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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께서 오신 때 (막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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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익로 목사

스위스의 한 노인이 자기가 살아온 삶을 시간별로 통계를 내 것이 있습니다. 잠자는데 26년, 노동 21년, 식사 6년, 남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기다리는데 5년, 혼자 낭비한 시간 5년, 세면 228일, 넥타이 착용 18일, 담뱃불을 붙이는데 12일, 아이들과 노는데 26일, 그 가운데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불과 46시간이었다고 했습니다.

시간은 덧없이 흘러 어느덧 연말의 상징과도 같은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빠른 세월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가리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기를“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에베소서 5:15-16)하셨습니다.

또한 때에 대하여 성경에 말씀하시기를“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 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도서 3:2-8)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만사에 기한이 있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시기에 민감합니다. 농부는 때를 놓치지 않고 씨를 뿌리며 거둡니다. 어부는 때를 놓치지 않고 그물을 내리기도 하고 끌어올리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 역시 시기에 민감해야 합니다. 시기 즉 때를 놓치게 되면 후회를 낳습니다. 때를 놓친 에서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하기를“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브리서 12:16-17)하셨습니다. 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눈이 어두워 장자의 명분을 소홀히 여기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축복의 기회를 놓쳤습니다. 때가 지난 후 아버지 이삭에게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지만 지나가버린 기회를 돌이킬 수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4:16 말씀에“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에도 아무 때나 오신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습니다.“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마가복음 1:15)고 하셨습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4:4의 말씀에도“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의 때라는 것은 단순히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옮겨가는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호기(好期) 즉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일어날 결정적 기회, 절호의 기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때란 어떠한 시기를 말하는 것일까요?

1. 당시의 일반적인 사상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당시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공통적인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역행하는 것이었습니다.

1) 당시에 철학을 사랑했습니다.

이때에 많은 사람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던 철학은 에피쿠로스(Epicurus)학파의 사상이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떡으로 산다는 인간주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했습니다. 이들의 최고의 도덕은 쾌락주의였습니다. 그들의 사상은 유물론주의로써 공산주의의 칼 맑스가 이를 본 받았다고 합니다.“하나님은 없다 돈이면 제일이다.”라는 사상이었습니다. 오늘의 황금만능주의와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암흑기에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이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셨습니다.

2) 당시에 미와 예술을 사랑했습니다.

당시 미(美)는 헬라인의 정신이었으며, 미의 사상 즉 미의 극치가 여자였습니다. 여자의 몸매를 바라보고 좋아하는 것이 당시 예술 사상의 중심이었습니다. 이것 역시 오늘의 예술사상과 흡사합니다. 여자의 벗은 몸매를 바라보고 좋아하는 것은 그때나 오늘이나 동일한 것 같습니다. 옷을 벗기를 좋아하는 여자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옷을 벗어도 전혀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낯 뜨거운 드라마나 연극 영화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 세계의 표현의 자유라고 합니다.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예술의 세계를 모르는 무식한 사람으로 낙인이 찍힙니다. 인터넷 시대를 맞이한 지금은 어떻습니까? 저질 음란물들이 마치 범람하는 홍수와 같다고 하잖습니까? 이러한 것들이 성적 범죄를 유발시키며 이 사회를 타락시키는 한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 당시에 체육을 좋아했습니다. 체육의 목적이 요즘 같이 건장증진이 아니라 이것 역시 여자를 대상으로 몸매를 아름답게 하는 요가와 같은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는 그 당시에 성적 윤리가 극히 문란했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오늘은 어떻습니까? 바로 그와 같은 시대라고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야만 하는 세상 종말기적인 증거라고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

3) 당시에 지식을 사랑했습니다.

어느 때를 막론하고 지식을 중요시 하지 않은 때가 있었겠습니까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지식을 하나님의 말씀 우위에 둔 때였습니다. 지나치게 인간 지식을 중심하게 되면 그 사람은 교만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8:1-2말씀에“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하셨습니다. 하나님 제일주의가 아닌 지식 제일주의는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교만함에 경고를 하셨습니다.“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언 16:18)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때에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은 인간 지식에 의해 쓰레기통에 밀려나 있을 때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오직 인간 중심의 지식이 우위에 있었습니다.

