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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신앙고백은 무엇인가? (창 22: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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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필재 목사

성경에 나오는 인간과 하나님의 많은 관계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신앙고백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가 우리나라 말로 자세히 번역이 되지 않고 그 때 그 사람들이 쓰던 말 자체로 성경에 기록된 데가 몇 군데 있습니다. 그래서 그 내용을 살펴보면 거의 가 다 자기들의 인생에 가장 어려운 시간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고백하는 말을 히브리 원어의 표현대로 그냥 기록된 말씀들이 있습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각자 조금씩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처한 환경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진 사실에 대한 고백이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는 내용을 성경에서 많이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요즘에는 성경 공부하는 자료들이 아주 많이 나와 있습니다. 어느 성경공부 교재를 보니까 하나님에 대한 여러 가지 이해를 다르게 해석하는 내용들이 아주 재미있게 나열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생각할 때 자기가 체험한 대로 고백을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요술쟁이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기적을 일으키시니까 이것은 요술쟁이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은 날마다 하시므로 하나님은 기적을 일으키시는 요술쟁이이시다. 날마다 기적 창출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지고 그렇게 신앙을 정리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교통순경과 비슷하다." 항상 갈 길을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리 가라, 저리 가라, 어떤 때는 못 가게도 하시고, 통과시키시기도 하시고 항상 갈 길을 인도하시는 교통순경과 같은 역할의 하나님 성격을 말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은행장으로 생각합니다. 돈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항상 돈을 달라고 우리가 요청을 하면 돈을 주시니까 은행장과 같은 역할이 하나님의 역할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왕'적인 개념으로 이해를 합니다. 천하를 호령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무섭게 하시니까 왕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운동 경기의 심판자이다." 조금만 잘못을 해도 호각을 불어서 벌칙을 주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잘못을 가려내시는 운동경기의 심판자와 같은 그런 역할을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비밀경찰이다." 우리의 비밀을 다 알고 계시잖아요?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니까 숨길 것이 없는 그런 역할로 하나님을 생각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히틀러와 같다." 자기 마음대로 다 하시니까 하나님은 독재자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변호사이다." 항상 우리의 죄를 대변해 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역할자이니까 아주 유능한 변호사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여자이다." 이렇게 표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만 좋아하라고 하니까 여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다른 신은 절대로 섬기지 말라고 하시니까요. "다른 신을 좀 섬겨라!" 하셔도 괜찮을 것 같은데 자기만 좋아하라고 하신단 말이에요. 또, 어떨 때 "하나님은 순정파 남자이다." 왜냐하면 울면 들어 주시니까요. 이렇게 여러 가지 표현으로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각자가 자기가 처하는 관점에서 하나님을 해석하는 입장을 다르게 봅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용어도 다양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은 의로운 하나님이요, 자비로운 하나님이요, 사랑의 하나님이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어떨 때는 하나님은 광대하신 하나님이요, 혹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요, 소멸하시는 하나님이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두고 표현하는 내용도 수없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 우리가 표현할 때도 여러 가지로 표현을 합니다. 