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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기다리는 자 (눅 2: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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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광일 목사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는 27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감옥에 있을 때 그의 딸이 아기를 낳아 데리고 왔습니다. “아버지, 아기의 이름을 지어주세요.” 딸의 요청에 만델라는 아이의 이름을 “Hope” 즉 희망이라고 지어 주었습니다. “너는 희망이야. 감옥에 있는 동안 희망이 나를 떠난 적이 없었지. 그리고 앞으로도 희망은 나를 떠나지 않을 거야.” 만델라가 석방되던 날, 전 세계 매스컴에 비춰진 만델라의 모습은 2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사람 같지가 않았습니다. 참 자유자의 표정으로 대중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후 대권을 이어 받은 만델라 대통령은 한 맺힌 사람의 모습이 아닌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용서하는 사람으로 등장했습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만델라는 희망을 가지고 어려움 중에도 기다림을 한번도 버린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회심리학자인 에릭 프럼은 인간을 ‘호머 에퍼런스 (Homo Esperans)’ 라고 정의했습니다. 즉 희망의 사람이며 미래를 바라보며 사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사람은 나름대로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94%의 사람들은 ‘인생의 목적은 기다리는 데 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나름대로 더 좋은 사람을 기다리고, 더 좋은 기회를 기다리며, 더 좋은 소식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현실이 힘들고 어려워도 기다림만 있으면 어떤 문제라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탄생하던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메시야가 올 줄 알고 있었고, 오시면 맞이하리라고 생각하며 수동적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기다림’ 이란 단어의 모습도 수동형입니다. 오면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시므온 선지자의 기다림은 수동형이 아닌 능동형의 모습입니다. 즉 메시야가 오실 것을 능동적으로 준비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준비함이 능동적이 되어야 합니다. 시므온처럼 기다리는 삶을 살려면,

첫째로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오래전에 독일의 바바리아 성에 사람들을 괴롭히던 포악한 루드비히 공작이 있었습니다. 성안의 모든 사람들은 공작을 두려워했습니다. 어느 날 공작이 사냥을 나갔다가 숲 속에 한 작은 예배당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제단 앞에서 오랜만에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예배당 벽에 무슨 글씨가 쓰이는 것입니다. 순식간에 보였다가 사라졌기에 앞부분인 ‘Three~’ 만 기억났습니다. 삼 일인지, 석 달인지, 삼 년인지 아무튼 그 안에 무서운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제껏 죄를 많이 지었던 공작은 나름대로 해석하기를 삼일 안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삼 일 동안 아내와 부하들에게 잘 해주었습니다. 죽어서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설 생각을 하며 삼 일 째 되던 날 높은 탑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공작은 다시 생각했습니다. 삼 일이 아니라 석 달이었구나. 석 달 동안 가족과 백성들에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석 달이 지나도 죽지 않는 것입니다. 공작은 이제야 확신을 가졌습니다. 삼 년이었구나. 삼 년 동안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나팔소리와 함께 독일 왕실에서 사절단이 왔습니다. 루드비히 공작을 독일의 황제로 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삼 일, 삼 개월, 삼 년을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생각하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던 공작의 소문이 전 독일에 퍼졌던 것입니다. 공작이 독일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앞으로 몇 십 년 살 거라고 생각하지 아니하고 삼 일뒤에, 석 달뒤에, 삼 년뒤에 심판대 앞에 설 것이라 생각하고 하루 하루를 절제하며 바르게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25절에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실 메시아를 위해 시므온은 열심히 율법을 지켰습니다. 사람에게도 신실하게 하나님의 마음으로 대했습니다. 언제 주님이 오셔도 맞이할 수 있도록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던 시므온은 평소의 삶이 의롭고 경건하였습니다. 여기의 ‘의롭고’ 에 해당하는 ‘디카이오스’ 는 ‘공정한’ 의 의미를 가지며 ‘경건하다’ 는 말인 ‘율라베스’ 는 ‘꽉잡다’ 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의롭고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자 하나님의 말씀을 꽉 잡고 살아갑니다. 시므온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잡고 메시야를 기다리며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긋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오시지 않습니다. 또한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채 세상과 타협하며 사는 사람에게도 오시지 않습니다. 시므온은 나이가 들었으나 항상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기 위해 힘을 다했으며, 하늘나라 소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이처럼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경건하게 메시야를 기다리던 시므온에게 주님이 찾아오신 것처럼 여러분도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성령의 감동을 받고 살아야 합니다