오늘날 역시 지식을 지나치게 중시하므로 나타나는 폐단이 얼마나 많습니까? 대학 진학을 지망하는 고등학생들이 치룬 수학능력고사에서 나타난 핸드폰 부정행위가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며칠 전 전국 시도 교육감들이 학생들의 인성 교육은 뒤로 하고 오직 지식 전달에만 급급한 것을 사죄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지식 제일주의가 어디 우리나라에만 있는 일이겠습니까? 고도로 발달된 인간 지식은 유전자 조작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 역사에 까지 도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것들이 현대판 바벨탑을 쌓는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1971년 7월 아폴로 15호를 타고 달나라에 갔다 온 우주비행사 제임스 어윈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미국 공군 사관학교 솔개 상에는‘한 인간의 생애에 걸친 비행은 그의 지식의 힘에 의존한다.’는 글이 있는데 나는 달에 가서야 그 말의 의미를 실감하게 되었다.‘그의 지식’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며, 이 지식이야말로 인생을 지탱하는 힘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지구에 있을 때보다 달에서 훨씬 더 강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에 말씀하시기를“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언 1:7)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깨닫고 서기는 것은 지식의 근본입니다. 근본은 나무에 비유하여 뿌리를 가리키며, 건물에 비유하여 기초와 같습니다. 뿌리가 상한 나무는 말라 죽을 수밖에 없고, 기초가 잘못된 건물은 붕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떠나 인간의 지식을 우위에 두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오게 되는 것입니다.

2. 당시의 종교적 측면은?

1) 세례 요한의 생활을 볼 때 당시 종교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인 제사장들은 물욕과 명예욕에 눈이 어두워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에 항거하는 뜻으로 세례 요한은 호화스런 제사장의 예복 대신에 천한 사람이 입는 낙타 가죽 옷을 입었습니다. 기름진 음식 대신 석청과 메뚜기를 먹었습니다. 높은 곳에 앉아 영광받길 좋아하는 그들에게 경종을 울리고자 사람이 없는 광야에 거하였습니다.

2) 예수님의 책망을 볼 때 당시의 종교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향해 책망하신 말씀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열심당원으로 십일조를 잘 드렸으며, 하루에 세 번씩 기도를 했고, 일주일에 두 차례씩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기도의 내용도 아름다웠습니다. 우리들이 보기엔 참으로 훌륭한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 회칠한 무덤 같은 자들, 열매 없는 나무들이라 하시며 책망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1) 그들은 사람을 차별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9:10-11에는,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모습을 보고 흉을 보았습니다. 누가복음 18:9-14의 말씀에는 바리새인이 세리와 비교하여 자기의 의로움을, 자가의 신앙을 자랑하며 기도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자랑할 것 있다면 그 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하는 것이 성도의 참된 모습일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교만한 마음으로 자랑하도록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혹 이러한 요소가 없습니까?

(2) 그들은 사람 앞에 나타내길 좋아했습니다.

마태복음 23:6~8에“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당시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들이 얼마나 허영에 들떠 있었는가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곳에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가운데 성도의 본분을 다하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마태복음 6:1-6에“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회당과 큰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하셨습니다.

사람이 명예욕에 눈이 어둡게 되면 그 사람은 진실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자기를 나타내기 위해 과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명예욕에 눈이 어둡게 되면 자기보다 앞선 사람을 시기하게 되며, 자기보다 뒤진 사람을 멸시하게 됩니다. 이처럼 명예에 눈이 어두워지면 진실하지 못하게 됩니다. 사랑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겸손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명예에 눈이 멀었던 바리새인들, 제사장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 회칠한 무덤 같은 자들이라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들이 이처럼 허영에 들떠있던 때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3) 그들은 겉과 속이 같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23:2-3의 말씀에“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하고 행치 아니하며...”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23:25의 말씀에“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 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도 탐식과 방탕으로 가득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4) 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6:14에“바리새인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하였고 누가복음 11:39-41의 말씀에“바리새인은...탐욕이...가득 하도다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좋아 하며 하나님을 가장 앞세워야 될 하나님의 사람들이 돈을 더 좋아 했습니다. 돈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안 됩니다.