하나님은 빛이 되시며, 생명이시며, 창조주이시며, 심판자이시며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설명하실 때에도 여러 가지 이름을 사용하신 것을 우리가 성경에서 보게 됩니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빛이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양의 문이며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예수님 자신이 자신을 소개하는 내용도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각자의 신앙고백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타난 내용도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히브리 방언 그대로를 한글로 표시한 그 고백들을 우리가 성경에서 찾아보면 거의가 똑같이 그가 자기 인생에 가장 어려운 시간에 만난 하나님을 이해하는 말로 표현된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는 아브라함이 이해한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라고 나옵니다. "이레"라는 말이 우리말이 아니잖아요? 이렇게 히브리말 방언을 그대로 적어놓은 곳이 성경에 몇 군데 있습니다. 그것을 오늘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말은 아브라함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이레"이다. 이렇게 아주 확고부동하게 하나님의 성격에 대해서 신앙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이 말은 '준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내용을 보면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잡아서 모리아 산꼭대기에 번제를 드리라는 그의 일생에 가장 고난스러운 시간이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생겨졌는데, 그 고통스러운 사건은 결국 이삭 대신 하나님이 번제 드릴 양을 미리 준비하여 놓으심으로 해결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레이다. 미리 준비하신다." 모든 일을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해결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이해하였을 때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이다. 하나님은 미리 준비해 놓으시고 미리 준비해 놓으신 것을 실천할 수 있도록 명령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은 그냥 순종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미리 다 준비해 놓으신 것이 있으니까 내가 모르는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것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레이다." 아브라함의 신앙 고백은 "이레"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명령하신 모리아 그 넓은 산에 아브라함이 번제 단을 쌓은 바로 그 자리 옆에 어떻게 해서 양 한 마리가 그 산의 거기까지 올라와서 또 뿔이 걸려 있었는지, 그게 누구네 집 양인지, 하필이면 그 자리에서 그 양이 넝쿨에 걸려 있었는지, 틀림없이 그 양의 주인인 목자가 있었을 터인데 그 목자는 왜 그 양을 보지 못했는지 이상한 추리를 한없이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 이 일은 하나님이 이렇게 준비해 놓으시고 나를 이리로 인도하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은 그냥 하면 되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과 자기의 관계를 성립시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양을 발견할 때까지는 아브라함은 많은 갈등과 고민이 있었고 하나님이 그러한 일을 무엇 때문에 시키시는 것인지 그 내용을 전혀 알 길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은 하나님이 미리 다 준비하여 놓으시고 우리에게 실천할 것을 또, 순종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하나님이 하라고 하면 죽음의 자리도 그냥 가면 무엇인가는 하나님이 미리 준비해 놓으신 것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이해한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 생활 가운데서도 나타나고 바울 선생의 선교 역사에 많이 나타납니다. 바울이 아무 것도 준비가 없는 상태에서 환상만 보고 유럽 전도를 떠납니다. 하나님이 미리 예비해 놓으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루디아를 만남으로 유럽 전도의 기초를 거기서 닦게 되고 훌륭하게 유럽 선교를 할 수 있었습니다. 헬라 문화의 중심지 고린도를 찾아 선교를 할 때 당장 닥치는 고난이 바울을 굉장히 어렵게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해 놓으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남으로 고린도 선교를 아주 훌륭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뭐든지 하나님이 미리 무엇을 준비해 놓으시고 우리의 삶의 현장과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실 일이 얼마든지 있음을 보여주는 "여호와 이레"인 것입니다. 우리 개인의 삶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준비성 안에서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나보다 앞서 하나님이 행하시니" 먼저 준비해 놓으시는 하나님, 아브라함이 이해한 하나님은 미래의 하나님으로 '너무 걱정할 것 없다.' 매우 두렵고 어려운 일이 내게 닥쳤을지라도 하나님은 그 일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미리 준비해 놓으시고 나더러 그 길을 가라고 하시는 거니까 이렇게 하나님을 이해한 것입니다.

