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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환경을 뛰어넘는 사랑이야기 (삼상 19: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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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황요한 목사 

오늘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의 마음 속에 충만한 만나와 같은 양식이 가득 차기를 원합니다. 오늘은 사랑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 로미오와 줄리엣을 아실 것입니다. 어떤 분이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를 하는데 바빠 가지고 로미오는 읽었는데, 줄리엣은 아직 못 읽었다고 그런 일도 있었다고 그럽니다.

그 이야기의 중요한 컨셉은 양쪽 집안이 원수집안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흔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젊은이들의 숭고한 사랑으로 맺어지는 그런 러브스토리인데, 오늘 다윗과 미갈의 사랑이야기는 아마도 그 이야기 이상의 감동적인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저는 이 ‘환경을 뛰어넘는 사랑이야기’를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메시지를 우리 마음 속에 가득 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극진히 사랑하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문자 그대로 눈동자와 같이 지키신 줄로 믿습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요나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윗을 사랑하셨고 지키신지를 우리는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다시 또 다른 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우리는 또 보고 있습니다. 작게는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지만, 크게 보면 이것은 두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미갈이라고 하는 사울왕의 둘째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구체적으로 사랑하고 계심을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보게 될 것입니다.

끊임없이 이스라엘 주변에 전쟁이 있었습니다. 지난 번 골리앗과 같은 큰 전쟁은 아니지만, 국지적인 전쟁들, 어떻게 보면 전투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왕이 측근에 두고 모든 군대의 천부장을 삼아서 장수가 된 다윗이 전쟁 때마다 나가서 지혜롭게 행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전쟁에서 하나님 주시는 지혜와 능력을 힘 입어서 이겼다는 말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승리가 중요하지만, 그 승리의 배경에는 누구의 인도하심으로 승리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승리한 사람의 고백이 중요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오늘 승리하였습니다 라는 고백이 중요합니다. 내가 어떤 경험이 많아서, 내가 어떤 능력이 있어서 승리했다고 하는 것은 인간적인 자랑밖에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다윗이 전쟁에 나가서 승리했습니다. 이제는 블레셋과의 싸움은 싸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제는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한 이야기는 한 줄로 정리할 만큼 이제는 이야기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다윗과 골리앗, 엘라골짜기에서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그 큰 싸움의 고비가 믿음으로 극복된 이후에는 이제 싸움은 그렇게 큰 화제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나서 이제 다윗은 개선의 기쁨을 가지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크던 작던 전쟁이라는 것은 생명을 거는 것입니다. 생명을 걸고 국가를 위해서 왕을 위해서 싸웠던 다윗,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돌아오는 다윗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왕궁에서 사울의 창이었습니다.

내가 심령이 곤고하니 수금을 가지고 와서 나를 위로하라. 다윗은 초대를 받았습니다. 개선장군으로써 수고한 격려의 자리가 아니라 다윗을 초대해서 내가 창으로 벽에 꽂으리라고 하는 암살계획을 가지고 있었어요,

사실 18장을 보면 이미 두 번씩이나 다윗을 창으로 죽이려고 했던 사울의 음모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 한 번 잘 못 된 길을 가기 시작하면 이렇게 빗나갈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울은 지금 빗나가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돌아왔는데, 그 사람을 사울은 죽이려고 계획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제일 중요한 분별의 근거는 9절일 것입니다. 사울에게 악신이 임하니라. 사울을 지금 주장하고 있는 것은 사울의 생각을, 사울의 모든 계획을, 사울의 모든 발걸음을 인도하고 있는 것은 사탄의 역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하나님의 자녀로써 하나님의 영 성령이 인도한 그러한 삶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지금 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의 이 행동은 성령이 인도함을 받는게 아니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 다윗과 사탄의 인도를 받는, 사탄의 주장을 받는 사울과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 상황에서 바로 영의 싸움, 영적전쟁의 현장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21세기도 극심한 영적전쟁에 우리가 노출되어 있다라고 수많은 지도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계를 바라볼 때 보여지는 예를 들면 사울이 시기하는 마음으로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단순한 시기심이 아니라 사탄의 영이 하나님의 영의 사람을 해하려고 하는 영적전쟁의 안목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제거하기 위해서 세가지 암살계획을 세웠습니다. 첫째가 10절에 나와있습니다. 다윗의 손으로 수금을 탈 때에 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고 하는 계획입니다. 자기가 직접 다윗을 암살하려고 하는 계획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위해서 정성을 다해서 수금을 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사울왕의 그 정신적 혼란과 고통을 치유해 주려고 하는, 지금 전쟁에서 돌아와서 그 피로감, 그 전쟁의 긴장감과 압박감에서 해방되어서 그 피로가 온 몸에 몰려올 터인데, 그런 것을 뒤로하고 오직 왕을 위해서 수금을 타고 있는 다윗, 그러나 사울왕은 그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울의 그 계획이 빗나가게 하신 줄 믿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다윗이 날쌨기 때문에 피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다윗의 그러한 눈치, 또 전쟁에서 관련된 민첩함, 그런 것들도 도움이 되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지키시려고 하지 않는다면 다윗은 그 죽음의 위협에서 해방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다윗이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집으로 달려왔을 때, 사울은 군사들을 다윗의 집으로 보냈습니다. 집을 포위하고 밤새도록 도망가지 못하도록 지켰다가 아침에 그를 죽이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군사들이 다윗의 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밖을 보니까 군사들이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아내 미갈이 굉장히 초조해졌습니다.

