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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정한 사랑의 4가지 정의(창 29: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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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한규 목사

< 은혜가 넘치면 말씀이 사모됩니다 >

사람에게는 나름대로 은혜를 체험한 장소가 있습니다. 은혜를 체험한 장소를 시은소(施恩所)라고 하는데, 사람에게 일생 동안 잊혀지지 않는 시은소가 3군데 정도만 있으면 그 신앙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 신앙이 될 것입니다. 이 제단이 여러분들에게 하나의 시은소가 되기를 바랍니다.

저에게도 영원히 잊지 못할 시은소가 몇 곳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제가 청년 때 새벽기도 다니던 교회입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4가지 삶을 다짐했습니다: 1) 주일성수는 죽는 한이 있어도 지키자; 2) 최대한 새벽기도에 빠지지 말고 참석하자; 3) 소그룹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협조하자; 4) 최대한 베풀면서 살자.

그 당시 은혜가 넘칠 때 저의 삶에 나타난 가장 큰 변화 중의 하나가 설교 말씀이 아주 은혜롭게 들렸다는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아무리 유명한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도 거의 감동이 없었지만 그 다음부터는 어떤 말씀을 들어도 그렇게 은혜롭게 들렸습니다. 그 다음부터 귀한 말씀을 놓치기 싫어서 항상 말씀 노트를 들고 다니면서 좋은 말씀들은 다 받아 적기 시작했습니다.

그 일이 얼마나 유익했는지 모릅니다.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유익이 있었습니다: 1) 말씀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2) 예배 시간에 조는 일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3) 말씀 노트가 하나씩 더해지면서 영적으로 풍성한 만족감이 생겼습니다; 4) 대학부 교사를 하면서 그 말씀노트를 활용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5) 나중에 목회를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사모하는 생활을 하면서 성경 말씀 중에 가장 감동받았던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이었습니다. 이 본문을 보면서 “교회 사랑을 이렇게 해야지!”라고 스스로 얼마나 각오를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 진정한 사랑은 무엇입니까? >

오늘 본문은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는 장면을 통해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잘 알려주는 본문입니다. 진정한 사랑이 무엇입니까?

1. 대가를 지불하는 것

오늘 본문은 야곱이 형 에서에게 사기를 쳐서 장자권을 빼앗고 형을 피해 하란에 사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쳤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라반의 집에 도착해서 한 달쯤 지났을 때 라반은 본문 15절에서 야곱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내 조카지만 공짜로 일하게 할 수는 없다. 대가를 주려고 하는데, 어떤 대가를 원하느냐?”(15절) 그때 라헬을 사랑했던 야곱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년을 봉사하겠다.”고 했습니다(18절).

야곱은 다른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오직 사랑하는 라헬 한 사람을 얻기 위해서 7년 동안 봉사하겠다고 했습니다. 계산을 초월한 그의 모습을 보십시오. 사실 야곱이 그런 마음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날 정도로 욕심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야곱조차도 사랑 앞에서는 순수했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계산이 없게 만듭니다. 대가를 생각하고, 얻을 것을 생각하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이 장면에서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는 것은 성도가 교회를 사랑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교회로부터 무엇을 얻겠다는 마음이 없어야 합니다. 최소한 교회를 위해서 7년 동안 묵묵히 봉사하지 않으면 교회 사랑을 알 길도 없고, 교회로부터 주어지는 축복도 알 길이 없고, 주님의 마음을 얻는 행복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헌신한 것에 대해서 대가를 얻겠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가를 얻겠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대가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생각한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많이 심으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많이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본문 21-25절 말씀을 보십시오. 드디어 야곱은 7년 동안 최선을 다해 봉사함으로 라헬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혼식을 치르고 기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는데, 다음날 아침 보니까 신부가 라헬이 아니고 레아였습니다. 외삼촌 라반에게 속은 것입니다. 그 동안 야곱은 주로 속이는 삶을 살았는데 본문에서는 야곱이 속는 것을 봅니다. 이 장면을 보면 심은 대로 거둔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속이면 속게 되고, 사랑하면 사랑받게 됩니다. 좋은 것을 심으면 좋은 것을 받게 되고, 나쁜 것을 심으면 나쁜 것을 받게 됩니다. 사랑이든지 미움이든지 모든 것이 되로 주면 말로 받게 됩니다. 말도 좋은 말을 심으면 좋은 말을 듣게 되지만 나쁜 말을 심으면 나쁜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러므로 비판을 조심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이 눈에 띄면 나 자신도 그런 모습이 없는지 먼저 살펴야 합니다.