제 친구 목사님 한 분은 옛날 학생 시절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미국 유학을 가야겠는데 제일 힘든 게 대사관에서 비자를 안 준단 말입니다. 그런데 꼭 가야만 될 입장이었는데 비자를 받으러 가면 항상 떨어지고 떨어지고 해서 어떻게 하면 비자를 받아내나?' 그래서 어느 날 낙심이 되어서 기도를 하고 덕수궁에 놀러가서 '무슨 방법이 없나?'하고 나무 밑에 가서 곰곰이 생각을 하고 기도도 하고 연구도 하고 있는데, 미국 여자 둘이 자기 앞을 지나가다가 자기를 보고 하는 말이 영어를 할 줄 아느냐고 물어보더래요. 할 줄 모르는데 "Yes!" 할 줄 안다고 대답했답니다. 그랬더니 자기보고 덕수궁에 있는 옛날 그림을 보고 설명을 해달라고 하더랍니다. 아니, 영어도 못하는데 그 그림을 어떻게 설명을 해요? 그래서 한국말로 다 설명을 해줬대요. 설명을 해줘야겠고 알아듣는 것은 그쪽 책임이고, 좌우간 한국말로 이 그림은 어떻고 누가 그렸고 열심히 설명했답니다. 그런데 그 여자들이 영어를 잘 못한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뭐, 그렇게 그냥 지나갔대요. 그러고 나서 나중에 비자를 받으러 이틀 후에 인터뷰를 하러 갔는데 그 여자들이 그곳 대사관에 있더래요.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 "아니, 당신 여기 어떻게 오셨어요?" "나 비자 받으러 왔습니다." "아, 그러세요? 내가 도와주겠습니다." 데리고 가서 그 비자 담당자에게 이 사람 굉장히 영어 잘한다고, 미국 보내줘도 넉넉하니까 보내주라고 얘기했대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도장 찍어줘서 미국 유학을 아주 훌륭하게 잘 하고 지금 LA에서 목회 하다가 지금 은퇴한 친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로 다 준비하시니까 하나님 잘 믿는 사람은 이 "여호와 이레"를 믿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브라함의 신앙 고백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모세의 고백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17장 15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모세는 하나님을 뭐라고 불렀느냐 하면 "여호와 닛시"라고 불렀습니다. 이 "닛시"라는 말도 한국말이 아니잖아요? 그 말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 즉, 승리를 상징합니다. 모세가 이해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은 "여호와는 승리하신다." 이런 뜻입니다. 모세가 아말렉과의 어려운 전쟁을 하고 나서 그 전쟁의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향하여 고백한 말입니다. 거기서 다 죽는 줄 알았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닛시"이다. 이 "여호와 닛시"라는 말을 더 길게 설명을 하면 "여호와의 깃발을 드는 자는 승리를 주신다"라는 말입니다. 애굽을 출발한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여정에 가장 큰 장애물이 도중에 적을 만나서 전쟁을 수없이 해야 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단 말입니다. 그런 일을 40년 동안 끊임없이 해야 되는데 무엇으로 우리가 승리할 것인가? '아! 여호와는 닛시이다. 승리를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첫번째로 아말렉을 격파하고 나서 "여호와는 닛시이다. 승리를 주시니까 걱정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이 광야 길을 충분히 갈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 신앙 고백을 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산꼭대기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지팡이를 굳게 잡고 하나님의 임재성의 지팡이와 그 손을 높이 들라고 하였습니다.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승리하고 내려면 아말렉이 승리하는 그런 이상한 일이 벌어지잖아요? 그래서 모세는 "손을 높이 들라. 깃발을 높이 들라. 여호와 닛시이다. 승리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아론과 훌이 피곤한 모세의 팔을 양쪽에서 잡아줌으로 계속 깃발을 들고 있음으로 그 전쟁을 승리로 끝내는 그런 역사를 우리가 볼 수 있잖아요? 이게 무엇을 말해주는 겁니까? "항상 여호와의 깃발을 들고 있으라" 하는 뜻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나는 나의 삶에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하고 깃발을 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예수를 믿고 사는 사람인 것을 나타내라는 말입니다. 숨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집안에도 십자가를 분명하게 걸어놓던가, 예수님 사진을 밝혀 놓는다던가, 자동차 안에도 내가 늘 보는 성경을 가지고 다닌다던가, 어디를 가서 잠시 머물러도 기도를 드린다던가, 기회가 주어지면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하던가 하면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된 깃발을 항상 들고 다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잖아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하리라." 이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에 대해서 창피하게 감추거나 거북스러워하지 말고 "이것이 내 생애에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라고 힘있게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에 대한 강조점을 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디 가서 내가 집사 아닌 척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내가 권사 아닌 척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나는 기회만 있으면 어떤 자리에서도 내가 목사인 것을 빨리 밝히고 나면 내가 만날 수 있는 모든 유혹과 위험에서 나를 구원합니다. 그렇게 살란 말입니다. "깃발을 드는 자는 승리할 것이다. 그런데 감추는 자는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닛시이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깃발을 항상 높이 들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호와 닛시"입니다. 보세요. 어떤 사람이 성조기를 들고 있는 깃발만 보면 미국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태극기를 들면 대한민국이라고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어느 깃발이 내 손에 달렸느냐에 따라서 나의 신분이 밝혀집니다. 올림픽에 나간 선수들도 국가의 표시를 하고 경기하잖아요? "여호와 닛시"는 "여호와는 나의 깃발입니다." 이 깃발을 달고 살면 영적인 승리가 아말렉 전쟁에서의 승리와 같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신앙 고백은 "여호와는 닛시이다." 20세기 후반에 와서부터 서구의 기독교 국가들이 지나치게 휴머니티(Humanity)를 주장하면서 기독교의 깃발을 많이 내렸어요. 그러니까 다른 것도 다 내려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호와 닛시! 깃발을 높이 들어서 항상 승리하라!"