다윗에게 말합니다. 당신이 이 밤에 당신의 생명을 구하지 아니하면 내일 아침 당신의 생명은 죽은 목숨이 될 것입니다. 아내가 다윗을 설득합니다. 이 밤에 이 집을 떠나야 합니다. 결국 다윗은 아내 미갈이 마련해 준 창에 줄을 붙잡고 그는 탈출을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이 미갈의 창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우리의 간단한 일상적인 그러한 집의 구조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여기는 왕궁이고, 돌로 높이 쌓은 그 집에 창을 생각을 해 보세요. 거기서 그가 내려간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또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미갈은 다윗을 자기가 이 일이 발각된다면 자기에게 다가올 위험과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사랑하는 남편 다윗을 위해서 그녀는 창에 달아 남편 다윗을 내리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큰 우리 같으면 큰 인형에다가 머리에는 염소털을 엮은 것을 씌웠습니다. 요즘으로 하면 가발을 씌운 거지요. 그리고 이불을 덮었습니다. 옷을 다윗의 옷을 입혔습니다. 군사들이 밤새도록 지키고 있다가 아침에 들어와서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데, 집에 들어온 군사에게 미갈이 말합니다. 우리 남편이 지금 병이 들어 누워있습니다. 군사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돌아갔어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중요한 여기서의 한가지 규칙을 보게 됩니다. 흔히 전쟁할 때, 등을 향해서 창을 던지거나 활을 쏘지 않는 것이 정상적인 전투에서의 하나의 규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간의 멋진 매너입니다.

병들어 있는 사람을 찾아가서 죽이지 않는다고 하는 그런 기본적인 매너를 이 군사들이 가지고 있었어요. 남편이 병들어 누워있다고 하니까 군사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돌아갔어요. 왕에게 그 이야기를 했어요. 어떻게 되었느냐? 다윗이 병들어 누워있어서 그냥 왔습니다.

사울왕이 얼마나 화가 났겠어요. 다시 가서 그 병상째, 침상째 들고 와라. 내가 다윗을 죽이리라. 이제 사울왕에게는 기본적인 상식도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 되었어요. 사람이 처음부터 잘 못된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조금씩, 조금씩 빗나가기 시작하다 보면 나중에는 정말 돌아오기 어려운 상황까지 가게 되었어요. 이제 아예 침상째 들고 오면 자기가 확인하고 죽이겠다는 거예요.

세 번째 15절 이하에 보면 군사들이 찾아갔지만 이불을 들쳐보니까 다윗은 간 데 없고 가발을 씌어놓은 그런 인형만 있었습니다. 사울왕이 17절에서 딸 미갈에게 말합니다. 너는 어찌하여 이처럼 나를 속여 내 대적을 놓아 피하게 하였느냐?

지금 아버지와 딸이, 부녀지간에 해야 할 말입니까? 더구나 자기 사위를 대적이라고, 원수라고, 지금 부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사울왕과 다윗의 관계에서 사울왕이 그렇게 표현하는 것처럼 다윗은 원수가 될 만한 일을 했고, 대적이 될만한 행동을 했는가? 그렇지는 않지요.

