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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7년을 수일같이 봉사합시다 (창 2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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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한규 목사

< 봉사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

한 구도자가 진리를 찾아서 유명한 선사가 거하는 산사를 찾았습니다. 막 산사 아래에 도착했을 때에 산사를 끼고 도는 계곡 물에 산사에서 버려진 콩나물 대가리와 밥알이 보였습니다. 그 순간, 그는 발길을 돌려 하산했습니다. 콩나물 대가리와 밥알을 개울에 버리는 사람이라면 선사가 아니라 산신령이라도 만나볼 가치가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옛말에 산사의 참됨은 산사를 끼고 흐르는 계곡물을 보면 안다고 했습니다.

저도 참 정리를 못하는 편입니다. 제 방이 지저분하고 제 차도 지저분합니다. 그런 모습을 그냥 보여주며 살기 때문에 저는 결코 선사가 되기 힘든 체질입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기독교밖에 소망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처럼 희망이 없는 사람에게도 천국의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개 윤리적인 종교는 자기를 잘 가다듬으면 진리도 주어진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한 차원 더 나아가서 섬김과 봉사를 강조합니다. 사실 진리는 봉사를 아는 마음에 찾아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진리를 가르치기 전에 밥 짓는 일부터 시켰고, 무공을 가르치기 전에 청소부터 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축복도 대개 보면 봉사정신이 있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제가 새벽제단에 일찍 나오는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교회 청소를 위해서입니다. 정자동에 있을 때는 교회가 작았기 때문에 교회를 수도 없이 깨끗하게 닦았습니다. 제 방은 정리하지 않았고, 제 차는 정리하지 않았지만 거의 매일 새벽에 성도들 오기 전에 교회 바닥을 닦았습니다. 교회 바닥을 닦다 보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쑥쑥 들어오는 느낌입니다. 저는 교회 청소도 기도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성도들 볼 때에는 성도들이 미안하게 여길 수도 있기 때문에 억지로 안 하는 척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 안 볼 때에는 열심히 청소해서 축복을 내 것으로 만들어갑니다. 그렇게 청소하면서 항상 아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가 이 축복을 나누어 가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왜 나만 축복받느냐?”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 중에서도 그런 축복을 많이 받았으면 하는 간절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청소를 한번 쉬어 봤습니다. 계속 쉬다 보면 누군가의 눈에 지저분한 것이 보일 것이고 그때 청소하면 그가 축복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회의 청소할 부분이 보이고, 교회의 손질할 부분이 보이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모릅니다. 환상을 보는 영안보다 교회의 청소할 부분이 보이는 영안이 더 진실하고 복된 영안입니다. 잘 믿는 것은 열심히 봉사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가끔 구역장을 시키면 성경을 잘 모른다고 사양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필요한 구역장은 ‘가르치는 구역장’이 아니라 ‘봉사하는 구역장’입니다. 성경 지식이 해박하고, 학력이 있고, 교회 경험이 풍부해야 구역장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을 섬길 줄 아는 봉사자세 하나만 있으면 구역장 자격은 충분합니다. 목회자는 잘 가르치는 구역장보다 잘 섬기는 구역장을 더 좋아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잘 가르치는 사람보다 잘 섬겨주는 사람을 더 축복하실 것입니다.

< 7년을 수일같이 봉사하는 길 >

우리는 지난주에 야곱이 라헬을 사랑해서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서 7년을 수일같이 봉사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는 것은 성도가 교회를 사랑하는 것의 표상입니다. 그래서 금년 교회 표어도 <7년을 수일같이 봉사합시다>로 정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사랑할 때 야곱처럼 7년을 수일같이 여길 정도로 교회를 위해서 봉사해야 합니다. 7년을 수일같이 봉사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1. 믿음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봉사는 소중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봉사가 더욱 가치 있는 것이 됩니다. 가끔 교회행사가 있을 때, 그 행사 때문에 예배 때에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부엌에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배드리러 온 사람에게 사랑의 식탁을 준비해 먹이려는 마음은 참 예쁜 마음입니다.

그래도 예배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봉사보다 믿음과 은혜가 먼저입니다. 그처럼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면 예배를 온전히 드리고도 사랑의 식탁을 준비할 수 있는 지혜가 반드시 생길 것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예배도 온전히 드리고 사랑의 식탁도 잘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더욱 칭찬해주실 것입니다. 봉사도 중요하지만 믿음의 봉사가 더 중요합니다.