그 다음에 에스겔서 48장 35절에 "여호와 삼마"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 직역을 하면 "거기 머무시고 거기 계시는 여호와" 에스겔이 이스라엘 백성을 바라보았을 때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시고 그 성전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지 않는 영적 느낌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을 향하여 이스라엘의 회복을 호소하였더니 하나님께서 그에게 예언케 하신 것이 "여호와 삼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 임재하시다.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실 것이다"라고 예언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삼마"는 우리 각자 개인을 향하여 "사랑하는 자여, 여호와 삼마! 여호와가 내게 계시도다. 갈보리교회여, 여호와 삼마라! 하나님이 여기 함께 계시다. 대한민국이여, 여호와 삼마! 하나님이 이 나라와 함께 계시도다." 우리 개인의 이름을 부르면서 "당신에게 여호와 삼마!"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8장 11절에 보면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니라" 이것이 곧 "여호와 삼마"입니다. 스데반의 성령이 충만하여 순교했다고 그랬습니다. 그 자체가 곧 "여호와 삼마"인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그 의미가 "하늘의 도성, 충만한 영광, 거룩한 성"입니다. 그러던 예루살렘이 어느 날 "여호와 삼마"가 없어졌다고 그랬습니다. 예레미야가 어느 날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애가를 불러 "여호와 삼마"가 없어진 예루살렘을 슬프게 노래합니다. "슬프다. 이 성이여!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 이제는 왜이리 적막히 앉았는고? 본래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미망인 같고, 본래는 열방 중에 공주 되었던 자가 이제는 조공 드리는 자가 되었도다. 밤새도록 애곡하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중에 위로하는 자 없도다." 어찌 이리 예루살렘이 비통하게 되었는가? 바로 "여호와 삼마"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거짓꼴같이 된 예루살렘! 하나님 잘 믿던 사람이 방탕해서 세상으로 나갔을 때 똑같은 것입니다. "여호와 삼마가 없어진 자여!" 하나님의 거룩한 양이 항상 역사 하던 교회가 그것이 다 없어져 텅텅 비어있을 때 "어찌하여 여호와 삼마가 여호와 전에서 없어졌는고?" 여호와 삼마를 그리워하는 고백의 찬가! 우리가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까지 유대민족의 광야 40년 생활을 어떻게 이겼는가? 바로 이 "여호와 삼마"로 이기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성막을 만들어 놓고 그 성막 주변 동서남북에 3지파씩 진을 치고 삽니다. 행군을 할 때도 쉴 때도 정착해서 살 때도 이 하나님의 성막은 언제나 중앙에 모시고 있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 그것이 뭐냐? "여호와가 여기 계시도다. 여호와 삼마" 우리 마음 복판에 "여호와 삼마"가 이루어져서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래서 에스겔은 "여호와 삼마"로 신앙 고백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여호와 라파"라고 출애굽기 15장에 "치료의 하나님"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요 치료하는 하나님이라." 그래서 "하나님은 치료하신다."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모든 질병을 치료하시는 하나님! 이 부분은 회복할 수 없는 부분에서 고침을 받은 기적만을 생각하지 말고 지금 내가 이렇게 건강하게 존재하는 이것이 "여호와 라파"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라파"가 항상 내게 있을 수 있도록 항상 건강하게 살아있는 이것이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입니다. 우리들은 날마다 노동하면서 일을 많이 합니다. 아주 피곤에 지치고 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많은 공해가 있고 음식물조차도 건강을 해치는 수없이 많은 어려움에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건강하다는 것은 바로 "여호와 라파" 때문입니다. "여호와 라파"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의 모든 고장 난 것을 늘 고쳐주시는 하나님이다." 그런가 하면 "여호와 라파는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고통! 