우리가 어떤 문제가 생기면 어떤 사람의 말을 듣느냐가 아주 중요합니다. 사울의 말을 들으면 다윗이 나쁜 사람이지요. 왜? 사울왕에게 있어서 다윗은 대적이고, 원수니까 어떤 말을 했겠습니까? 정말 죽일 놈이다. 사울의 입에서 그런 말이 안 나오겠습니까? 그런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정말 다윗은 죽일 놈이구나.’그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얘기가 생기고, 문제가 생겨도 누구의 말을 듣느냐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장면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이 다윗과 미갈이라고 하는 이 젊은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아주 소중한 메시지들이 있습니다. 사실 이 딸 미갈은다윗을 사랑하는 일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정말 우리가 서로 간에 사랑을 한다면 이 정도 수준의 사랑은 해야 합니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혼식을 하면서 신랑신부에게 서약을 시킵니다. 신랑 아무개는 신부 아무개를 아내로 맞아서 가난하거나 부하거나 건강하거나 병들거나 우리의 모든 삶의 현실은 변화할 수 있어요. 사람들이 건강할 때 사랑하다가 병들면 사랑이 식어버립니다. 흔히 삼년 병자의 효자도 없다 그랬고, 부부 간에는 배우자가 일년동안 병들어 누우면 아마 딴생각을 할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서약을 시키는 것입니다. 병들거나 건강하거나.....

매달 2,300만원씩 가져다 주면 우리 신랑 최고라고 직장을 잃고, 사업이 부도가 나서 생활비를 못 가져다 주기 시작하면 얼마 정도는 참지만 그것이 일년, 이년 지나가면 생각이 달라지지요. 헤어질까? 무슨 이야기입니까? 사랑이 식어졌다는 이야기지요.

그래서 IMF때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헤어졌습니까?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길거리로 나와서 노숙자가 되었습니까? 사랑이 식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지난 번 우리 결혼식 때는 우리 신부에게 고린도전서 13장을 따라하게 했어요. 사랑은 오래 참고, 투기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자기 이름을 부르면서 나 신부 아무개는 오래 참고....

우리 신부가 중간이 지나가면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어요. 사실 눈물 없이 그 서약을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아마 정상이 아닐 것입니다. 그 서약을 시키는 저도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아마 21년 동안 수없이 많은 주례를 해 왔지만, 감동적이고, 은혜로운 예배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장소도 신학대학의 아름다운 장소에서 드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말 좋은 은혜로운 예배였어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환경에 따라서 변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는 여러분 이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들이 사랑한다고 하는 그 사랑의 표현이 정말 내가 하나님 앞에서 오늘 다윗과 미갈의 관계를 보면서 그런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다윗도 미갈을, 미갈도 다윗을 사랑한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이 젊은 남녀의 사랑을 단순히 그들의 사랑 이야기로만 생각할 수 없어요. 제가 처음 말씀을 시작하면서 전제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지난 시간에 요나단이라고 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것처럼 또 다른 여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그 하나님의 이야기를 보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미갈의 러브스토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러브스토리라고 하는 거예요. 골리앗과의 전쟁이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 이 이야기가 한 여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라고 하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저는 두가지를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미갈을 통해서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이 첫째로 어떤 환경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어떤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사랑의 모습을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거예요. 미갈의 상황에서는 아버지라는 상황을 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산입니까? 자기의 남편, 다윗을 원수라고 생각하고, 대적이라고 생각하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이려 하는 그 아버지라는 산을 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족관계라고 하는 이 산을 넘어가야 합니다. 가족관계라고 하는 이 거친 환경을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종종 신앙생활 하면서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려면 이 가족관계를 조금 넘어서는 관계가 되어야 하겠다. 남편이 잘 못했을 때 아내가 ‘여보, 당신도 잘 못 한거야.’ 그냥 남편이라고 역성을 들게 아니라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내가 잘 못 했을 때 아내라고 역성을 드는 게 아니라 그것은 당신이 잘 못 된거야.