성경에 말씀하시기를“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디모데전서 6:7-10)라고 하셨습니다.

탈무드에 이러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세 명의 친구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친구는 만나면 언제나 반가운 그래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친구였습니다. 두 번째 친구는 만나면 반갑고 친하게 지내긴 했지만 그다지 소중하게 여기는 친구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친구는 친구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반갑게 여기거나 그다지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그 사람은 왕으로부터 궁궐로 입궁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궁궐에 들어가기가 겁이 났습니다. 혹시나 자기가 모르는 사이에 나쁜 일과 연관되어 벌을 받게 될까 봐 걱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길로 곧장 첫 번째 친구에게 찾아가 함께 궁궐에 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친구는 쌀쌀맞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왜 자네와 함께 그곳에 가야 한단 말인가? 다시는 내게 그런 부탁하지 말게.”
두 번째 친구 역시 듣고 싶었던 대답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그것 참 안 됐네. 그러나 나도 궁궐에 들어가기가 몹시 겁이 나네. 궁궐 문 앞까지는 같이 가줄 수 있네만...”두 친구 모두에게 거절당한 그는 힘없이 세 번째 친구를 찾아갔다. 이야기를 들은 세 번째 친구는 그의 손을 붙잡고 흔쾌히 승낙 했습니다.
“함께 가고말고. 자네는 나쁜 일을 한 게 없으니 두려워 할 것이 없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내가 기꺼이 자네의 결백을 증언해 주겠네.”

이 세 명의 친구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첫 번째 친구는“재산”을 의미합니다. 사는 동안 재산을 모으기 위해 무척 애를 쓰지만, 일단 죽은 다음에는 내 것이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 두 번째 친구는“친척”을 의미합니다. 친척은 살아있는 동안 서로 친하게 지내고 죽은 다음에도 무덤까지 따라가 줍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땅 속에 묻힌 다음에는 머지않아 그 사람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자기의 삶을 살아갑니다.
마지막 세 번째 친구는“착한 일”을 의미합니다. 평소에 그다지 눈에 띄지 않지만, 그 사람이 죽고 난 후에도 그의 선행은 사람들 입에 오랫동안 오르내리며 그 사람의 존재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 말씀하시기를“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디모데전서 6:17-20)하셨습니다.

침례교회에서는 세례를 받을 때 강이나 또는 특별히 준비한 침례 탕에 들어가서 온몸이 물에 잠기도록 합니다. 이것을 침례라고 합니다. 어떤 분이 침례를 받으려고 물속에 들어가면서 자기 주머니에 들어있던 지갑을 빼어 밖에 내 놓으려고 했습니다. 이를 본 침례를 집례하던 목사님이 말하기를“성도님, 그 지갑 그냥 주머니에 넣으세요. 돈 지갑도 침례를 받아야 진정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때에 일반인은 지식과 향락 이성에 눈이 어두워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던 종교지도자들은 세상영광과 물질에 눈이 어두워진 상태에 있었습니다. 교만하며 사람을 차별했으며, 자기의 이름 나타내기를 좋아했고, 말과 행동이 같지 않은 거짓이 있었고, 모두가 돈에 눈이 멀었던 때에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언대로 세상에 오셨지만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므로 예수님은 말구유에 계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다시 한번 예수님께서 오신다면 나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수님을 알아보고 기뻐하며 감격하면서 내게 있는 가장 좋은 자리를 내어드리겠습니까? 아니면 명예와 물질에 눈이 멀어 주님을 말구유에 다시 뉘이겠습니까? 내 자신의 심령의 상태를 점검하면서 성탄절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영광의 주님을 가장귀한 자리에 영접하는 복된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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