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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바로 섬기자 (출 8:2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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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바로 섬기자 (출8:25-32)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세상을 살아가는데 이 때 가장 유의해야 할 것은 세상 따라가지 말고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것입니다. 오늘 새벽에 본 말씀 골3:5-6에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했습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그런데 큰 문제는 사단은 구원 받은 하나님 백성들을 쉽게 내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어려움을 당하고서도 속히 변화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출5:2절에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한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이처럼 사단의 미혹을 받아 하나님을 무시하고 마치 아합 왕 시대와 같이 여호와와 세상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다면 큰 실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결과는 바로 왕이 무서운 재앙으로 고난 받듯 하나님의 진노를 살 수밖에 없습니다. 혹시 그런 가운데 있다면 이 시간에 속히 벗어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것입니까? 이 사실을 우리는 오늘 본문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와 바로 왕과의 설전에서 잘 배울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을 바로 섬기려면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출8:25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 했습니다.
이 말을 우리에게 적용하여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을 믿기는 믿되 세상은 떠나지 말라’ 하는 음성입니다. 즉 ‘교회 나가는 것 막지 않겠다. 그러나 네 가치관과 삶은 세상에 말뚝을 박아놓고 살아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사단의 이 작전에 걸려 넘어진 사람들은 성도인지 세상 사람인지 구별이 안 됩니다. 몸은 교회 나오지만 삶은 언제나 세상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바로의 타협안에 모세의 대답은 어떠합니까? 26-27절에 “그리함은 불가하니이다 -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되 우리에게 명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 했습니다. 여기 사흘 길의 희생은 사흘 동안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예표에요. 그러므로 우리는 모세의 대답처럼 우리는 절대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거기 나아가 내 죄를 다 버리고 세상 미련에 대해 죽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것입니다.

복음송에 이런 노래가 있지요.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3번) 뒤돌아  서지 않겠네.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3번) 뒤돌아 서지 않겠네” 아직도 몸만 교인이지 세상에서 출애굽하지 못했다면 회개하고 바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을 바로 섬기려면 신앙에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28절을 보면 “바로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바로 왕이 하나님께 재앙으로 큰 고통을 당한 후에 내놓은 타협안입니다. ‘내가 보내기는 보내겠는데 광야에서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내가 하나님도 사랑하지만 세상도 완전히는 버릴 수가 없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겠지만 주일날 문 닫고 주일예배 나가고 교회와 사회에 봉사하고 저녁예배 수요기도회 새벽기도회 십일조와 전도하는 등 그렇게까지는 못하겠다.’ 이것이 사단의 유혹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이 사단의 유혹이 빠져서 적당히 신앙생활하려고 하는데 그렇기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지 못하고 행복을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왜 이렇게 무력한 집단이 되었습니까?  예수는 믿되 멀리가지 않으려는 사람들로 교회가 넘쳐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합니까?  너무 멀리가지 말라는 바로의 타협안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왜 천만 그리스도인이 있어도 세상이 어둡습니까? 세상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으려는 교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세례 요한 같은 음성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말세에는 자기 정욕을 좇을 스승을 두고 자기 신앙을 적당히 옹호해 주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정상으로 키우려고 하면 원수를 만난 듯 거부하고 쫓아내게 됩니다. 이래서는 나도 죽고 너도 죽고 다 같이 죽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죽은 것입니다.

디지털 혁명을 일으켜 세계 최대 갑부 가운데 한 사람이 된 인텔사의 엔드류 그로부라는 말하기를 “뭔가에 미친 사람이 세상을 뒤집더라”고 했습니다. 옛 말에 미친놈이 곰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에 미친 사람이 마귀 때려잡는 것입니다. 예수에 미친 사람이 세상을 뒤집고 복음에 미친 사람이 세상을 구원합니다.

3. 하나님을 바로 섬기려면 가장 귀한 것을 사랑의 대상에서 포기해야 합니다.

출10:11을 보면 “ 그는 불가하니 너희 남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이것이 너희의 구하는 바니라 이에 그들이 바로 앞에서 쫓겨나니라”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고 바로에게 계속 하여 재앙으로 고통 주시자 또 다시 바로 왕이 내놓은 타협안입니다. 원하는 대로 사흘 길을 가서 희생을 드리되 다 가지는 말고 남자들만 가라는 것입니다. 가족과 우양의 떼가 함께 가는 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는 이스라엘을 끝까지 묶어두기 위해서 이렇게 합니다. 북한에서 남파된 간첩들이 자수하지 않고 다시 돌아가는 것이 북한에 남겨둔 가족들 때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어느 누가 가족들과 재산을 놓고 남자들만 나갈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처럼 성도들이 열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면 사단은 또 타협안을 들고 나옵니다. ‘열심히 믿는 것은 좋지만 너의 가장 소중한 것은 포기하지 말아라.’ 마치 사울 왕이 좋지 않는 것은 멸하고 자기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은 남겨 놓은 것처럼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미련 두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명예이고 혹은 돈이고 이성이고 자랑이고 가족이나 취미일 수도 있습니다. 다른 것은 자신이 있는데 그것은 하지 못합니다. 부자 청년은 물질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물질이 우상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들 이삭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했습니다.

이렇게 바로왕이 또 타협하려 하자 여호와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출10:12를 보면 여호와께서 애굽 땅 위에 메뚜기로 가득하게 해서 밭의 모든 채소를 먹게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열심을 가져 은혜를 받아도 소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아직도 버리지 못한 그것 때문에 우리 심령에 주신 은혜의 새 싹 다 갉아먹어버려 황폐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바 되어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딤후3:5-7) 말했습니다.

4. 하나님을 바로 섬기려면 주를 위해 십자가 지고 불편과 수고도 기쁨으로 감수해야 합니다.

출10:24절에 “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것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왕의 마지막 타협안입니다. 바로 왕이 하도 재앙 때문에 죽겠으니까 내 놓는 타협안이 가족들도 데려가는 것은 좋으나 양과 소는 끌고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적용하면 물질로까지 예배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달리 신앙 수준으로 보면 주님을 위해서 순종은 하되 십자가 고난에 기쁨으로는 동참하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 몸은 가요. 그러나 소와 양은 가지 않아요. 이것은 부요한 순종 풍요로운 순종은 거부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떻게 고백합니까? 빌2:17-18에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그리고 행20:22-24에서도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했습니다. 그리고 골1:24에서는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했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일에 동참하여 받는 고난을 기쁨으로 여기지 못한다면 아직도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왕은 열 가지나 되는 큰 재앙을 당하고야 겨우 수락했습니다. 우리의 당한 영육 간의 고통이 다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하고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기려는 것 때문입니다. 더 이상 세상 것에 마음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 제일주의로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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