욕심쟁이가 욕심쟁이를 제일 먼저 알아봅니다. 얄밉게 행동하는 사람이 남이 얄밉게 행동하는 꼴을 못 봅니다. 자랑쟁이가 남의 자랑에는 알레르기 반응을 보입니다. 돼지의 눈에는 배설물이 잘 보이고, 성자의 눈에는 거룩한 것이 잘 보입니다. 사실 비판주의자는 제일 비판받을 것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실을 생각하면 우리는 타인의 잘못에 너그러워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와 비슷한 조건과 환경에 있으면 더 잘못된 행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우리의 입에서는 비판하는 말보다는 축복하는 말이 많이 나오도록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축복하면 자신에게 축복이 올 것이고, 다른 사람을 저주하면 자신에게 저주가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좋은 것을 심으려고 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생활을 하면서 최대한 축복과 격려와 위로의 말을 많이 심고, 사랑과 은혜를 많이 심어야 합니다. 그처럼 남에게 축복의 말을 많이 해주고 대가를 바라지 않고 묵묵히 사랑을 심을 때 언젠가 그 축복과 사랑은 반드시 내게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2. 변함없이 봉사하는 것

본문 20절 말씀을 보면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7년 동안 봉사를 하는데, 그 7년을 수일같이 여겼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바로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환경이 어려워져도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기분에 따라, 환경에 따라 마음이 오락가락하지 말아야 합니다. 야곱은 7년 동안 봉사하고 라헬 대신 레아를 얻고 다시 7년간 봉사하기로 약속하고 7일 후에 라헬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이미 원하던 라헬을 얻었다고 해서 나머지 7년을 엉터리로 봉사하고, 대충 시간만 때우지 않았습니다. 본문 30절 말씀을 보면 다시 7년을 예전과 같이 변함없이 봉사했습니다.

가끔 보면 원하는 것을 얻고 나서 마음이 변하는 분들을 봅니다. 아들이 대학에 합격하고, 문제가 해결되고, 병이 낫고 나서 헌신이 후퇴하고, 기도생활이 후퇴하면 그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문제를 주시는 이유는 기도하고 헌신하라는 표시이고, 하나님께서 문제를 풀어주시는 이유는 더 기도하고 더 헌신하라는 표시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변화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사랑이 변화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장 좋은 방법은 예수 안에서, 진리 안에서 내가 변하는 방법입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가장 오묘한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기독교가 미신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무엇입니까? 미신은 환경의 변화를 추구하지만, 기독교는 자신의 변화를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미신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을 변화시킨다는 개념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팔자를 고치고, 환경을 고치는 것에 몰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변화시킴으로 환경을 극복하게 합니다. 그러면 믿어도 환경의 변화는 전혀 없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잘 믿으면 정말 환경도 변합니다.

우리는 가끔 예수 믿어도 성격은 안 변한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잘 믿으면 성격도 변합니다. 기본 틀의 흔적은 남아있어도 여러 부분에서 이미 많이 변화된 것입니다. 그런 변화가 없으면 목회처럼 불행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변화가 있기 때문에 목회가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우리 권사님들도 처음에는 “이 개척교회가 어떤 교회인가?”하는 생각으로 한두 번 찾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얼마나 아껴주고 사랑해주는지 모릅니다. 젊은 집사님들도 처음에는 도망 다니면서 주일 예배도 빠지는 분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주일성수는 기본이고, 얼마나 곳곳에서 열심히 봉사하는지 모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목회에 힘이 납니다. 그런 변화가 있기 때문에 삶이 의미 있는 것이고 삶의 진짜 재미도 그런 삶에서 주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 믿는 욕심을 무엇보다 나 자신이 변하는데 두어야 합니다. 잘 믿으면 사람은 반드시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나 자신의 변화를 추구하면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도 변함없는 사랑, 변함없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3. 즐겁게 헌신하는 것