우리 교회가 잘 못 되어졌을 때 그냥 우리교회라고 편드는게 아니라 우리 교회가 잘 못된 것입니다. 라고 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정치를 보면 무슨 당, 무슨 당 이러는 거 보면 사실 이번에 2/3가 넘는 새로운 정치인들이 국회의원이 되면서 기대가 컸잖아요. 정말 잘못된 고착화된 정치인들의 패러다임을 아마 새로운 숫자적으로도 2/3가 넘는 사람들이 고칠 것이다. 기대가 있었는데,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였습니다.

그리고 물어보니까 우리의 그 당이라고 하는 집단에서 내가 이탈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잘 못된 것 따라가는 패거리 집단이 되어 버리고, 많은 사람들이 실망합니다. 가끔씩 보면 집단에서 선한 양심을 가지고 바른 상식을 가지고 ‘아닙니다.’라고 말 하는 사람이 있어요. 굉장히 미움을 받지만, 시민들에게서 굉장히 칭찬을 받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 동아리라고 하는 가족이라고 하는 동아리, 그 어떤 교회라고 하는 동아리, 우리라고 하는 동아리, 그 틀에서 넘어갈 수 있는 큰 믿음이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것을 넘어서지 못하면 하나님을 감동시킬수 있는 삶을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미갈의 사랑이야기는 그런 가족관계라고 하는 테두리를 넘어서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정말 바울사도가 고백을 했듯이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할 것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에 중요한 결정의 시기, 미갈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섰다고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한 남자를 사랑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기를 원하고, 하나님 이 사람을 통해서 이 나라를 이끌기를 원한다고 하는 분명히 내가 이 사람 편에 서야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그는 목숨을 걸은 것입니다.

어떤 불이익도 감수하겠다고 하는 그런 결심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미갈의 사랑속에서 분별력 있는 그의 사랑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혹 사람들로부터 어려움을 당할 수 있어요. 17절에서 아버지 사울왕이 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어찌하여 이처럼 나를 속이느냐? 아버지로부터 책망을 받습니다. 어쩌면 궁에서 쫓겨날 수도 있습니다. 사위를 죽이겠다는데, 딸도 못 죽이겠습니까?

그는 이미 사단에, 악령에 사로잡혀서 정상적인 분별력을 잃어버린지 오래예요.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에 미갈은 서지 않았어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미갈이라고 하는 여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어떻게 지키시고,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지금 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선택하시고 부르신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성도가 되었고, 일꾼이 되신 줄 믿습니다. 2005년에도 여러분들은 많은 일을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았습니다. 흔히 우리가 전체적으로 말할 때는 선교회 회장님들, 각 지역 지역장님들, 속장, 강사님들 이런 큰 표현을 쓰지요. 교회학교에 각 부장선생님들 하지만 그런 분들만 중요한 것은 아니잖아요.

제가 한 성도님을 만났습니다. 우리 교인이 아닌데, 그분과 대화하는 중에 그 분이 교회에서 중요한 일을 맡고 있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서 속으로 무슨 선교회 회장이나 총회장을 맡고 있나보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그 분이 한참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그분은 총회장도 아니고, 선교회장도 아니었어요. 굉장히 자부심을 가지고 자기가 선교에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는 이 시간에 가야 하고, 자기가 그 일을 위해서 굉장히 기도하고 준비한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자기는 그 교회, 그 선교회에서 서기를 하고 있다는 거예요. 같은 여선교회 회원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목사에게 하는 이야기가 자기 교회에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고, 자기는 그 일을 빠질 수가 없고, 자기는 너무 하나님 주신 사명이 귀해서 감사하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는 자기 선교회에 서기를 하고 있다는 거예요. 목사인 제가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몰라요.

지난 한 해 동안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 작다고 생각하는 그런 일들, 그냥 소홀하고 우습게 여기지는 않으셨습니까? 다른 사람, 아니 목회자 앞에서 이 것이 중요한 일이고, 이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그 소중한 사명들 때때로 그러한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마다 저는 어렵습니다. 저는 못합니다. 먼저 말하지는 않았습니까?

빌립 플로스가 하신 말씀처럼 능력에 맞는 일을 구하지 않고, 일에 맞는 능력을 구하십시오. 저는 그 말씀이 너무나도 은혜가 되었어요. 죄송하지만, 그 말을 그 분이 한 줄 몰랐습니다.