1955년 미국 오레곤주 유게네라는 마을에서 영화를 상영한다는 광고가 있었습니다. 영화는 한국전쟁에서 생긴 고아들의 참상을 소개하며 이들을 돌보는 손길을 찾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그 영화를 보았던 한 농부 부부의 가슴속에 감동이 일어났습니다. 허지만 고아들이 불쌍하기는 하지만 가난한 농부인 자신들이 나설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집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영화 속의 마음 아픈 장면들이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부부는 기도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농장의 일부를 팔아 직접 한국에 가서 8명의 고아들을 양자로 데려오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이 신문에 기사로 나가자 여기 저기서 이들을 돕겠다는 편지가 왔고 어떤 가정에서는 고아를 양자로 삼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농부 부부는 전적으로 이 일에 매달리게 됐는데 그들이 바로 유명한 홀트 양자회의 주인공인 해리 홀트 부부입니다.이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고 순종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본문 25절 이하에 성령이란 단어가 시므온과 관계되어 3번 나옵니다. 25절에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절에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절에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 시므온은 전적으로 성령에 의해 산 사람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또한 시므온은 “주께서 보내시는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 는 성령의 지시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성전에 들어가 아기 예수를 품에 안는 축복을 얻게 됩니다.

성령이 감동하시는 순간이야말로 우리 인생에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사단이 성령의 감동에 순종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지만 감동하심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시므온처럼 성령의 감동에 따라 찬양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에 따라 기뻐해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에 이끌려 기도하여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에 따라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시므온처럼 성령의 임재를 느끼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제 날마다 성령의 감동하심에 순종하며 믿음으로 기다리다가 예수님을 만나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영적인 눈이 열려져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예수를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은 예수를 만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생각대로, 자기 주관대로 사는 사람은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영적인 눈이 열려져야 아기 예수를 바로 보며 품에 안게 되는 것입니다. 당시 성전에 많은 아기들이 할례를 받으려 왔지만 시므온은 영적인 통찰력으로 아기 예수를 구세주로 알아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향하여 “주여!” 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29절에 보니 “주재(主宰)여!” 라고 불렀습니다. “주여!” 라는 말보다 “주재여!” 라는 말이 더 강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재’ 인 ‘데스포테스’ 의 뜻은 ‘주권자’ 이기 때문입니다. 즉 시므온은 나를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절대권한은 오직 예수만 가지고 계시고 자신은 그에게 속한 종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기에 시므온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던 당시의 사람들과는 달리 영적인 눈이 열려져 메시야 이신 예수님을 바로 보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눈도 열려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각 사람의 절대적 주관자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은 대 주재로 오셔서 우리를 주관하여 주십니다.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십니다. 우리에게 합당한 직장을 허락하시고 직위를 주십니다. 또한 우리의 거처와 경계를 정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다윗도 ‘대 주재되신 하나님’ 을 역대상 29장 12절에서 찬송하였습니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이심이니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시므온 선지자 역시 다윗처럼 예수를 대주재로 고백하며 아기 예수를 안고 30절에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아오니” 라고 찬양합니다. 시므온은 예수를 통해 평안히 놓아주시는 앞날의 해방을 보았습니다. 예수를 통한 구원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방의 빛이요 이스라엘의 영광임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시므온의 가슴은 예수님을 안은 가슴입니다.

금번 성탄에 여러분의 가슴에 무엇을 안으려 하십니까? 미움을 안고 경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시기와 질투를 안고 찬양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죄악을 안고 성탄을 맞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오신 예수님을 가슴에 안고 찬양하고, 경배하고 기뻐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안으시기 바랍니다. 주위의 소외된 형제를 안아야 합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도 안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아기 예수를 품에 안는 은혜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성탄을 앞두고 예수님을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까? 기다림도 없이 성탄을 맞이하려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헛된 것을 기다리지 말고, 영원한 위로이신 예수를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영적인 눈이 열려져 성탄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아기 예수를 품에 안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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