어떤 분이 모태신앙으로 학생 때부터 교회 봉사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봉사생활에 수시로 회의가 들었습니다. 결국 믿음의 문제인 것을 알고 그녀는 믿음을 더하려고 성경을 1독 하자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신약성경을 읽어 내려가는데 신약성경 첫째 장에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는 말부터 막혔습니다. 그 구절이 순수하게 믿어지지 않고 “무슨 다른 사연이 있을 거야!”라는 의심이 자꾸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신약성경 첫 장을 읽고 더 괴로웠습니다. 40년을 교회에 다니고 봉사도 열심히 했는데 신약성경 첫 장부터 믿어지지 않으니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결국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철야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성경을 읽는데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부터 막힙니다. 성령 주셔서 그것부터 믿어지게 하소서!” 교회에서 혼자 울부짖고 땅바닥을 치며 기도했습니다.

며칠 후, 밤새워 철야하고 새벽기도까지 마치고 교회 문을 나서는데, 갑자기 붉은 태양이 자기를 향해 쏜살같이 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는 소리쳤습니다. “하나님! 태양이 떨어지네요. 저 태양이 떨어지면 우리는 다 죽습니다. 저 태양을 붙잡아 주세요!”

그때 공중에서 이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저 태양을 붙잡고 있는 나의 손길을 의심하지 말라!” 그 순간, 마음속에 이상한 감동이 그녀를 사로잡았고, 그때부터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별로 의문이 생기지 않고, 하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피부로 느껴지고,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느껴지고, 교회가 주님의 몸이라고 믿어지면서 교회 봉사가 즐거워지고, 그 뒤로 한번도 믿음생활과 봉사생활에 회의가 생긴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위해 열심히 봉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봉사하고, 교회는 살아 계신 주님의 몸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7년을 수일같이 교회를 위해 봉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 영적인 철이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어머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철이 들면 내가 어머니를 위해서 무엇을 할까를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영적으로 어렸을 때에는 교회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는 존재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성숙하면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할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교회에 나올 때 무엇을 얻으려고 나오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렇게 얻다가 믿음이 더해지면 나중에는 주는 삶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피해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면 교회에서 무엇인가를 얻을 기대도 하면서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계속 얻는 것만 좋아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얻는 것은 없게 됩니다. 반면에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고, 힘써 드리려고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얻는 것이 많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성공에 대한 개념을 수정해야 합니다. 가장 성공적인 사람은 가장 많이 주는 사람입니다. 사랑을 주고, 친절을 주고, 기도해주고, 나의 물질까지 힘써 나누는 사람이 가장 성공적인 사람입니다. 우리 자신의 선한 양심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고,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오직 사단만이 “성공은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거야!”라고 속삭이면서 사람을 실패자로 만들 것입니다.

이번 지진해일로 많은 가난한 나라들이 처참하게 변했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에서 피해 국가를 돕자고 모금을 하는데 미국이 처음에 3천 5백만 불을 내놓겠다고 했다가 얼마나 욕을 많이 먹었습니까? 어떤 기사를 보니까 부시 대통령을 ‘짠돌이’라고 불렀습니다. 결국 3억 5천만 불을 내겠다고 했지만 이미 욕을 다 먹을 대로 먹은 뒤였습니다.

우리나라도 처음에는 60만 불을 내겠다고 했다가 짠돌이 소리를 듣고 곧 5백만 불(52억원)을 내겠다고 했습니다. 어제 일본은 5억 불을 내겠다고 했는데, 그 금액의 1%입니다. 어제 문화일보를 보니까 “우리의 경제규모를 비교해볼 때 아시아의 중심국가를 꿈꾼다면서 겨우 그 정도만 내느냐? 생각해볼 문제다!”라고 했습니다. 물론 국민세금에서 지출되어야 하지만 그런 곳에 남보다 조금 더 지출한다고 해서 섭섭하게 생각할 국민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번에 LG 카드 회사 부도를 막으려고 이제까지 6조를 지출했고, 이번에 또 1조 가까이 지출해야 한다고 합니다. 물론 그 경우에는 경제 전체를 생각해서 어쩔 수 없이 지출하는 것이지만 그에 비해 어려운 국가를 돕는 일에는 그 천분의 1도 안 되는 구호금을 지출해서 국민 전체를 짠돌이로 인식하게 만드는 문제는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짠돌이라는 소리는 듣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으로부터는 짠돌이라는 소리를 듣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날, 짠돌이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보고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응, 짠돌이 왔니? 또 달라는 소리 하러 왔지? 너는 아쉬울 때만 찾는구나!” 아마 그 짠돌이의 기도는 별로 능력 있는 기도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서 헌신하는 사람이 문제를 만나 기도했습니다. 그가 기도의 무릎을 꿇는 순간, 하나님께서 순식간에 최상의 조치를 내리실 것입니다. “미가엘! 가브리엘! 그리고 모든 관계 천사들아! 신속히 조치하라!” 결국 하나님의 축복은 헌신하고 감사하고 드릴 줄 아는 사람에게 주어질 것이고, 그런 사람들에게 7년을 수일같이 봉사하는 행복한 교회생활이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3. 순수하게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계산이 빠른 성도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부족해서 봉사를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서도 “부담이 된다!”고 교회 봉사를 멀리 하는 계산적인 성도가 있습니다. 물론 부담을 지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적절한 부담까지 피해버리면 축복까지 나를 피해 지나갈 것입니다.