제가 정말 많이 사용했던 말인데, 어느날 책을 보면서 ‘어, 이 분이 이 말씀을 했네.’ 그런데 이 분이 저보다 더 오래 전에 사람이니까 어떻게 해요. 제가 그 분의 말 따라가야지. 그래서 그 밑에 황요한 목사 라고 쓸 수 없게 되었어요. 그 분만 쓰셨겠습니까? 어떤 영적인 분별력을 가진 분들은 그런 표현을 많이 쓰셨을 거예요. 문제는 그런 말씀을 하신 분들이 글을 통해서 표현이 되었기 때문에 언제 누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라고 그렇게 표현이 된 것입니다.

지난 2년 가까이 저는 지방감리사일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 해 보는 일이고,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지방 동역자들이 추대해서 감리사 일을 시작을 했습니다. 하나님, 처음 하는 일이지만, 잘하게 해 주셔서 우리 중부연회 28개 지방 중에 이왕이면 제일 멋있는 지방되게 하시고, 좋은 열매 거두기를 원합니다.

우리 연회에서 연회체육대회 우리 부천남지방이 종합우승을 했어요. 여러분, 체육대회 할 때에 우승 하는 것이 간단한 일인 줄 아십니까? 우리 교회에서 운동회 할 때에 간단한 일이 아니잖아요. 그 일을 위해서 몇 달전부터 준비하고 모든 교회들이 교역자들이 마음을 같이 해야 하고, 모여서 같이 연습해야 하고 그리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어느 해보다도 풍성한 사랑과 그리고 하나된 마음으로 모든 지방이 바라볼 때 ‘야, 정말 부천남지방 멋있다.’ 올해 우리가 성지순례를 가면서 교역자들 부부가 한 교회만 몸이 불편해서 못 가시고 개척교회까지 부부가 출발을 했어요. 46명이나 갔어요. 서로들 염려했습니다. 이 많은 사람이 어떻게 다 그 해외여행을 할 것인가? 20여명만 가도 모이기에 한 시간이 걸리고 식당에 가도 한 시간이 걸리는데,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십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가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우리가 이일을 위해서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준비하십시다. 보통 대형버스가 보통 45인승이예요. 그래서 50인승 버스를 특별히 주문을 했어요. 46명과 기사, 현지 가이드와 선교사님 가이드 그렇게 49명이 타고 다녔어요. 놀랍게도 늦게 나오면 1분에 1달러입니다. 10분 늦으면 10달러 받는 그런 벌금제도를 해도 잘 안 되는 그런 해외여행이 우리는 벌금제를 한 적도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늦게 나와서 버스가 출발이 늦거나, 식사를 늦게 하거나 행동에서 불편함을 느낀 적이 없어요. 서로가 서로를 보며 놀랍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아마도 그런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주님의 일을 하실 때 경험이 있어서 하십니까? 그러면 경험이 없는 사람은 새로운 일은 절대 할 수 없다는 것 아닙니까? 주님, 내게 이 사명을 주셨다면 이 사명에 맞는 능력을 주옵소서.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평안의 성도들의 기도가 달라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새해 2005년에 다양하게 주신 우리의 사명들을 그렇게 기도하는 평안의 성도들에 그 사명자들의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고, 여러분들에게 합당한 지혜와 능력으로 넉넉히 감당하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계획을 통해서 사람을 어떻게 표현하시는지, 그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들이 어떻게 그 사랑을 어떻게 계속적으로 입어가는지, 하나님께서 지키기를 원하시는, 인도하기를 원하시는 그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손길을 통해서 인도함을 받는지 오늘 우리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때때로 능력의 사람을 통해서, 때때로 연약한 사람들을 통해서, 때때로 남성을 통해서, 때때로 여성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계속 진행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쓰임받는 우리라면, 이제 우리의 기준은 분명합니다. 하나님 나로 하여금 환경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주인공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내게 중요한 결단의 순간이 올 때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쁘게 하는 편에 내가 서게 하옵소서. 환경을 뛰어넘는 사명자, 환경을 뛰어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존귀하신 하나님, 요나단을 통해서 다윗을 사랑하셨던 구원의 하나님의 손길이 이제 또 한 사람 미갈을 통해서 또 한 번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 그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우리가 발견하며, 분별하며 그 하나님의 계획에 온전히 쓰임받는 저희들로 삼아 주시옵소서. 사람과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다가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분명한 결단들이 우리의 삶 속에 주어질 수 있도록 주님 저희들을 인도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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