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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의미 있는 사람이다 (눅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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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한용근 목사

  여리고 성에 주님께서 들어가시게 되었습니다. 그 성에는 삭개오라고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세리 중에서도 그 지방의 세리들을 관장하고 주관하는 막강한 힘을 가진 세리들의 우두머리였습니다. 로마시대의 세리를 당시의 사람들은 “허가 낸 도둑”이라고 불렀습니다. 세리 장들은 자율적으로 세금을 부과하고 징수할 수 있는 막강한 공권력을 가지고, 로마에서 정한 세금보다 몇 배의 세금을 부과하여 자신들의 호주머니를 채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무도 세리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수군거렸고, 사람들은 그에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 그는 로마의 앞잡이였고, 이스라엘 사람들의 피를 빨아 먹는 흡혈귀요 나라를 팔아 자신의 배를 채우는 매국노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물질적으로는 풍요함을 누렸지만 이스라엘 공동체 속에서는 소외된 왕따요 버려진 주변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삭개오의 집을 지날 때마다 수군거리기를 “죄인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돈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든지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명예와 권력이라는 힘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삭개오라는 사람은 결코 돈으로 인해 행복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여리고라는 성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의 집을 6절의 표현처럼 “죄인의 집”이라고 불렀습니다. 죄인의 집은 형무소입니다. 그는 자신의 금고에 돈이 쌓여 있고, 로마 정부가 허락한 권력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의 집은 언제나 “죄인의 집”이라고 불리는 형무소와 다를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저 사람은 내가 없는 것을 가지고 있어서 행복한 것 같아도 인생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완벽하게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말은 마음에 상처가 없는 사람이 없고, 인생의 약점이 없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와 명예가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면 왜 현대 아산 대표였던 정몽헌 사장은 현대 본관 12층에서 뛰어 내려 자살을 한 것일까요? 노벨 문학상을 받으면서 많은 부와 명예를 지녔던 헤밍웨이는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건전지약이 다 떨어지고 전기 코드를 꽂을 전원이 없어 불이 들어오지 않는 라디오의 진공관처럼 외로운 공허 가운데서 살고 있다.” 그의 인생의 마지막은 권총을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자살로 마쳤습니다. 프랑스의 후기 인상파 화가 고갱도 칼로 자신의 팔에서 동맥을 끊으려는 자살을 시도했고, 고호는 자신의 한쪽 귀를 면도칼로 잘라냈고 1890년 7월에 권총으로 자살했습니다.

  우리가 볼 때 아무 염려가 없이 행복해 보이는 사람 속에도 말할 수 없는 마음의 큰 고통이 있습니다. 무거운 인생의 짐이 그를 누르고 있습니다. 생각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불행이 그 속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많이 가졌지만 행복하지 않고, 외로움과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삭개오라는 사람입니다. 사실 삭개오라는 뜻은 정결함, 의로움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입니다. 부모는 그가 일생동안 정결하게 살고 의롭게 살기를 원했지만 그의 삶은 정반대로 남의 물건을 거짓으로 훔치고 도적질하고 부정을 저지는 삶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자신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정직하고 의롭고 바르게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 이후 어둠의 영이 우리 마음속에 자리를 잡게 되자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어둠의 영에 붙들려 공의를 잃어버렸습니다. 정직을 잃어버렸습니다. 선한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아 버리게 되었습니다. 전도서 7:29절에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내었다”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인간들은 더 이상 정직하게 살기를 포기하고 삭개오가 다른 사람들의 등을 쳐야 먹고 살 수 있었던 것처럼 다른 사람의 등을 치기고 결심했습니다. 그의 집에는 부가 쌓였고 그는 부를 이용해 세리들 중에서 가장 높은 세리 장의 위치에 올라갔지만 그는 결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인간들이 삭개오처럼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살지만 행복하지 못한 것은 내 속에 있는 인생의 죄의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고통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레데릭 2세는 늘 하루에 초콜릿 한 잔을 마셨다고 합니다. 그가 산스수 시에 있을 때 늘 하던 것처럼 초콜릿 한 잔을 마시기 위해 침실에서 옆방으로 갔습니다. 그가 막 초콜릿을 마시려는 순간 침실에 자신의 손수건을 두고 온 것이 생각 나 다시 침실로 건너갔습니다. 그가 자신의 손수건을 가져오는 동안 천장에서 거미 한 마리가 떨어져 초콜릿 속에 빠졌습니다. 그는 거미로 인해 초콜릿 한 잔을 다시 주문했는데, 그 순간 한 발의 총성이 조리실에서 울렸습니다. 왕의 요리사가 권총으로 자살한 것입니다. 그날 왕을 독살할 계획으로 요리사는 왕이 마시는 초콜릿에 독을 넣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초콜릿이 다시 주방으로 돌아오자 그는 자신의 계획이 탄로 났다고 생각하고 죄책감에 자살한 것이었습니다.

  죄의 고통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죄는 우리를 아주 비참하게 만들고, 실패자로 만듭니다. 죄는 우리 속에 있는 기쁨과 행복을 빼앗아 갑니다. 아무리 행복한 인생도 죄의 늪에 빠지면 순식간에 불행하게 됩니다. 이 죄악의 어둠의 영에서 벗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삭개오는 삶이 참으로 고통스러웠습니다. 자신의 인간관계가 유대 사회에서 어울리지 못한 인간으로 주변인이 된 것이 괴로웠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괴로웠습니다. 그는 로마시대의 뛰어난 지성인이었고, 로마가 준 힘을 소유한 사람이었지만 동족이요 친구요 친척들에게 그는 한갓 배신자였고 매국노였으며 도적에 불과했습니다.