요새 교회가 성장이 정체되고 비판의 주 표적이 되는 이유는 순수한 마음을 잃고 계산하는 성도가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믿음생활이란 원래 부담을 지는 삶을 살기로 작정한 삶인데 부담을 지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피하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죽어서는 천국에 가고, 이 땅에서도 전혀 부담을 지지 않겠다고 하면 그가 져야 할 부담은 고스란히 남들이 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얄밉게 보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도 곱게 보시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생활이란 순수한 마음으로 부담을 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삶입니다. 우리나라 초창기에는 엄청난 부담을 지면서 교회생활을 했습니다. 그때는 천국을 얻었으니 희생하며 살겠다는 동기를 가진 순수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그런 사람이 점차 적어지고 있습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1970년대에 목사의 인기도는 이발사 다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중대형교회 목사의 인기는 판검사를 능가합니다. 옛날에는 전액 장학금을 주어도 늘 신학생 수가 미달이었습니다. 고생해야 되니까 소명이 없으면 신학교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인기 있는 신학교의 입학경쟁률은 10:1이 넘고, 그 신학교에 들어가려고 3수, 4수를 하고 신학교 입시 학원까지 생겼습니다. 그런 현상에는 희생의 냄새보다는 출세의 냄새가 강하게 느껴집니다.

옛날에는 장로와 안수집사를 서로 안 하려고 했습니다. 너무 부담이 많고, 희생해야 할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부족한 것은 자기가 다 채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 자리가 희생하는 자리가 아니라 대접받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지금 중대형 교회의 장로는 상당한 권력을 누립니다. 많은 사람들 위에 군림해서 다스릴 수 있고, 1년에 수십억, 수백억의 재정을 장로님 몇 분이 좌지우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장로 선거를 하는데 돈이 동원되고, 총 회장 선거하는데 돈 봉투가 왔다 갔다 합니다. 그처럼 교회를 출세와 성공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몰려들고 복음과는 상관없는 분들이 교회 안에 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생활에서 순수함을 잃지 말고 기쁘게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십자가는 피하게 하는 길이고, 또 하나는 십자가를 지게 하는 길입니다. 그 두 가지 길이 우리 앞에 있을 때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길을 선택하겠다는 자세를 가지면 그 길에 대개 옳고, 하나님께 그 길을 축복하십니다

주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바로 전에 사단은 3번 주님을 시험했습니다. 그 3가지 시험은 다 십자가를 지지 말라는 시험입니다. 그때 주님은 말씀으로 사단을 물리쳤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주님이 십자가를 지는 말씀을 하셨을 때 베드로가 “주님! 십자가를 지지 마세요!”라고 하니까 주님은 베드로를 향해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계산으로 생각한다!”고 하셨습니다(마 16:23).

십자가를 회피하게 하는 것은 사단이 유혹하는 길입니다. 지금도 사단은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십자가를 지지 말라! 사명을 감당하지 말라! 부담 없이 편안하게 살라!” 그러나 편안이 곧 평안은 아닙니다. 성도는 십자가를 져야 진정한 평안이 주어집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편안할 수는 있어도 평안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바로 믿고 하나님 뜻대로 살려면 남들이 하지 않는 고생을 해야 할 때가 있고 손해 볼 때도 많습니다. 때로 신앙 때문에 남처럼 돈을 많이 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기쁘게 생각하고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렇게 십자가를 지면 하나님께서 죽도로 고생만 하도록 내버려두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기쁘게 질 때 하나님은 우리가 십자가를 진 것보다 열 배, 백배로 우리를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려고 할 때 우리는 칠년을 수일같이 봉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어려울 때 후퇴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상황이든지 봉사를 하다보면 어려운 일을 만납니다. 그래도 우리의 봉사는 퇴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어려움을 허락하십니까? 자를 것은 자르고, 살릴 것은 살리라는 뜻입니다.

