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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자 (막 15:2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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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영기 목사

제일 재미 잇는 운동경기는 내가 좋아하는 팀이 하는 겁니다. 월드컵 때 온 국민이 열광했던 것도 우리나라 선수들이 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재미 잇는 운동경기는 막판에 뒤집는 겁니다. 그것도 이기고 있다가 지는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팀이 지고 있다가 역전승 하는 것입니다. 이건 그냥 이기는 것보다 몇 배 더 재미있습니다.
발전은 어제 보다는 오늘, 오늘 보다는 내일이 나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 보다 나은 내일 되게 하소서” 기도하는 겁니다.
세상일은 한번에 딱 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안 되어서 실망하고 낙심하다가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되면 그건 더 신나는 일인 것입니다.
이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
처음 보다는 나중이 잘 되길 축원합니다.
어둠이 변하여 빛이 되시길 빕니다. 눈물이 변하여 웃음이 되시길 빕니다.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되시길 빕니다. 죽음이 변하여 생명이 되시길 빕니다. 낭패와 실망이 변하여 대 성공으로 바뀌는 기적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 가운데 있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실패가 성공으로 바뀌는 이야기는 성경전체에 있습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전 400년경,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이 침략을 당하고 전쟁에 패하여 거의 모든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그러다 주전 538년, 바사왕 고레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살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 기회를 포착한 사람들은 일부분뿐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로잡혀와 흩어져 살던 여러 낮선 나라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종교 전통을 고수했기 때문에 어디서든 남의 눈에 띄었고, 주변 사람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감정적으로 이들을 거부하던 사람들이 나중에는 이들을 뿌리 뽑으려고 혹독하게 박해하는 일도 자주 생기게 되었습니다.
주전 485년부터 4652년까지 통치했던 아하수에로왕은 유대인 모르드개의 삼촌의 딸인 에스더를 왕후로 맞이합니다.
그런데 아하수에로 왕에게 하만이라는 지위가 높은 사람이 있었는데, 왕의 모든 신복이 다 왕의 명령대로 하만에게 무릎을 꿇고 절하지만 모르드개는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했습니다. 그래서 하만은 모르드개와 모든 유대인들을 죽일 계획을 세웁니다.
왕에게 일만 달란트의 은을 주고 왕의 반지를 얻어 몇 월 몇 일(성경에는 아달월 십삼일), 하루에 모든 유대인은 노소나 어린 아이나 부녀를 막론하고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그 재산을 탈취하라고 조서를 각도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모르드개를 달아 죽이려고 나무를 세웠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모르드개와 왕후 에스더 그리고 유대인들은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들의 기도와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왕 앞에 나간 에스더의 계략으로, 내일이면 죽게 될 이들이 살아났습니다. 모르드개는 하만 보다 높은 지위를 얻게 되었고, 모르드개를 죽이려 하던 하만은 자기가 세운 나무에 달려 죽게 됩니다. 죽음 직전에 있던 유대인들이 오히려 적들에게 보복합니다.
대 역전극이 일어난 겁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 이들은 모두 역전승의 사람들입니다.
노아는 산위에 방주를 지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웃고 조롱했을 겁니다. 그러나 홍수가 날 때 생명을 구원하는 방주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의 발걸음이 얼마나 처량합니까? 그러나 그는 그가 바라보는 동서남북을 그와 그의 후손의 것이 되게 하였습니다.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는 것은 또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아들을 다시 돌려받고,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만나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0-11절에 보면, 때로 징계가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하십니다.
우리는 욥의 이야기도 압니다.
욥은 그는 정말 형편없이 된 사람입니다.
그의 소로 밭을 갈고 그 곁에 나귀들이 풀을 먹고 있었는데 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종들 중 하나만 남고 다 죽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살아있는 종이 와서 보고 하는데, 또 한사람이 와서,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서 양과 종들을 살라 버리고 나만 홀로 남았나이다.”
그가 그렇게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갈대아 사람들이 세 무리를 지어 갑자기 낙타가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종들을 칼로 죽였는데 나만 홀로 피하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하는 동안에 또 한사람이 와서,
“주인의 자녀들이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는데, 거친 들에서 큰 바람이 와서 집에 모퉁이를 치매 그들이 다 죽었고 나만 홀로 피하여 주인께 아뢰러 왔습니다.”
처음 소, 나귀 잃었을 때는 “그럴 수도 있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식들까지 다 죽고 난 다음에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이런 날 벼락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마 이정도 되면 웬만한 사람은 자살할겁니다. “이제 무슨 낙으로 산다는 것인가?”
그런데 문제는 계속됩니다. 다음 어느 날 이번에는 욥이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났습니다. 어느 정도?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을 정도입니다. 곁에서 보다 못한 욥의 부인이 “당신이 그래도 자신의 온전함을 지키겠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랬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온전함을 지켰습니다. 그는 “주신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욥기 1장 22절에, “이 모든 일에 욥이 죄를 범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기 2장 10절 하반 절에는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죄를 범하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욥기 42장 12-1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더라.”고 하였습니다. 대역전극이 일어난 것입니다.
환난과 고통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하였고, 행동이나 말조차로도 하나님께 죄를 범치 아니하니까 하나님께서 욥의 말년을 성공으로 이끄셨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욕하고 희롱하였습니다. 욕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세상에!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병든 자 고치셨습니다. 귀신을 쫓아 내셨습니다. 굶주린 자 먹이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그 정도면 찬양과 경배를 받으셔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욕당하고 희롱 당하셨다. 그의 몸은 채찍에 맞아 찢어지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결국 십자가 위에서 고통당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동정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욕하고 있었습니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동정심이 생기는 것이 사람의 심성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쳤다가도, 막상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면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조용해지는 것이 사람의 심성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오히려 더 난리인 겁니다.