  이 고통 중에 한 가지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예수에 대한 소문이었습니다. 여리고 성 입구에서 날마다 구걸하던 맹인 바디메오가 고침을 받았다는 소문을 시작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분으로 인해 기쁨을 얻게 되었고, 평안을 얻게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를 만나는 사람마다 인생이 변화되었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그는 누구보다 예수라는 이 사람을 만나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 생각에 사로잡히자 그분이 있다는 곳을 향해 힘껏 달려가지 시작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이 있다는 곳에 도착했을 때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고, 그의 힘으로는 도저히 군중을 뚫고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분께서 자신의 앞으로 지나간다고 해도 그분을 볼 수 있는 큰 키를 가지고 있지 못한 아주 작은 키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이 순간 결정해야 했습니다. “이 장벽을 해결하고 예수라는 분을 볼 것이냐? 아니면, 다음 기회에 볼 것이냐?”

  사람들은 과일을 고를 때 혹은 시장에서 파 하나를 고를 때도 아주 열심히 좋은 것을 찾기 위해 노력합니다. 지금 우리는 시장에서 이런 과일이나 파나 두부를 고르는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삭개오가 자신의 인생을 놓고 결정했던 것처럼 아주 중요한 순간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에 영접할 것이냐? 아니면, 다음 기회에 받아들일 것이냐? 이 선택은 사과를 선택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평생 함께할 애인을 선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영원한 구원과 형벌이라는 삶과 죽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는 단호히 그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영혼의 문제를 과감하게 결정했습니다. ‘다음에 기회는 없다. 지금 꼭 만나 봐야 한다. 언제 그가 또 이곳에 올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는 그분께서 지나 갈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 뽕나무 위로 올라가 그분이 자기 옆으로 지나가기를 기다렸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열망을 누가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누가 지붕을 뜯어 친구를 고치고자하는 그 믿음의 열정을 막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누가 12년간 자신을 괴롭혔던 혈루병에서 낫고자 하는 여인의 믿음의 열정을 막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느 누가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바디매오의 그 위대한 믿음의 부르짖음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와서 문제를 해결 받고자 하는 사람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만나고자 하는 열정을 가지고 그분을 기다리고 있는 삭개오를 주님께서 지나치실 리가 있었겠습니까? 결코 그런 주님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가 앉아 있는 나무를 향해 서서히 다가 오셨습니다. 그분의 위대한 발걸음은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삭개오 앞에서 멈춘 것입니다. 그 순간 키 작은 삭개오는 나무 위에서 내려다보고, 예수님은 나무 밑에서 그를 우러러 보았습니다. 키 작은 삭개오가 주님을 내려다보았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장면입니다.

  주님의 발걸음이 멈추자 놀라운 기적의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는 소망과 믿음의 열정으로 주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해야 합니다. 주님의 발걸음이 멈추는 순간 우리들에게는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고, 기적이 일어나고 좋은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는 주님의 발을 멈추게 한 성공자였습니다.

  주님의 발걸음이 멈추는 그 순간 주님은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고 그의 이름을 정확하게 부르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랄운 일입니까? 주님은 삭개오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가 왜 거기에 있는지, 그 나무 위에 있는 사람의 이름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큰 위로와 소망을 가집니다. 주님께서 삭개오만 아시는 것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는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시고 우리의 이름을 모두 아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14-15절을 통해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주님은 자신의 양을 잘 알고 계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사40:26-29)라고 했습니다.  따라 해 봅시다. “하나님은 내 이름을 아신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전도할 때에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가리켜 “갈릴리의 나사렛 그 시골 촌에서 그런 사람이 나올 리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나다나엘이 오자 주님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정확하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우리는 해야 합니다. 그것은 삭개오처럼 주님이 계신 곳으로 담대히 나오는 것입니다. 혈루병 걸린 여인처럼 주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바디매오처럼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앞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딸이 병들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하고 나온 회당장 야이로처럼 주님 앞에 오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올 때 인생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55:6-7).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이제 우리는 주님 앞에 온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을 우리의 집으로 모셔 들여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삭개오를 바라보시면서 직접적으로 “오늘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의 집은 사람들이 볼 때 “도적의 집”이요 “죄인의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분을 자신의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6절에는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였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의인의 집에 들어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무엇보다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죄인의 집에 오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21절에는 “아들을 낳으니리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영접하자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삶은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돈을 모으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돈을 갈취하는 갈취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남의 등을 쳐서 돈을 빼앗는 부패한 관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빗뚫어진 양심의 소유자가 아니었습니다.

  그 도적의 집에 예수님이 들어가자 도적의 집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나눔의 집이 되었습니다. 이웃을 위한 쉼터가 되었습니다. 단절된 이웃을 위해 문을 열고 사랑의 손을 붙들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기도의 집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그의 집으로 영접하는 순간 그 집은 완전히 변화되었고, 새로워졌습니다. 한마디로 놀라운 기쁨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삭개오는 주님을 영접하는 순간 매우 의미 있는 주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의 뜻대로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적극적인 후원자가 되었고, 주님께 아주 중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삭개오와 같습니다.  죄인의 집에 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그의 인생은 달라집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중요한 인생이 됩니다. 의미 있는 인생이 됩니다. 주님은 죄인의 집에 들어 가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위대한 자녀들입니다. 부모에게 있어서 자녀는 의미 있고, 중요합니다.  이 한 주간도 승리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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