어려움이 생기면 나쁜 것은 잘라야 합니다. 나쁜 습관을 자르고, 미움과 원망을 자르고, 잘못된 언어를 자르고, 게으름과 나태를 잘라버려야 합니다. 반대로 좋은 것은 살려야 합니다. 기도와 말씀의 자리를 더욱 살리고, 봉사와 섬김의 자리를 더욱 살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순간은 봉사를 후퇴할 때가 아니고 더 봉사에 나서야 할 때입니다. 사단이 하는 가장 큰 일은 봉사를 못하게 하고, 헌신의 꿈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봉사의 꿈을 꾸게 하지만 마귀는 봉사의 꿈을 깨는 선수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봉사의 꿈을 무너뜨리려고 갖은 공격을 다합니다. “네가 무엇을 하겠어! 꿈 깨라! 먹고살기도 힘들잖아!”

그런 식으로 봉사를 포기하게 만들고, 봉사하다가 낙심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임하면 봉사의 꿈을 꾸게 만듭니다. “은퇴했지만 이제 시작이야! 그 동안 봉사하지 못한 것을 할 찬스가 왔어!” 그처럼 좋은 꿈을 꾸고 실천하면 얼마나 삶이 행복해지는 모릅니다.

우리는 좋은 꿈과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돈을 엄청나게 벌겠다”는 것은 좋은 꿈이 아닙니다. “돈을 벌어 소중한 곳에 잘 쓰겠다!”는 것이 좋은 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꿈은 최종적으로 선교와 봉사의 꿈으로 귀결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결국 선교와 봉사의 꿈을 꾸는 자는 성공자가 되고, 선교와 봉사의 꿈을 잃어버린 자는 실패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선교와 봉사의 꿈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 점에서만은 마귀에게 지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성령님의 도우심을 입어 봉사의 꿈과 희망의 불씨를 살려야 합니다.

주님은 ‘씨 뿌리는 비유’에서 처음에 기쁘게 시작했다가 환난이나 박해가 있다고 포기하는 사람을 돌밭과 같은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일이 있어도 봉사는 방학하지 말아야 합니다. 힘이 들어도 봉사해야 합니다. 힘들 때는 마음속에 비판과 원망이 생겨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비판과 원망보다는 봉사를 더욱 각오해야 할 때입니다. 이 세상에서 칠년을 수일같이 꾸준히 봉사하는 삶만큼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삶은 없을 것입니다.

< 헌신과 봉사의 축복 >

꽤 오래 전에 서울에 사는 어떤 분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구원의 은혜에 너무 감사해서 자기는 덤으로 산다고 생각하고 교회를 위해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교회의 곳곳을 청소하고, 교회의 힘든 일은 혼자 도맡아 했습니다. 퇴직금 전부를 헌금하고, 교회명의로 대형차량을 사서 교인들을 픽업하며 봉사했고, 유산을 물려받을 때도 형제들을 설득해서 상당한 액수를 건축헌금으로 바쳤습니다. 그렇게 힘써 봉사하니까 교회에서 세례 후 4년 만에 집사 안수를 받으라고 했지만 때가 되지 않았다고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충성과 헌신을 보셨습니다. 얼마 후, 그는 미국 대사가 애물단지 같이 여기던 땅을 버리다시피 해서 사게 되었는데, 그 땅을 중심으로 주거지역이 형성되면서 땅값이 몇 십 배로 올라 더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축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께서 더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헌신을 기뻐하시고, 특히 대가를 바라지 않는 헌신을 더욱 기뻐하십니다.

가끔 어떤 분은 박수가 있으면 헌신하고, 박수가 없으면 헌신을 그칩니다. 그것은 순수한 헌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과 헌신이 정금 같이 순수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람이 박수를 쳐주면 고마운 일이지만 박수가 없어도 봉사의 손길을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의 인정이 없으면 오히려 하나님의 인정이 더 있게 될 것이고, 사람의 시선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시선을 더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교회의 규모 및 형편에 비해서 수많은 선교사님들을 도울 수 있었던 이유는 여러분들이 적극적으로 헌신했고, 요삼일육선교회를 통해서 소리 없이 꾸준히 헌신하는 ‘거룩한 손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들 중에는 일터의 경영이 어려운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헌신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어렵기 때문에 쓰는 규모는 줄였지만 헌신의 규모는 줄이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우리의 마음을 훈훈하게 만드는 작은 복음들입니까?

우리의 헌신은 환경에 따라 왔다 갔다 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인가 좋은 편 하나를 붙잡고 자기의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헌신할 수 있어야 진정한 축복이 주어질 것입니다. 금년에도 7년을 수일같이 봉사하는 마음으로 헌신해서 2005년을 생애 가장 복된 해로 만들어가는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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