야곱이 7년 동안 봉사하면서 7년을 수일같이 여겼다는 말은 라헬을 진정 사랑하기에 헌신이 즐거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마음으로 배우자를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를 섬기다 보면 마음 아픈 일도 많고, 힘든 일도 많습니다. 때로는 신앙의 권태기도 찾아옵니다. 그래도 교회를 위해 7년을 수일 같이 여길 정도로 사랑하면 그것처럼 복된 삶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수많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일만큼 위대한 방법은 없습니다. 진실한 신앙인에게 나타나는 표식에는 인격의 변화도 있지만 더욱 중요한 표식은 교회를 사랑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교회의 부족하고 연약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헌신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교회를 진정 사랑한다면 교회의 모든 교인들을 힘써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누구도 보고 싶지 않을 만큼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서로 미워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마음 아파하시는지 모릅니다. 새우 싸움에 고래 등 터집니다.

어느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는 김집사와 이집사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집사의 돌잔치에 교인들이 참석했는데 마침 김집사가 찬송을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김집사가 찬송가 293장을 찬송하자고 했습니다. “천국에서 만나보자 그 날 아침 거기서/ 순례자여 예비하라 늦어지지 않도록...”

가사는 너무 소중한 가사지만 남의 돌잔치에서 장례 찬송을 부르니까 이집사 얼굴이 불편했습니다. 그런데 아랑곳하지 않고 김집사가 찬송가 294장을 한 장 더하자고 했습니다. “친애한 이 죽으니 우리 눈물 흘리며/ 슬퍼 머리 숙일 때 주여 위로하소서....” 그러니까 마치 돌을 맞은 아이가 빨리 가라는 소리 같아서 이집사가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난 얼마 후에 김집사가 초상을 당했습니다. 이번에는 이집사가 찬송을 인도하게 되어 찬송가 115장 찬송하자고 했습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그렇게 갈등하니까 제일 힘든 사람은 목사님이었다고 합니다. 목사님만 힘들었겠습니까? 주님도 마음이 많이 아프셨을 것입니다. 정말 새우 싸움에 고래 등 터지는 꼴입니다.

우리는 같은 교인을 최대한 아껴주고 격려하고 사랑해주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 대한 험담을 하고 입바른 말만 하면 듣는 사람도 마음이 아프겠지만 무엇보다 주님도 마음아파 하실 것입니다. 나중에는 주님께서 참다못해 치리의 손길을 펴실 것입니다. “그래? 네 모습은 어때? 아무래도 너부터 조금 다듬어야 하겠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치리의 손길이 얼마나 아픈지 모릅니다.

험담이 한 마디 나갈수록 복도 하나씩 달아날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같은 교인들에게 사랑과 격려와 축복의 말을 한 마디 해주면 그 말을 듣는 사람에게도 복이 임하지만 그 말이 하는 사람에게도 복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같은 교인들을 힘써 사랑해야 합니다.

인생 재는 법은 물질과 힘의 크기에 있지 않고 사랑과 마음의 크기에 있고, 시간 길이에 있지 않고 사랑 길이에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산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분은 50년을 살았는데 사랑 나이는 1살도 되지 않는 분이 있고, 어떤 분은 20년을 교회에 다녔는데 영적인 나이는 1살도 되지 않은 분이 있습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제가 왜 여러분들에게 선교를 강조합니까? 선교지에서 외롭게 영적 전투를 하시는 선교사님들에게 우리의 기도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선교에 아낌없이 동참함으로 조금 더 성숙한 신앙인이 되자는 저의 간절한 바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넉넉하지 않아도 우리보다 훨씬 더 고생하시는 선교사님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의 필요를 기쁘게 채워드릴 때 우리의 행복의 키는 부쩍 자라게 될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선교에 열심을 가진 사람을 보면서 항상 체험하는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교의 문이 열리면 축복의 문이 열리고 선교의 문이 닫히면 축복의 문이 닫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교에 최상의 관심을 표하고 헌신할 때 우리의 삶에 마이너스가 없고, 십자가가 더하기(+) 표를 상징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 놀라운 축복이 더해질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한 사랑을 하려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한 것은 어떤 아름다운 사랑도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야곱은 라반의 계략으로 라반의 두 딸을 동시에 아내로 맞이하게 됩니다. 야곱의 입장에서 두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니까 좋은 것 같지만 그것 때문에 야곱의 가정에 끊임없는 갈등이 일어나게 됩니다. 게다가 여종들인 실바와 빌하까지 아들을 낳게 되니까 그 관계가 더욱 복잡해집니다. 그것이 당시 관습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사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는 것도 정말 벅찬 일입니다. 전력을 다하고, 최선을 다해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종들까지 네 여자가 있으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본래 계획대로 한 남자에 한 여자가 이상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나의 배우자를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 여기고 그를 전심으로 사랑하고, 배우자에게 성실해야 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잘 사랑하려면 최선을 다해도 아쉬울 따름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배우자보다 부모를 더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뜻이 아닙니다. 부모는 사랑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존경의 대상입니다. 부모가 아무리 존경스러워도 부모님을 존경한다고 하다가 배우자의 틈을 벌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을 존경할 때 배우자의 마음을 헤아리고 지혜롭게 존경심을 표출해야 합니다.