어느 때는 그 고통의 정도가 심해서 죽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죽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라파"가 있기 때문에 다시 나를 치료하여서 눈물이 기쁨으로 변하게 하는 "라파"의 은혜! 마라의 쓴 물이 단 물이 되어 갈증의 고통을 겪는 광야의 무리들이 시원히 마시고 그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을 보았을 때 '아! 이는 여호와 라파라! 치료하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치료의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 밖에 정치적 압박에서, 의를 위한 핍박의 사건에서, 극심한 가난에서 "여호와 라파" 치료하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사사기 6장에 나오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는 샬롬이다." 하나님의 평강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평화"를 "여호와 샬롬"이라고 했습니다. 언제 이 말을 썼는가? 기드온에게 최대의 사명이 주어졌을 때입니다. 기드온은 이스라엘 사사 가운데 다섯번째 사사로 나라를 구원한 사람이 됩니다. 그가 사사가 되었을 때 유대 민족은 이웃의 강대국인 미디안과 아말렉에게 침략의 위협을 느끼고 살았습니다. 기드온이 부하들을 데리고 미디안의 군대를 살펴보러 갔을 때의 광경이 사사기 7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적의 군대가 메뚜기의 중다함 같고 약대의 무수함이 해변의 모래 같은지라." 우리가 어떻게 저들을 당할 수 있을까? 감히 싸울만한 마음조차 갖기 힘든 비교가 안 되는 현실을 고민할 때 하나님께서 떨리는 기드온의 마음에 평화를 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떡과 고기를 가져다가 반석에 놓으라" 놓으매 하나님의 사자가 와서 반석에서 불이 나오게 하사 순식간에 태워버렸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표징을 구해서 그렇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불안했던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보고 그 곳에 단을 쌓고 한 말이 바로 "여호와 샬롬"입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유대인들의 인사는 "샬롬"이라는 말로 통용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평안을 주시도다. 하나님은 평안을 주시는 분이시다. 샬롬이다." 이렇게 히브리말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성지순례를 처음 갔을 때 예루살렘이 보이기 시작하면 버스 안내양이 다같이 손을 들라고 하면서 "이곳에 오는 자는 누구든지 예루살렘이 눈에 띠면 샬롬이라고 말해야 됩니다." 그래서 다같이 손을 들고 "샬롬!"하고 외쳤습니다. 마치고 이제 돌아가는 날 예루살렘이 거의 보이지 않는 지점에서 "이제 예루살렘이 여러분의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다같이 샬롬!" 그렇게 시켜서 하고 왔습니다. "예루살렘이여! 평안할 지어다. 온 세상이여! 평안할 지어다."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이렇게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기드온이나 에스겔이나 수없이 많은 신앙의 위인들이 자기들이 가장 인생에 어려운 시간을 만났을 때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내용을 발표했을 때 그 말을 우리 한국 성경에 그들이 바로 만들어 적은 게 몇 군데 있는데 그것은 일부러 그렇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부분이 필요하십니까? 아마도 이 다섯 가지가 다 필요한 분들이 많이 계시리라 믿습니다. 히브리 발음으로 표현된 몇 가지 고백 속에 우리 모두의 필요한 소원이 다 들어있는데 나는 하나님을 무엇이라고 고백하는, 내 신앙 고백은 무엇인가? 모세의 고백과 아브라함의 고백과 에스겔의 고백과 기드온의 고백이 다 고백이 있는데 '나는 하나님을 어떻게 고백할 것인가?' 바로 이 고백이 오늘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신앙의 위인들도 이렇게 어려운 일을 만났고 그 어려운 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에게 구원을 주셨는가 그때 그들은 신앙을 어떻게 고백했는가를 보면서 오늘 현실에서도 우리들이 나의 신앙 고백은 어떤 것인가 이 모든 고백을 함께 고백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역사가 모두에게 은혜로 주어지는 축복의 오늘 안식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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