그들의 생각은 “이제 우리가 이겼다” 그랬을 겁니다. “예수라고 하는 사람, 별의별 기적을 다 행하기에 굉장한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별거 아니네.” 그랬을 겁니다.
오늘날,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향한 조롱 역시, “예수 믿는 것도 별 거 아니네.” 그런 겁니다. 심지어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조차도 “예수 믿는다고 다 되나?” “예수 믿는다고 그게 해결되나?” 그러니 말입니다.
처음에 마귀가 예수를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유혹을 뿌리치셨습니다. 성경대로 하면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에를 들면, “돌이 떡이 되게 해서 백성을 먹이라.”는 이 유혹의 말을 예수님은 얼마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비슷한 사건이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여자와 아이를 제외하고도 5천명이 먹었습니다. 그리고 열두 광주리 남겼습니다. 해 보니 되었어요? 안 되었어요? 되었습니다. 그러면 또 해보고 싶을까요? 안 하고 싶을까요? 해 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것을 이기는 것이 유혹을 이기는 것입니다.
누가 여러분 보고 ‘돌이 떡이 되게 해서 먹고 나누어주라“고 유혹해요? 안 하지요. 왜 안 해요? 그럼요. 애당초 할 수 없으니까.
어떻든 마귀가 예수를 유혹했고 그리 할 수 있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물리치셨습니다. 그래서 안 되니까, 이번에는 예수님을 죽일 생각을 한 겁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에게 들어가 예수를 팔 생각을 넣어주고, 결국 예수를 십자가 죽음에 넘겼습니다.
이제 예수님만 죽으면 승리는 마귀 것입니다. 아마도 마귀는 싱긋이 웃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굉장한 권능을 향하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는데, 결국 예수님은 운명하셨습니다. 성경에 없지만, 아마도 마귀들은 3일동 축배를 들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은 곧 세상의 모든 것을 살리시는 생명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로마서 3장 23-24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마귀와 유대의 지도자들 그리고 로마제국의 지도층들이 가졌던 기쁨과 환희도 불과 3일 만에 끝났습니다.
이제는 빌립보서 2장 10-11절의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라는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짐에 십자기 죽으심으로 치료와 건강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저주와 가난과 낭패가 변하여 하나님의 복이 충만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죄도 죽음도 더 이상 어찌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이제는 끝난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에 영원히 사로잡힌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모욕당하고, 희롱 당하고, 욕을 받고, 결국 죽으셨지만 오히려 부활하심으로 사망과 음부가 철폐 되고 하나님의 영광에 가득한 하나님의 나라가 열리게 되었다.
역사상 이 보다 더 위대한 역전 드라마가 어디 있습니까?
사망이 변화여 생명이 되고,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되고, 지옥에서 영원히 벌을 받아야 할 우리가 오히려 영원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해서 세상에 살면서 환난이나 고난이 없습니까? 예수 믿는다고, 아멘 했다고, 모든 일이 한 번에 다 이루어집니까?
그러나 분명히 믿는 것은,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 오히려 승리와 영광으로 변화시키는 위대한 역전승을 일으키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라가 위급하고 온 백성과 자신이 죽음 앞에 놓였을 때, 에스더와 모르대개는 기도 하였고 생명을 내걸었습니다. 가진 것 다 잃고, 망가질 대로 망가졌지만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행동으로나 입술로  범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 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고통당하며 죽으시는 예수님은 오히려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는 기도를 하셨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을 타당하게 여기시고 “다 이루었다”고 외치셨습니다.
결국 이들이 승리하였습니다.
토마스 에디슨이 평생 모은 재산인 뉴저지 주 웨스트 오렌지에 있던 공장과 연구시설이 불에 타버렸습니다. 1914년 12월 9일이었는데, 그 시설은 그 당시 평가로 2백만 달러였습니다. 에디슨의 24살 된 아들 찰스 군이 불탄 자리를 바라보고 있는데, 67세의 아버지 에디슨이 곁에 와서 그 아들을 위로 하였습니다.
에디슨은 부인까지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기존 건물과 묵은 시설이 아까워서 뜯어 고치지 못하는 나의 좁은 마음을 책망하시려고 새 것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이 이런 방법으로 가르쳐 주신 것이다.”
그랬습니다.
에디슨은 두 번 패배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신앙은 첫 번째 패배를 내일의 성공을 위한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시인 밀턴은 안질이 심해져서 완전히 실명한 뒤에 인류에게 빛을 주는 불후의 명작 “실낙원”을 섰습니다. 작곡가 베토벤은 거의 귀머거리가 된 후에 더 좋은 곡들을 만들었습니다. 문호 스티븐슨은 결핵으로 몹시 고생하다가 청각까지 상실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보물섬 등 수 많은 모험 소설을 써서 소년소녀들의 가슴을 부풀게 했습니다. 그는 귀는 멀었지만 모험은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끝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시작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실패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실패가 두려우십니까?
그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시는 분이 바로 여러분과 저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해를 마감함은 곧 새해의 시작 입니다.
실패했다고 여기는 순간이 오히려 성공을 향한 시작입니다.
분명한 것은, 믿음이 끝내 승리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기셨습니다. 그렇기에 여러분도 이길 것을 믿습니다.
새해에는 승리 하시는 여러분 되십시오.
때로는 실패한 것 같아도, 오히려 그것이 성공을 향한 징검다리가 되게 하십시오.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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