또한 배우자보다 자녀를 더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 뜻이 아닙니다. 자식이 아무리 사랑스러워도 먼저 배우자를 사랑해야 합니다. 사실상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보다 자식을 더 사랑하는 것은 없습니다. 배우자를 사랑하지 않고 자녀를 사랑한다고 하는 모습 속에서 자녀는 사랑과 행복을 느끼지 않습니다. 자녀들이 제일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은 자기 부모님이 서로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최고의 자식 사랑이고 최고의 자식 교육입니다.

또한 성경에 나오는 레아와 라헬의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은 얼굴이 예쁜 사람보다 마음이 예쁜 사람을 귀하게 보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야곱은 눈이 나쁜 레아보다 아름다운 라헬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레아가 야곱의 총애를 받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레아에게 더 은총의 문을 여십니다. 그래서 라헬의 태를 닫고 레아의 태를 여십니다. 나중에는 라헬의 태를 열기는 하지만 결국 라헬은 둘째 아들인 베냐민을 낳다가 죽게 됩니다.

이 사실은 무엇을 교훈해 줍니까? 하나님의 뜻에 따르지 않고 외적인 화려함을 추구할 때에도 소원성취를 할 수는 있지만 그 결과로 생기는 고통과 불행까지 하나님은 면제시켜주지 않는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외모보다는 중심을 보고 선택하면 세상적으로는 손해를 볼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 결과는 축복으로 연결될 것입니다.

저는 개척교회와 작은 교회를 다니는 성도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6년 전에 정자동 월세 집 거실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조금 재정이 모여 14평 사무실 공간을 처음 얻었을 때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한 마음이 들고 감격했는지 돗자리를 깔고 며칠간 페인트 냄새가 나는 먼지 구덩이에서 혼자 철야 감사예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공사비가 천억 원 가까이 들었다는 인근의 한 초대형 교회에 구경삼아 갔더니 남자 화장실 크기가 저희 교회보다 컸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처럼 작은 교회에도 찾아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적인 관점으로 보면 너무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만약 제가 평신도였다면 저는 거의 틀림없이 100명 이하의 교회는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창피하고 부담이 되고 사리에 맞지 않는 일입니까? 그런데도 남이 강요한 것도 아닌데 자발적으로 기와집 교회 대신 초가집 교회를 선택하고 오니까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저는 그처럼 어리석은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얼마나 감격하고 고맙게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그분들을 보면서 가끔 속으로 “여러분들이 저보다 신앙이 있습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평신도라면 그렇게 예쁜 마음을 가지지 못할 것 같기에 더 고맙고 감동이 됩니다. 저만 고맙고 감동이 될까요? 단언하건대 하나님께서도 그런 성도를 보고 기뻐하시고, 감격하시고, “네가 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구나!”하고 고마워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치에 맞지 않고, 계산이 없이, 아무도 가기 싫어하는 그 길을 가는 성도들을 위해 최상의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또한 그런 부모의 모습을 보고 자라는 자녀들은 일찍이 철이 들고, 사명에 눈을 뜨고, 마음이 너그러운 자녀들이 될 것이고, 결국 하나님 나라를 위해 크게 쓰임 받는 거룩한 큰손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구현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외모보다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도 중심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시야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어느새 사랑과 행복은 신비한 모습으로 다가와 우리 곁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2005년에도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마음과 시각을 가지고 교회와 이웃을 사랑하며 헌신적으로 사는 복된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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