명이 있어야 합니다.

사울왕은 사람들이 세워 왕이 되었고, 다윗은 하나님이 세워 왕이 됐습니다. 사울은 사람이 뽑았고, 다윗은 하나님이 뽑았습니다. 사울은 인기가 있었고,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습니다. 통치기간은 똑같이 40년이었지만 사울은 당대로 끝났고 다윗은 대를 이어 그 후손이 왕통을 이어 받았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부름받은 사람이었습니다.

3) 기드온은 큰 용사였습니다.

사사기 6장 12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했습니다.

기드온은 전쟁을 경험한 일도 없었고, 군사 훈련을 받아 본 일도 없는 농부였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을 찾아온 하나님의 사자가 그를“큰 용사”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기드온이 가지고 있는 큰 용사, 큰 지도자, 큰 인물로서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그를 인정하시고 큰 용사, 큰 지도자, 큰 인물이 되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큰 용사가 된다는 것입니다.

4) 기드온은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사기 6장 34절에“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여호와의 신”이란‘성령’을 말합니다. 성령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심은 성령 충만을 의미합니다. 기드온은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모여있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지만 그들은 밖으로 나가 예수부활의 복음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순절에 성령 충만 받고 담대히 나가 예수부활의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부활의 증인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기드온도 성령 충만 했습니다.

2. 300명의 용사들이 누구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피타고라스는“앞으로 다가올 시대의 가장 강력한 신은 숫자의 신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인간 사회에서는 군사력이든 경제력이든 많은 숫자를 가진 자가 승자가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더 많은 숫자의 군대, 더 많은 숫자의 무기, 또 더 많은 숫자의 황금을 준비한 나라만이 세계의 패권국가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피타고라스의 예언은 오늘날의 사회에 꼭 맞는 말인 듯싶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많이 소유한 자가 강한 자이고 승자입니다. 적게 가진 자는 패배자가 되는 경쟁 사회에서의 철칙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날마다 숫자를 셉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속한 숫자를 다른 사람과 비교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세상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세속화된 현대 교회도 그런 것 같습니다. 교인 수가 많고 교회당이 거대하면 그 교회는 훌륭한 교회이고, 좋은 교회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처럼 숫자가 많은 교회가 무언가 큰일을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숫자에 대해서 예민해집니다. 숫자를 성공의 기준으로 삼고 더 많은 숫자를 추구합니다. 한마디로 숫자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식은 숫자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것은 교인들의 숫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거룩한 일에 자기 자신을 헌신하는 일에 두려워서 적당히 눈치나 보면서 세상과 타협하는 사람들의 그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은 역사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진정으로 자신을 헌신코자 하며, 그 일을 위해서 자기 신상에 어떠한 손해가 있고 희생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이름과 그 나라를 위해서 싸우려고 결단하는 용사들을 하나님은 오늘도 찾고 계신 것입니다.

사사기 7장에 살펴보면 미디안과 싸우기 위해서 군사를 모집했는데 지원자가 3만 2천명이었습니다. 미디안 군사에 비하면 극히 작은 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너무 많다고 돌려보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정말 준비 안된 사람 그리고 마음속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 2만 2천명을 돌려보냈습니다. 만 명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아직도 많다.”고 하셨습니다(7:4). 그래서 또 돌려보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남은 사람이 300명입니다.

도대체 이 300명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1) 자긍하지 않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사사기 7장 2절에“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있다면“자긍”이라는 말입니다. 자긍이라는 말은 자랑이라는 말로 번역해도 그렇게 틀린 말을 아닙니다. 그러나 조금 더 의미상으로 더 정확한 표현을 한다면 교만에 합당한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수다한 이스라엘의 지원병들을 그대로 돌려보내시기를 원하셨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거스려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그리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반대로 교만한 자에게는 대적하신다고 했습니다.

2) 주를 신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겸손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쓰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부족함을 알기에 하나님을 의뢰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연약을 아는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연약을 알기에, 자기의 부족을 알기에 강하신 주님 앞에 와서 무릎 꿇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무지를 알기에 전지하신 하나님을 의뢰하며, 내 연약함을 알기에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연약을 깨닫고 엎드려서 하나님을 의뢰하는 그 순간이 우리가 가장 강해지는 순간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역설(Paradox)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연약함 때문에 연약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연약함을 모르기 때문에 연약해 지는 것입니다. 도대체 연약함을 어찌할 줄 모르기 때문에 연약해지는 것입니다. 자기의 연약을 알고 인정하는 자, 그리고 자기의 연약을 사용할 수 있는 강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더 이상 약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 놀라운 역설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육체의 가시의 고통스러움을 고백하다가 갑자기“내가 약할 때 나는 강하다!”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내가 약할 때 나는 참으로 강한 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300명은 강한 집단이 되었습니다. 강력한 사람들, 바로 여호와를 신뢰하는 믿음을 통해서 그들은 강한 자가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3) 준비에 힘쓰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본문 5-6절에 보면 그들은 철저히 준비에 힘쓰는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믿기 때문에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믿음은 믿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뢰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믿고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1만 명 가운데 300명을 선발할 때의 기준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물가로 데려가서 물을 먹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을 먹고 있을 때 이들의 물먹는 자세를 보고 그들 중에서 선발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물가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개 같이 물을 핥는 자들은 다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물을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아 마시는 자 300명만을 선발하도록 기드온에게 명하셨습니다. 여기서 무릎을 꿇고 개처럼 핥아서 물을 마신 사람들은 언제 공격이 있을지 모르는 적진 앞에서 경계 태세를 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손으로 물을 움켜 입에 대고 핥은 자들은 언제 어떤 위험이 닥쳐오더라도 즉시 대처할 수 있는 준비를 철저히 한 사람들입니다.

3.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는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어떻게 이겼습니까?

1) 부르짖었습니다.

사사기 6장 6절에“미약함이 심한지라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고 했고, 7절에 역시“미디안을 인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고 했습니다.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약할 때 어려울 때 위기에서 기도하면 하나님은 들어주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미디안이 쳐들어 왔을 때, 모압이 쳐들어 왔을 때, 블레셋이 쳐들어 왔을 때, 아람이 쳐들어 왔을 때, 그 때마다 그 위기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셨고 싸움에 이기게 해 주셨습니다.

히스기야왕은 앗수르 대군이 쳐들어 왔을 때 회개하며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 응답으로 앗수르 산헤립의 18만 5천 대군을 물리치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또한 히스기야 왕은 불치병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에도 금식하며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히스기야 왕을 살려 주셨습니다.

기도의 세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 기도는 성도의 특권이라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는 예수를 구주로 믿는 성도만이 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기도 할 수 있습니다. 왕도, 대신도, 농부도, 선지자도, 과부도, 여자도, 남자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차별이 없습니다.

둘째, 누구에게나 기도 제목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할 이유가 있고 기도할 내용이 있습니다.

셋째,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왕의 기도, 신하의 기도, 부자의 기도, 가난한 사람의 기도, 남자의 기도, 여자의 기도를 불문하고 기도하면 응답하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힘써 부르짖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편을 자세히 보면 부르짖는다는 구절이 42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시편 77편 1절에 보면“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라고 했고, 시편 81편 7절에 보면“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다.”고 했습니다. 이사야 58장 9절에 보면“네가 부르짖을 때에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부르짖어 기도하면 위기가 변하여 위대한 기회가 됩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민족적 위기를 당하였을 때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금식하며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응답하사 그 위기는 위대한 기회 변했습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습니다.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습니다.

찬송가 455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 2절 가사에 보면“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기도 되었고 전날에 한숨 변하여 내 노래되었네.”라고 했습니다.

2) 순종했습니다.

300명의 용사는 최신 핵무기나 첨단 과학 무기로 무장한 것이 아닙니다. 유격 훈련이나 게릴라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007영화의 제임스 본드처럼 기발한 신무기로 무장한 것도 아닙니다. 사사기 7장 19-20절 이하에 보면“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깨트리고 횃불을 흔들며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라고 외친 것 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전쟁에 이기겠다는 건지 목숨을 내놓겠다는 건지 이해가 어려운 일을 그들이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겼습니다.

나팔을 분 것은 선포입니다. 그리고 승리의 개선가입니다. 싸움에 진 군사는 나팔을 불지 않습니다. 이긴 쪽만 나팔을 붑니다. 싸우기도 전에 미리 나팔을 분 것은 미리 승리를 선포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겼다. 승리는 우리 것이다.”라고 믿고 선포한 것입니다.

항아리를 깨트린 것은 두 가지를 상징합니다. ‘나를 깨트려 승리의 제물 삼겠다. 우리가 너희를 항아리 깨트리듯 깨버리겠다.’는 것입니다.

횃불을 들고 흔든 것은 어둠의 세력을 내쫓고 광명천지를 만드는 하나님의 역사를 선포한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한 것은 그들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이요, 지도자 기드온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기드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백성들에게 그렇게 명령했고, 백성들은 기드온의 말대로, 기드온의 지시에 따라 그렇게 순종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7장 2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적군으로 동무끼리 칼날로 치게 하심으로 자중지란이 일어나 죽고 도망치고 하여 이길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300명이 잘 싸워서 이긴 것이 아닙니다. 믿고 순종한 그들을 하나님이 이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300명 용사들을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구의 도구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누구를 위해 일하기를 원하십니까? 각각 집으로 돌아간 31,700명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승리를 이끌어 낸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 날의 싸움은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들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오늘도 믿음과 지혜로 뭉친 기도의 사람, 순종의 사람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만 있으면 이길 수 있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지만 성도는 죽어서 이름이 아닌 기도의 흔적을 남겨야 합니다. 이름을 남기서 무엇 하겠습니까? 기도는 죽어서도 역사하고, 응답됩니다.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처럼 부르짖어 기도하며, 순종하여 나팔을 붑시다. 항아리를 깨뜨립시다. 횃불을 높이 들고 흔듭시다. 그리고 여호와의 승리를 외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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